본문 바로가기

2D/Pokémon

월간 드림 2월호 / 품에 담긴 초콜릿 상자


※ 월간 드림 18년도 2월호 참여작

※ 윤진 드림, 오리주 주의




품에 담긴 초콜릿 상자

written by Esoruen




“그러고 보니 미염은 초콜릿 줬어?”

“…응?”

“초콜릿 말이야! 밸런타인데이 초콜릿!”

“어….”


미염은 콘테스트 대기실에서 만난 루티아가 인사도 않고 물은 말에 난감하다는 듯 웃었다. 제가 반문한 건 그걸 몰라서 그런 게 아니었는데. 하지만 괜히 제 말에 부가설명을 붙이는 것도 좀 웃기다. 그러니, 모르는 척 대답이나 하는 게 좋겠지.


“아니, 딱히….”

“정말? 외삼촌이 기다릴 텐데!”

“유, 윤진 씨가? 에이, 설마….”


그럴 리가 없다는 듯 손을 저은 그녀는 오늘 아침 마주쳤던 윤진의 얼굴을 떠올렸다.

‘오늘 콘테스트 나가지? 너라면 잘 하겠지만, 힘내.’ 다정한 말을 건네며 빵이라도 먹고 나가라고 권하던 그는 평소랑 그다지 다를 것이 없어보였다. 딱히 무언가를 기대하는 것 같지도, 눈치를 보는 것 같지도 않아서 자신도 평소처럼 대한 거였는데, 제 초콜릿을 기다렸을 거라고?


‘윤진 씨는 팬도 많으니, 초콜릿은 많이 받지 않을까….’


자신은 이제 막 인지도를 올리기 시작한 콘테스트 스타다. 같은 콘테스트 스타인 루티아에 비하면 팬도 적고, 제 이름을 모르는 사람도 꽤 많다. 물론 길거리를 걸을 때 얼굴을 알아보고 말을 걸거나 선물을 주는 팬들이 있긴 했지만, 윤진의 인기랑 비교하면 초라할 정도였지. 그의 조카인 포켓몬 콘테스트 아이돌 루티아와 비교해도, 윤진의 인기는 부족하지 않다. 호연지방 사람이라면 체육관 관장이자 콘테스트의 달인인 그를 모르긴 힘들었고, 강한데다가 수려한 외견 덕분에 그에게 푹 빠진 여성 팬도 굉장히 많았으니까.


“설마라니! 물론 외삼촌은 팬이 엄청 많지만, 그렇다고 여자 친구가 초콜릿을 안 주면 상처 받을 걸?”

“아, 아니 여자 친구라니.”

“…그러면, 연인?”

“아니 그게 아냐, 루티아…!!”


‘아하하!’ 당황하는 자신을 보며 앙증맞게 웃은 루티아는 의상을 정리하더니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외숙모는 오늘 근사함 콘테스트에 나가지? 나는 귀여움 콘테스트에 접수했거든, 먼저 가볼게! 초콜릿 꼭 줘야 해!”

“루티아…!!”


‘그렇게 부르지 마!’ 부끄러움에 차 외치는 미염의 목소리는 안타깝게도 대기실 밖까진 닿지 않았다.


 


근사함 콘테스트는 무사히 끝났다. 대기실에서 신경 쓰이는 이야기를 들은 탓에 약간 불안하긴 했지만, 평소 연습을 열심히 한 미염은 마음을 잘 다스려 특별한 실수 없이 자신의 기량을 발휘할 수 있었다.


“미염 양! 오늘도 너무 멋있었어요! 이거 받아주세요!”

“여자끼리지만, 초콜릿 좋아하세요? 드시고 힘내세요!”

“앗, 나도 초콜릿 줄래! 받으세요!”


‘어라.’ 싱숭생숭한 마음으로 대기실에서 옷을 갈아입고 나온 미염은 자신을 반기는 팬들을 보고 사고가 정지되고 말았다. 방금까지 애써 생각하지 않으려고 한 초콜릿이, 설마 제게 선물로 들어올 줄이야. 요즘 밸런타인데이엔 꼭 여자가 남자에게 초콜릿을 주지 않더라도 자유롭게 초콜릿을 주고받는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자신이 초콜릿을 받을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는데.


“고, 고맙습니다. 잘 먹을게요…!”

“와아! 받아주셨어!”

“언제나 응원하고 있어요! 그럼, 저희 갈게요~!”


팬들은 선물만 전해주곤 빠르게 달아나 버렸다. 초콜릿과 나무열매를 한 가득 안고 우두커니 서있던 미염은, 제 품에 안긴 선물들을 내려다보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사랑받는다는 건 낯설긴 해도 기쁜 일이지만, 이걸 들고 루네시티까지 어떻게 돌아가지.

제 가방은 크기가 꽤 작아서 나무열매 정도는 넣을 수 있어도 초콜릿은 넣을 수 없다. 게다가 양이 적은 것도 아니니, 들고 다니기에는 조금 부담스러웠지.


“…여기서 먹고 갈까…?”


아니, 먹고 갈 수 있는 양이면 이런 고민은 안 하겠지. 제가 바보 같은 소리를 한 걸 깨달은 미염은 일단 밖으로 나가서 생각하기로 하고 발걸음을 재촉했다. 여기서 가만히 서서 고민해도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다. 나와서 걷다보면 좋은 생각이 떠오를 지도 모르고, 정 안되면 좀 불편해도 이러고 루네시티까지 가야겠지.

