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멀드림 계절합작 / 꽃이 피는 계절
※ 제너럴 드림, 오리주 주의
※ 합작 홈 주소 → http://prism.raonnet.com/dream-season/
꽃이 피는 계절
written by Esoruen
2월의 마지막 주, 거리에 쌓인 눈이 전부 녹았다.
슬슬 겨울도 끝이구나, 병사들의 중얼거리는 소리는 잔뜩 들떠있었다. 추워서 손발이 얼고, 눈이 내리고, 야외활동이 힘든 겨울보다는 당연히 봄이 좋지. 제너럴은 부하들의 들뜬 목소리에 담긴 심정을 충분히 이해했지만, 그 자신은 이 계절이 지나는 것이 기쁘지 않았다.
딱히 겨울을 좋아하는 것은 아니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는 계절에 호불호가 없었다. 어느 계절이던 장점과 단점이 있었고, 그중에서 제일 지내기 좋은 시기는 있을지 몰라도 그것이 ‘좋아한다’라는 감정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그래, 그에게 있어서 무언가를 좋아하게 된다는 것은 그렇게나 무거운 감정이었다.
“2월도 얼마 안 남았군요. 봄이 되면 겐트 주변에 화단을 만들까 하는데, 어떨까요?”
니베르는 카르텔과의 전쟁이 끝난 후 더 바빠졌다. 안톤을 쓰러뜨리기 위해 파워스테이션을 오가고, 한편으로는 제가 있었던 겐트의 복구 작업도 도왔다. 오랜만에 겐트에 온 그는 무너져있던 마을이 제법 재건된 것을 보고 저런 말부터 꺼냈지만, 젤딘의 반응은 시원찮았다.
“글쎄요, 그것보다는 성벽을 강화하는 쪽이 급할 것 같습니다만”
“성벽 보수는 지금도 하고 있을 텐데요? 꽃은 봄에 심어야지요”
“흐음. 제너럴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두 사람은 논쟁 끝에 제너럴에게 물었지만, 제너럴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마치 다른 생각에 빠진 사람처럼 책상만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그는 두 사람의 시선이 제게 향한 것을 뒤늦게 눈치 챘다.
“네? 아, 죄송합니다. 화단 말이지요?”
“예”
“뭐 어떻습니까. 니베르 중장 말대로, 봄에 하기 좋은 일 같고… 꽃은 정서에 좋으니까요. 예산에 무리가 가지 않는 선이라면 좋다고 보는데”
“역시 제너럴은 뭘 좀 아는군!”
의기양양해진 니베르와 달리, 제너럴은 웃어주지도 않았다. 방금 한 말은 결코 비꼬는 것이거나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니었다. 오히려 너무나도 진심이기에, 그는 웃을 수가 없었다.
꽃은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한다. 그렇기에 봄은 아름다운 것이겠지.
그런데도 그는 봄이 오는 것이 기쁘지 않았다. 아무리 꽃이 피어도, 날이 따뜻해져도, 그의 봄은 아직 온 것이 아니었다.
“그러고 보니 제너럴, 잘하면 블랙로즈단도 발전소 진압작전에 투입될지도 모르겠어”
“정말입니까?”
방금 전까지 멍하게 있던 사람이 맞을까 싶을 정도로 그의 반응은 빨랐다. 약간의 걱정, 그리고 약간의 기대. 그것 외에는 지극히 사무적인 말투였지만 니베르는 그의 눈에서 반짝이는 무언가를 발견했다. ‘오호’ 속으로 감탄한 니베르는 노련하게도 그 반짝임이 희망임을 눈치 챘다.
