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림 인외합작 / 두 번째 파우스트
※ 제너럴 드림, 오리주 주의. 인간X악마 AU
※ 합작 홈 주소 → http://moonmist.wixsite.com/notningen
두 번째 파우스트
written by Esoruen
그런 생각이라면 모험을 해볼 만합니다. 계약을 합시다. 당신은 며칠 안에 기쁜 마음으로 내 재주를 보게 될 것이오. 어떤 인간도 아직 보지 못한 것을 당신에게 주겠소이다.
- 괴테, 파우스트 中
제너럴은 아무도 없는 성당에서 자꾸만 속삭이는 목소리를 듣게 되었다. 그것은 때로는 젊은 여성의 목소리처럼 들리기도 했고, 때로는 늙은 개가 숨 쉬는 소리같이 들리기도 했다. 종족과 성별, 나이를 초월한 지독한 속삭임. 그 목소리는 언제나 같은 내용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이봐, 이봐 부제님. 나랑 재밌는 내기를 해보지 않겠어?
이 성당에 있는 부제는 자신 뿐. 누구인지 몰라도, 자신을 부르는 것은 확실했다. 그는 처음에는 그 모든 것이 며칠 전부터 계속된 악몽의 연장선이거나 피곤해서 들리는 환청이라고 생각했지만, 그의 안쓰러운 도피는 속삭임이 계속 된지 일주일 만에 깨지고 말았다.
내일 아침의 미사 준비를 미리 마치고 제 방으로 돌아온 제너럴은 자신의 침대 위에 앉아있는 검은 그림자에 소리를 지를 뻔 했다. 분명 문을 잠가놓고 갔는데, 누가 들어온 걸까. 그것보다, 어떻게 들어왔단 말인가.
“누구십니까?”
만약 아는 사람이 아니라면 어떻게 할까. 자신을 해하러 온 존재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 강도, 이단자, 부제인 그에게 적이라 함은 그런 것들뿐이라 생각했지만 제너럴은 아직 모르고 있었다. 세상에는 자신이 모르는 깊은 어둠이 있는 법이었고, 그 어둠은 허름한 성당이 내뿜는 빛으론 사라지게 할 수 없다는 것을 말이다.
“누구십니까, 라니! 이제까지 계속 내 목소리를 들었을 텐데 이제 와서 모른 척 하는 건가요? 부제님”
킥킥. 많이 들어본 음침한 목소리가 초라한 방을 가득 메웠다.
침대 위에 앉아있는 것은 10대 후반쯤으로 보이는 젊은 여성이었다. 흰 피부, 허리까지 내려오는 검은 머리카락, 그리고 어둠 속에서도 자수정마냥 빛나는 보라색 눈동자. 어떤 의미로든 도저히 인간의 형상이라곤 생각 할 수 없는 아름다운 여자는 이 성당에서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여성들의 복장을 입고 있었다.
“…저는 당신을 모릅니다. 이 성당 자매님이 아닌 것 같은데, 어디서 오셨습니까? 아니, 어떻게 들어온 겁니까?”
“자매님이라, 나는 그 이름이 싫어. 애초에 수녀도 아니지만 말이지. 후후후”
“그러면 그 옷은 좀 어떻게 해 줄 수 없습니까? 아무나 입을 수 있는 옷은 아니니까요”
‘어머, 매정해라’ 속삭이는 목소리가 킥킥 웃었다. 여자는 침대에서 일어서서 천천히 그에게 다가왔다. 한 걸음, 두 걸음, 분명 제게 다가오는 것이 보이는데도 발소리는 나지 않는다. 제너럴은 등골이 오싹해져 뒤로 물러서고 말았지만, 애석하게도 상대의 움직임이 더 빨랐다.
“어딜 가요, 부제님?”
제 코앞에 들이밀어진 얼굴이, 일순 일그러진 것처럼 보였다. 느리게 눈을 감았다 뜨자 기묘한 환상은 사라졌지만, 공포는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이 여자, 사람이 아니다.
성직자로서 미신에 관해 이야기 하고 싶진 않았지만, 그는 제 눈앞의 존재가 인간이 아니라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 고운 흑발과 같은 색의 날개, 이마 위로 살짝 솟은 붉은 뿔. 그건 분명 자신들이 두려워하며 배척해오는, 제 주인의 숙적의 모습이었다.
“당신, 뭡니까?”