그렇게 대책도 없이 밖으로 나온 그녀였지만, 놀랍게도 신은 오늘 그녀의 편인 모양이었다.


“아, 나왔네. 기다렸어, 미염.”

“…?”


친근한 목소리. 우아한 손짓.

하늘 가득 펼쳐진 노을보다도 아름다운 미소를 지으며 자신을 반기는 것은, 오늘 아침 가장 먼저 자신을 응원해 준 동거인이었다.


“유, 유, 윤진 씨!!”

“응? 왜 그렇게 놀라는 거야?”

“아, 아니 그게…, 오늘 바쁘다고 하시지 않으셨어요?”


사실 놀란 건 다른 이유가 있기 때문이지만, 미염은 애써 다른 이유를 물으며 고개를 숙였다. 기분 탓일까, 품에 안고 있는 초콜릿이 어쩐지 아까보다 무겁게 느껴졌다.


“그건 그랬지. 하지만 괜찮아, 시간이 나서 마중 나온 거니까.”

“…저 때문에 괜히 무리하신 건 아니죠?”

“아니라니까? 걱정 마. 대신 집에 데려다 준 후 곧바로 가봐야 할지도 몰라. 아직 일이 남아있어서…. 아, 그건 선물 받은 거야? 이리 줄래? 들어줄게.”


역시 타인이 봐도 많아 보이긴 하는 양일까. 미염은 적극적으로 친절을 베푸는 윤진 덕분에 거절할 틈도 없이 품 안의 선물들을 넘겨주게 되어버렸다. 이럴 땐 고맙다고 인사를 해야겠지. 분명, 그럴 타이밍이었지만.


‘…역시 윤진 씨 정도 스타라면 초콜릿 같은 건 신경 쓰지 않으시는 걸까?’


그런 생각 때문에 감사 인사도 잊은 미염이 슬쩍 고개를 기울였다. 혹시 초콜릿을 신경 쓸까 걱정했는데, 이번엔 루티아의 말이 틀린 것 같았다. 그녀는 윤진이 눈치 채지 못하게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그래. 매일 팬들에게 엄청난 양의 선물과 사랑을 받는 그인데. 겨우 기념일 초콜릿을 신경 쓸 리가 있나. 제가 굳이 초콜릿을 주지 않아도, 집에 돌아가면 아마 팬들에게 받은 초콜릿들이 한 가득 있을 텐데. 역시 괜한 걱정이었다. 한결 마음이 편해진 그녀는 가벼워진 어깨를 으쓱였다.


“오늘도 우승했다며? 나는 직접 보진 못했지만, 팬들이 말하는 걸 들었어.”

“네. 열심히 했는데, 잘 되어서 다행이에요.”

“이제 마스터 랭크에 도전 할 수 있지? 너도 점점 스타가 되어 가구나. 선물도 이렇게 많이 받고.”


윤진의 목소리에는 뿌듯함이 가득했지만, 표정은 그렇지 못했다. 어딘가 아쉬움이 남은 미묘한 웃음. 그 불안정한 표정을 목격한 미염은 상대의 의도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엉뚱한 대답을 내뱉었다.


“아, 아녜요! 아직 윤진 씨 인기에 비하면 저는 무명 수준인 걸요!”

“뭐, 내 인기는 굳이 말할 것도 없지만…. 그것도 다 부질없다고 느껴질 때가 있거든.”

“그래요?”

“응.”


하아.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쉰 윤진은 갑자기 멈춰서더니 미염을 향해 몸을 돌렸다.


“아무리 인기가 많고 팬들이 쫒아오는 나지만, 결국 좋아하는 여자에겐 초콜릿 하나 못 받는 남자인걸.”

“……네?”


제가 뭔가 잘못 들었나. 미염은 자신도 모르게 현실을 도피하고 말았지만, 윤진의 시선은 명백하게 자신을 향하고 있었다.

기껏 안심한 마음이 요동치고, 깔끔하게 정리되었던 머릿속이 순식간에 난장판으로 변한다.

귀 끝까지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미염은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고 그의 팔을 잡았다.


“죄, 죄, 죄송해요!!”

“엑, 사과를 받으려고 한 말은 아닌데.”

“하, 하지만 신경 쓰고 있을 거라곤 생각하지 못해서! 저, 전 그…!”


과부하가 걸린 기계마냥 멈춰버린 미염은 결국 새빨개진 얼굴을 두 손으로 가리고 입을 닫았다. ‘이런.’ 제가 조금 짓궂었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던 윤진은 작게 소리 내어 웃었다.


“미염이도 바빴겠지. 괜찮아. 난 초콜릿보다 너랑 이렇게 잠깐이라도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게 더 기쁘니까.”

“…냉장고….”

“응?”

“냉장고에…, 초콜릿 만들어 둔 거 있어요. …집에 가서 드릴게요.”


겨우 목소리를 낸 미염은 슬쩍 손가락을 열어 그 틈으로 윤진과 눈을 맞추었다.


“사실 만들어 놓긴 했는데, 그, 드릴 용기가 없어서…. 윤진 씨는 분명 초콜릿 같은 건 잔뜩 받으실 거 같고, 그래서….”

“빨리 집에 가자.”

“예?”

“오늘 저녁 일정 다 취소할게, 가자!”


‘아니, 저, 윤진 씨! 잠깐만요!’ 자신의 손을 마주잡고 질주하는 윤진을 막기 위한 미염의 목소리가 해안시티 가득 울려 퍼졌지만, 두 사람을 말리는 사람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