“그래. 뭐, 어떻게든 코레 발전소 까진 진입했는데 그 이후론 인명피해도 심하고, 영 힘들어서 말이야. 무법지대 쪽으로도 연락했어. 카르텔에 관련된 일이 아니니, 와줄지 아닐지는 모르지만”
“그렇군요”
말투로는 얼마든지 감출 수 있었지만, 역시 표정으로는 생각이 드러난다. 30대 중반인 니베르는 20대 초반인 제너럴의 그런 점을 참으로 ‘그 나이답다’고 느꼈다. 평소에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뭘 위해 사는지, 그저 사명감만으로 제 인생을 낭비하는 건 아닌지 궁금할 정도로 일밖에 모르는 그가, 겨우 여자 한명에 이렇게 반응하다니. 모쪼록 젊은 나이의 청춘남녀라면 그래야지. 그렇게 생각하는 중장은 희미한 기쁨으로 물든 제너럴의 얼굴을 모른 척 해줬다.
“뭐, 나야 든든한 지원군이 와주면 좋지. 비연이랑 콘도 믿음직하긴 하지만, 이 사태를 끝내기엔 더 큰 힘이 필요해”
“황도군 전체가 매달리는 일이니까요. 외부 도움도 충분히 필요하지요”
제너럴의 심정을 젤딘도 느낀 걸까, 그녀도 니베르의 말에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무법지대. 카르텔의 본거지가 있는 메마른 땅. 해상열차가 없으면 닿을 수도 없는 먼 곳. 옛날 같았으면 그저 야만의 땅이라고, 법도 없는 세계라고 경멸했을 곳. 하지만 그녀를 알게 된 이후, 제너럴은 그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설렜다.
“뭐, 오늘 회의는 이정도로 끝냅시다”
딱히 이야기를 나눈 것도 없었지만, 그렇다고 계속 할 이야기도 없었다. 제너럴은 보고받은 서류들을 챙기고 자리를 일어섰고, 젤딘은 자신을 기다리는 병사들에게로 돌아갔다. 니베르는 도로 파워스테이션으로 돌아가기 위한 채비를 위해 급히 나가려다가, 아직 막사를 나가지 않은 제너럴에게 물었다.
“아 맞아, 제너럴”
“네?”
“사실 이미 긍정적인 답변을 받았어, 로시스 양에게 말이야. 언제 온다는 말이 없어서 그렇게만 말한 거지”
‘그러니까 미리 짐을 싸놓으라고’ 놀리듯 웃으며 떠나는 니베르의 발걸음이 가벼웠다.
남의 연애가 저렇게 즐거울까. 아니, 연애라고 볼 수 없는 연심인데. 제너럴은 머릿속으로는 자신을 놀리는 그에게 잔소리를 퍼부었지만 정작 입으로는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
그녀랑 관련된 일이면 자신은 언제나 약해졌다. 어린 나이에 전장에 던져져, 수많은 죽음을 보고, 이제는 특수부대의 수장까지 된 그였지만. 그녀 앞에서 제너럴은 어린아이처럼 순진해지고, 바보처럼 어리석어졌다.
에소루엔 로시스. 다른 군 관계자들은 주로 ‘무법지대의 악몽’ 이나 ‘로시스 양’ 이라고 부르는 그녀. 자신은 언제나 ‘엔’이라고 부르는 그녀. 제 봄을 앗아간 여자. 그리고 제 봄 그 자체인 여자.
“정말로 오게 된다면, 좋을 텐데”
아무도 없는 회의실에서 중얼거린 소리는 봄바람처럼 따뜻했다.
그녀를 알게 된 이후로 제가 겪는 봄은 모두 따뜻하지 않았다. 제너럴은 제 봄을 빼앗긴 줄 알았지만, 사실 알고 보니 자신은 처음부터 봄을 겪어보지 못했던 것뿐이었다.
그리움은 겨울과 같았다. 멀리 떨어져 사는 그녀를 마지막으로 본 것은 분명 낙엽이 질 무렵이었는데, 언제 이만큼 시간이 흘러버린 걸까.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도, 그리워하는 것도 익숙한 그였지만 그 모든 것에 ‘사랑’이라는 굴레가 씌자 이야기는 달라졌다. 그 따뜻함, 그 사랑스러움. 찰나였지만 분명히 제 가슴에 왔던 봄은 메마른 가슴에 꽃을 피워주었다. 붉은색, 흰색, 노란색, 무지개마냥 색색의 꽃을 피우고 가버린 그녀는 지금 쯤 꽃이 피지 못하는 땅을 누비고 다니리라.
그는 제 마음에 핀 꽃을 잘 가꿀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리움과 외로움은 확실히 꽃들을 마르게 했지만 죽을 정도의 고통은 가져오지 못했다. 자랑은 아니지만 그 자신도 생활이 바빠 따스한 봄을 추억할 시간이 없기도 했고, 간간히 들려오는 그녀의 소식은 가뭄의 단비가 되어주었으니까.
‘또 카르텔 간부를 처리했데’ ‘역시 대단한 콤비네’ ‘무서운 사람들이야’
대부분은 저런 흉흉한 소문이었지만 그에게는 저런 것마저도 행복한 소식이었다. 무사히 잘 살아있구나, 그리고 그녀의 일이자 생활인 카르텔 소탕도 건재하구나. 카르텔 관계자들이나 일반 시민이라면 저 소문을 무서워 할 수도 있었지만, 황도군의 장군으로서, 그리고 누군가를 좋아하는 한 사람으로서는 저 소문이 기쁘지 않을 수 없었다.
“제너럴, 회의에서 좋은 소식이라도 있었습니까? 기분이 좋아보는걸요?”
에스메랄다는 서류를 받으러 왔다가 그의 안색을 보고 물었다.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평소와 똑같이 입만 웃고 있는 무뚝뚝한 얼굴이었는데, 지금은 온 몸에 봄꽃같이 화사한 기운이 감돌다니. 이런 경우는 보통 단순히 좋은 소식이 있는 경우가 아니었다. 오랫동안 그와 생활해 온 블랙로즈들은 알 수 있었다. 이 징조는, 분명.
“아 알겠다! 로시스 양 이야기가 나왔군요?!”
“로잔나, 그렇게 직구를 날리면…”
아무리 가까운 부하와 상사 관계라도 해도 조심해야 할 것은 있는 법. 그들에게는 루엔의 이야기가 그러했다. 제너럴이 좋아하는 여자, 정확하게는 ‘짝사랑 하는 여자’인 루엔은 황도군과는 관계가 없으면서도 인연이 있는 특이한 케이스였다. 언제나 데스페라도와 같이 황도군을 돕긴 하지만 그것뿐인 사람. 언제나 무법지대에서 행동하는 그녀를 가장 그리워하고 조심스러워 하는 건 분명 자신들의 대장일 것이었다.
그러니 자신들은 가볍게 그녀의 일을 거론해선 안 된다. 그걸 잘 알고 있을 로잔나가 저렇게 직설적인 질문을 던지다니. 에스메랄다는 조용히 주의를 주려고 했지만, 제너럴은 의외로 평온한 얼굴로 답해왔다.
“네, 뭐 맞습니다”
“역시 그렇구나~”
“무슨 이야기를 들었기에…”
정말 어지간히도 좋은 소식인가 보구나. 그녀는 그렇게 확신했고, 그 예측은 거의 맞아떨어졌다.
“니베르 중장이 말하길, 잘하면 이튼 공업지대의 작전에 올 지도 모른다고 하더군요”
“예? 그 발전소 탈환 말입니까?”
“네”
확실히 루엔이 황도군의 일에 간섭하게 된 것은 여러모로 좋은 일이었다. 하지만, 그 정도 일로 이렇게 기분이 좋아졌다는 건 뭔가 이상했다. 정확하게 황도, 아니면 겐트에 온다고 하는 거면 모를까. 이튼 공업지대면 분명 파워스테이션일 텐데, 어째서 제너럴이 그렇게 좋아하는 걸까.
설마, 안 좋은 예감에 그녀가 되물으려고 할 때. 제너럴이 먼저 입을 열었다.
“아, 참고로 저희도 작전에 참여할지 모릅니다”
“왜죠?”
“그거야 당연하지 않습니까, 안톤을 제거하기 위해서. 더 나아가 황도를 위해서죠. 니베르 말로는 손이 부족해 고생이라고 하는데 안 갈수가 있나요?”
“…그렇습니까”
겨우 카르텔도 잠잠해지고, 황녀님도 돌아와 일거리가 줄어드는 가 했더니. 분명 자신들은 특수부대니 필요하다면 달려갈 수밖에 없다지만, 이건 너무하지 않는가.
불평을 말하고 싶은 에스메랄다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로잔나는 또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잘됐네요! 저희가 가서 일이 빨리 끝난다면 그렇게 해야죠!”
“물론입니다. 어쨌든, 아직 결정 난 건 아무것도 없으니 돌아가서 각자의 일에 집중하세요”
“네!”
칼같이 경례한 두 사람은 서로 다른 표정으로 집무실을 나갔다.
후우. 부하들이 나가고 나자 겨우 조용해진 집무실에는 또 다시 외로움이 찾아왔다. 방금 전 까지는 마냥 좋아하고 있었지만, 정말 이걸로 괜찮을까. 귀가 허전하고 입이 움직이지 않게 되자 머리는 열심히 일을 시작했다. 상념과 걱정, 자신의 봄이자 꽃인 그녀에 관한 모든 것들.
루엔은 분명 강한 사람이었다. 그것에 대해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그녀를 좋아하던 싫어하던, 에소루엔 로시스가 실력으로서 무시당할 일은 절대 없었으며 있어서도 안 될 일이었다. 괜히 또 다른 이름이 ‘무법지대의 악몽’이겠는가,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사람 사이에서 일이었다. 지금 자신들의 상대는 사람이 아닌 다른 차원의 사도였다.
만날 수 있는 것은 기쁘지만, 역시 위험한 일에 휘말리는 것은 마음이 아프다.
아무 일도 없을 것이란 장담은 그 누구도 할 수 없다. 자신도, 그녀도, 그 누구도 다치지 않을 거라곤 할 수 없다. 이것이 제 기우라면 얼마나 기쁠까. 하지만 그는 이제까지 발전소에서 실종된 사람의 수와 사상자의 수를 알고 있었다.
카르텔과의 전쟁 때 만큼, 아니 어쩌면 그것보다 더 많은 희생이 일어난 이상 그녀도 안전하다고는 할 수 없었다.
‘…뭐, 걱정한다고 달라질 일이 아니니까’
우선은 그녀가 오기 전까지, 일이라도 다 처리해 두는 편이 좋겠지. 그래야 1시간이든 10분이든 여유가 생길 테고, 마중이라도 나갈 수 있을 테니까.
똑똑. 누군가가 책상을 두드리는 소리에 제너럴이 눈을 떴다. 눈부신 햇빛. ‘아아, 벌써 아침인가’ 자신을 깨운 사람을 확인하기도 전에 지금 시간부터 알아버린 그는 눈이 부셔 고개를 제대로 들 수 없었다. 분명 며칠 째 제대로 자지도 못하고 일을 한 대가를 치루 듯, 중간에 기절하듯 잠들어 버린 거겠지.
“일어났어? 너무 불편하게 자는 거 아냐?”
“아, 니베르 씨”
목소리만 들어도 누군지 알 수 있다. 아니, 이건 목소리 문제가 아니라 말투 문제일까. 여기서 자신에게 이렇게 말을 걸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굳이 있다면 바깥에서 찾아온 손님 중에서도, 자신과 계급이 비슷한 사람뿐이겠지. 그러니 고개는 들지 않아도 되었다. 여전히 고개 숙이고 있던 제너럴은 이마를 짚고 말을 이었다.
“요즘 자주 뵙는군요”
“자주는 무슨, 2주 만이라고? 좋은 소식이랑 같이 왔는데, 겨우 하는 소리가 이런 식이면 내가 섭섭하잖아?”
“무슨 소식인가요? 발전소 상황이 종료 된 거라면 좋겠습니다만”
평소보다 말투가 까칠한 건 분명 잠이 덜 깨어 기분이 좋지 않은 것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역시 이제까지 업무를 처리하느라 머리가 굳어버린 것이 더 큰 이유일 것이다. 니베르는 비슷한 처지로서 제너럴의 고충을 잘 이해할 수 있었다. 비록 낙하산이니 뭐니 말이 많은 자신이지만, 서류에 시달리는 것은 그와 똑같았으니까.
“그것 보다 더 좋은 소식인데?”
“더 좋은 소식이 있을 수 있습니까?”
“그래, 적어도 너에겐 말이지. 기억 안 나?”
무슨 소식이 있더라. 제너럴은 남아있는 잠결을 조금씩 떨쳐내며 기억을 되짚어 보았다.
애초에, 자신이 넉넉하게 해결해도 되는 일을 이리 급하게 처리하던 이유가 뭐였더라?
아. 겨우 하나의 자문(自問)만으로 잊고 있었던 사실은 수면 위로 떠올랐다.
“엔?”
“그래. 내일 온다고 확답을 받았어”
“내일이라고요?!”
“으악, 깜짝아! 그래. 내일. 왜?”
“그런 건 빨리 말씀해 주셔야 할 것 아닙니까?”
물론 그에게 당장 급할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 고생을 해가며 일을 한 것은 언제라도 루엔이 왔을 때를 대비하기 위한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래도 뭐든 여유를 가질 시간이라는 것이 필요하지 않은가. 이렇게 갑자기 찾아온다고 하면, 아무준비도 안 하고 있던 자신은…
“뭐 어때? 이제까지 일한 걸 봐선 딱히 바쁠 것도 없어 보이는데”
“그래도… 그, 마음의 준비라던가”
“나 참. 청혼이라도 하러 가? 그냥 마중 나가면 되는 거 아냐?”
아니다. 절대 그렇지 않다. 전면적으로 부정하려던 제너럴은 그냥 입을 꾹 다물 수밖에 없었다. 시간이 흐르면 당연하다는 듯 봄이 찾아오는 사람에게, 누군가가 없으면 절대로 봄이 찾아오지 않는 자신의 사정을 이해 할 수 있을 리 없으니까.
자신에게는 얼어붙은 땅이 녹을 시간이 필요했다. 싹이 트고, 꽃이 필 시간 말이다.
“…후우. 몇 시쯤 온다고 했습니까?”
“오후 2시에 도착하는 열차를 타고 온다던가? 너무 늦진 않을 거야”
“감사합니다. 내일 오후 2시. 기억해 놓겠습니다”
“그래, 그래. 고마우면 나중에 식사라도 대접해라고”
다급해진 제 맘을 조금도 모르는 니베르는 여유롭게 집무실을 나가버렸다.
내일 두시. 그러니까, 24시간하고 조금 더 남았나. 갑자기 시간이 정해지긴 했지만, 지금부터라도 준비하면 늦지 않겠지.
하지만, 의외의 문제는 다른 곳에서 찾아왔다.
“…그러고 보니”
뭘 준비하면 되는 거지?
소풍을 처음 가는 어린애처럼, 마냥 들떠서 무엇부터 준비해야 하는지 모르겠는 이 기분. 제너럴은 갑자기 자신이 너무 초라하게 느껴졌다. 겨우 이게 무슨 대단한 일이라고. 아니, 자신에게 대단한 일이긴 했지만, 어쨌든 우왕좌왕 하는 이 꼴이 우스워서 그는 괜히 식은땀이 흘렀다.
“제너럴, 아침 회의…어라?”
올리비아는 곧 있을 회의를 위해 제너럴에게 서류를 전해주러 왔다가 감탄하고 말았다. ‘와, 장군님이 저런 표정을 짓는 날도 있구나’ 멍한 표정에 입만 살짝 웃고 있는 그는 흐르는 식은땀을 닦지도 않고 시선을 맞춰 줬다.
“아, 올리비아. 뭡니까?”
“아침 회의에 필요한 서류를… 그것보다 무슨 일이에요? 그, 아프신 거 아니죠?”
“아파보이나요, 저?”
어라. 보통 이런 상황에서는 아프던 아프지 않던 ‘저는 괜찮습니다’라는 대답이 튀어나왔을 텐데. 올리비아는 정말 평소와는 다른 제너럴의 상태에 식겁하고 그의 곁으로 갔다.
“어디 아프세요?! 그, 역시 무리해서 몸살이라도 나신 거죠?”
“아니. 그런 건 아니지만… 아파보이나요?”
“야, 약간 그렇습니다”
“어쩌지…”
세상에. 맙소사. 그 어떤 감탄사로도 이 상황을 표현할 수 없던 올리비아는 서류를 얌전히 책상 위에 두고 나가버렸다. 비상사태다. 뭔지 잘 모르겠지만 비상사태다. 회의장 대신 블랙로즈들의 숙소로 간 그녀는 다짜고짜 동료들에게 말했다.
“제너럴이 이상해”
“응?”
“갑자기 무슨 소리야?”
“제너럴이 이상하다고! 어딘가 멍해 보이는 게, 혼이 빠진 사람 같은 게…”
“흐음”
올리비아의 말을 듣고 있던 동료들 중 제일 먼저 사태를 파악한 것은 아누시카였다.
“루엔 양이 결국 오나 보군”
“아, 전에 그거 말인가?”
“그래. 그렇게 까지 멍해지신 걸 보면 오늘이나 내일 중으로 오겠지”
마치 탐정 같은 그녀의 말투에 동료들은 감탄 할 수밖에 없었다. 제너럴과 가장 가까이 있다고 해도 눈치가 빠른 정도는 조금씩 다른 걸까. 가장 먼저 사태를 알아챈 아누시카의 말에 로잔나는 지금 쯤 멍하니 서류만 쥐고 있을 제너럴을 생각하며 웃었다.
“뭐, 자세한 건 오늘 회의를 들으면 알 수 있지 않을까? 우리가 뭔가 도와주자고”
“상사의 연애에 개입하는 건 좋지 않겠지만… 그렇게 얼빠진 채 두는 건 더 도리가 아니니까. 찬성이야”
네 여자는 서로를 보며 무언의 각오를 다졌다. 일단 상사이긴 하지만 어린 그에겐, 연애 경험도 없는 제 상사에겐 누구든 서포트를 해줘야 한다. 정작 본인이 알면 ‘그게 뭐하는 겁니까’ 라며 질색할 게 뻔했지만, 블랙로즈 대원들은 이걸 두고 볼 수 없었다.
머리를 모은 네 사람 중 가장 먼저 이야기를 꺼낸 것은 역시 아누시카였다.
“좋았어, 그럼 이렇게 하자고”
하루가 이렇게 짧다고 느껴졌던 적이 있었나. 제너럴은 그다지 바쁘지도 않은 오늘이 너무나도 빨리 지나가는 것 같아 괜히 초조해 졌다. 24시간 남았네, 22시간 남았네, 아 이제 20시간 남았나. 모든 기준이 다 내일 2시로 맞춰진 그는 조금씩 가까워지는 만남의 시간에 그답지 않게 바짝 긴장한 상태로 생활했고, 결국 밤쯤 되어서는 완전히 녹초가 되고 말았다.
“제너럴, 잠깐 괜찮습니까?”
아, 이번엔 또 무슨 일인가. 책상위에 엎어져있던 그는 반사적으로 허리를 들었다. 그래, 차라리 일이라도 하고 있으면 다른 생각을 안 해도 되니까 이게 더 났지. 최대한 긍정적이게 마음먹기로 한 그는 자신을 찾아온 에스메랄다에게 웃어보였다.
“네, 무슨 일인가요?”
“슬슬 주무시는 게 어떨까 해서 왔는데…”
“…네?”
“내일 중요한 약속이 있잖아요, 얼른 자야죠?”
설마, 내일 루엔이 온다고 이렇게 해 주는 건가. 제너럴은 부하의 배려에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물론 기쁘긴 하지만, 그래도 이렇게 잔업도 하지 않고 일찍 자도 되는 걸까. 중요한 일은, 남아있지 않았어도…
“아, 으음. 그럼 이 일만 마무리 하고…”
“안 됩니다! 얼른 주무셔야죠!”
“에스메랄다?”
마치 제 상관이 이렇게 말할 줄 알고 있었다는 듯 그녀는 재빨리 책상 위의 서류를 치워버렸다. ‘이게 무슨…’ 제너럴의 얼빠진 소리가 나오기 무섭게 그를 일으켜 세운 에스메랄다는 밖에 있는 동료들을 불렀다.
“아누시카, 제너럴을 방으로!”
“라져”
“올리비아! 나랑 남아서 이 일을 처리한다!”
“좋았어~”
평소 전장에서 작전을 수행하는 것 마냥 체계적으로 움직이는 블랙로즈 대원들은 그를 재우기 위해서라면 마취총이라도 쏠 기세로 눈을 빛내고 있었다. 아누시카의 손에 끌려가는 제너럴은 그녀들이 새삼 무섭다는 생각까지 들었지만, 자신을 위해 이렇게 까지 나서준다는 점은 조금 고맙기도 했다.
“제너럴. 다른 생각 마시고 제발 푹 주무시길. 루엔 양 앞에 그렇게 피곤한 얼굴로 나타나면 루엔 양도 속상해 할 겁니다”
“…그렇게 피곤해 보이나요?”
“눈 밑에 그늘이 멍처럼 보일 정도입니다”
그 정도란 말인가. 냉정한 평가에 입을 다문 제너럴은 결국 반 강제로 제 방에 쑤셔 넣어져 수면을 강요받았다. 어차피 피곤했으니 잘 된 일이지. 대충 옷을 갈아입고 누운 제너럴은 오랜만에 제 시간에 잠들 수 있었다.
하지만, 블랙로즈의 간섭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푹 자고 평소보다 일찍 일어난 제너럴은 시계를 확인하고 한숨을 쉬었다. 아침 6시. 그녀가 오기까진 6시간 밖에 안 남았다. 정시에 딱 맞춰서 가는 것은 아무래도 불안하고, 루프트 하펜까지 가는 시간을 고려하면 적어도 오후 1시에는 나가야 할 텐데.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세면 후 옷을 갈아입은 그는 집무실에 가는 도중, 생글생글 웃고 있는 로잔나와 마주쳤다.
“좋은 아침입니다! 제너럴”
“아, 로잔나. 좋은 아침입니다”
“잘 주무셨나 보네요! 얼굴이 한결 좋아요!”
“그거 다행이군요. 덕분입니다”
일상적인 인사 후, 집무실에 들어가려던 그는 자신을 막아서는 그림자에 중얼거리고 말았다. ‘역시, 여기서 끝날 리가 없지’ 자랑이라고 할지 험담이라고 할지 모르겠으나 제 부하들은 아주 끈기가 있고, 빈틈이 없는 여자들이었다.
“안 돼요! 아침부터 무슨 일이에요?”
“아니, 그래도 아침 회에 들어가기 전에 최소한…”
“회의 자료는 제가 드릴게요, 방에 가서 천천히 읽다가 회의 참여하신 후 바로 방에 가서 데이트 준비나 하세요!”
“데이트라니…”
그냥 마중을 나가는 것뿐인데. 아무리도 블랙로즈단 모두가 뭔가 대단한 착각을 하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그가 뭐라고 해명할 틈을 줄 만큼 그녀들은 녹록하지 않았다. 대뜸 서류를 그의 품에 안겨준 로잔나는 문에 딱 붙어서 돌아라다는 듯 고개를 저었고, 제너럴은 못 이기겠다는 듯 제 방으로 돌아가 서류를 읽을 수밖에 없었다.
침대에 드러누워 서류를 보게 되는 날도 오게 되다니. 부하들 덕에 편하게 회의준비를 하던 그는 문득 창밖을 바라보았다.
어제까지만 해도 휑하던 가지에, 샛노란 꽃이 피어있다.
창 너머로 보이는 풍경 중 가장 먼저 개나리꽃부터 눈에 들어온 그는 괜히 울컥하며 숨을 멈추었다. 정말로 봄이 왔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평소보다 여유로웠던 하루, 예정보다 일찍 부대를 나선 제너럴은 느긋하게 해상열차의 역에 도착할 수 있었다. ‘열차가 들어오려면 아직 30분이나 남았는데’ 베른은 불쑥 나타난 제너럴을 보고 적잖이 당황했지만, 그는 자신은 신경 쓰지 말라는 듯 손짓하고 곧바로 승강장으로 갔다.
해적에게서 열차를 탈환하고, 그 탈환한 열차로 무법지대로 가 카르텔을 소탕한 게 엊그제 일 같은데. 벌써 열차가 이렇게 자주 운영될 정도로 시간이 흘렀던가. 그는 계절이 멈춰있던 자신과 달리, 너무나도 빠르게 변한 세상이 놀랍기만 했다.
‘그래도 괜찮아’ 우두커니 서있던 그는 조금씩 12를 향해 달려가는 분침을 보며 마음을 다스렸다. 제 봄은, 지금 이리로 오고 있으니까. 늦게라도 겨울의 끝을 맞이할 테니까. 자신은 괜찮다. 아니, 오히려 행복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시기가 아니었다. 그는 그저, 제 봄이 언제가 되었든 제 곁에 와준다면 그걸로 행복했으니까.
2시가 되기 5분 전, 멀리서 조금씩 다가오는 열차에 그는 괜히 가슴이 두근거렸다. 아직 얼굴을 본 것도 아닌데, 이렇게 심장이 빨리 뛰다니. 애써 보지 않기 위해 고개를 숙여 봐도 점점 가까워지는 열차소리는 도저히 모를 척 할 수도 없었다.
시끄러운 소음이 멈추고, ‘열차가 정차했습니다’라는 안내음성이 흘러나왔다. 그제야 진정하고 고개를 든 제너럴은 내리는 승객들을 빠르게 훑어보았다. 낮선 얼굴, 익숙한 제복들, 이런 저런 사람들이 쏟아져 내리는 플랫폼. 그 수많은 사람들 중, 루엔을 찾아내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아”
긴 생머리, 언제나 입고 다니는 그 회색 코트. 건강해 보이는 얼굴에 안심한 제너럴은 슬쩍 손을 들어 제 존재감을 발산했다. 이렇게 북적북적한데 겨우 손을 든 정도로 눈에 띌까. 놀랍게도 제너럴은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녀는, 언제나.
“아, 제너럴!”
자신을 알아보고 찾아와 주었으니까.
제 뒤를 따라 내리는 데스페라도도 두고, 인파를 헤치며 제너럴에게 달려온 그녀는 덥석 그를 안고 까르르 웃었다.
“오랜만이에요! 마중 나와 준 거예요?”
“네. 당연히 마중나와야죠”
어렵사리 찾아온 봄인데, 어떻게 제가 가만히 있을 수 있단 말인가. 그는 제 허리를 꼭 안고 있는 루엔의 어깨를 끌어안으며, 따뜻해지는 제 몸에 환희했다.
이제야 겨우. 겨우 제 봄이 왔다.
그제야 그의 얼굴에도 봄꽃과 같은 웃음이 활짝 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