최대한 태연한 척을 하려고 해도 이미 목소리에서부터 동요하고 있는 것이 드러난다. 아아, 자신이란 얼마나 덕이 부족한 존재란 말인가. 겨우. 겨우 악마 하나에 벌벌 떨어서야 어떻게 신의 말을 따르는 자라고 할 수 있단 말인가.
“뭐일 것 같아요? 맞춰 봐요”
“왜 여기 온 겁니까? 뭐가 목적입니까?”
“질문에 질문으로 답하지 마요, 인간들은 옛날부터 예의가 없어”
‘옛날부터’ 저 말이 그렇게 거슬린다고 하면 이상한 걸까. 새삼 제 눈앞의 여자가 인간이 아님을 실감한 그의 손이 식은땀으로 젖어갔다. 그래, 신이 존재한 역사만큼 그림자인 악도 오래 존재했으니 자신들에게 함부로 ‘옛날부터’ 따위의 말을 할 수 있는 거겠지. 제너럴은 등 뒤로 손을 뻗어 문고리를 잡았지만, 그의 의도는 이미 다 까발려진 후였다.
“문, 안 열릴 걸요?”
덜컥. 덜컥.
열리지 않는 문고리의 소리가 이렇게 무섭게 느껴진 적이 있던가. 그는 문고리를 놓지도 못하고 어색한 자세로 악마를 노려보았다. 도대체 제게 원하는 것이 무엇이기에, 이런 곤란한 상황을 만든단 말인가. 이 성당에는 자신 말고도 수많은 성직자가 있었다. 남자보다 저항이 약할 수녀부터, 늙은 신부, 그리고 어린 수도사도 있을 텐데. 어째서, 자신에게 이러고 있단 말인가.
“목적이 뭡니까?”
“계속 말했잖아요. 다 까먹었어요? 아니면 지금 이 상황에서도 이제까지 그 환청들이 다 거짓말이었다고 생각하는 건가?”
그러고 보니, 분명 환청은 그렇게 말했지. ‘내기를 하자’고.
무슨 내기를 하자는 건지도 말하지 않고, 그저 내기만 하자고 조른 건 제가 아무 답도 하지 않았기 때문일까. 그는 문득 예전에 읽은 고전이 떠올랐다.
이 여자가 메피스토일리는 없다.
그런 대단한 악마가 자신을 찾아올 리도 없고, 애초에 메피스토는 이런 생김새가 아니었다. 악마에게 모습을 바꾸는 것 따위 아무리 쉬운 일이라 해도, 자신을 위협하러 온 이상 이런 아름다운 모습으로 올 필요가 있겠는가.
“…내기, 를 하자고 했던가요?”
“그랬죠!”
“무슨 내기를 하자는 겁니까? 파우스트처럼 저를 타락시키기라도 할 생각입니까? 그렇다면 상대를 잘못 찾아왔습니다. 저는 그런 내기라면 참여할 생각이 없고, 저보다 더 덕이 높은 분과 내기하는 편이 재밌을 테니까요”
저게 방금까지 겁에 질렸던 사람이 할 수 있는 대답일까. 지나치게 냉정하고 자세한 반박에 악마는 놀란 듯 입을 가렸다가, 깔깔 웃어버렸다. 비웃는 걸까. 그렇다고 하기엔 진심으로 신나보여서 제너럴은 속단할 수도 없었다.
“그래요! 이런 면이 좋아서 내기하자는 건데, 아아, 귀여워. 나는 이렇게 진지하고 성실한 사람이 너무 좋아”
“악마에게 칭찬을 들어도 그다지 기쁘진 않군요”
“완고하기는, 뭐. 그런 점이 더 좋지만”
성직자라면 모두 자신 같다고 생각했는데, 이 악마에게는 자신만 그렇게 보인 걸까. 올곧고, 성실하고, 완고하다. 누가 봐도 성직자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을 법한 속성이고, 실제로도 그러한데. 어째서 제게만 이런 소릴 하는 걸까.
“내기는 간단해요, 딱 한 달만 시간을 줘요. 당신이 그 사제복을 벗게 만들어 보일 테니까”
“매우 추상적인 조건이군요. 정확하게 명시해 주시지요. 악마의 특징입니까, 이것도?”
“어라, 들켰다”
놀란 척 하는 얼굴은 아름답지만, 어째서인지 전혀 두근거리진 않는다. 그래, 아마 적어도 악마가 아니었다면 진심으로 아름답다곤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는데. 제너럴은 마치 본능처럼 눈앞의 여자를 무서워했고, 경멸했으며, 혐오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래, 당신들이 흔히 말하는 이단을 믿게 해줄게요. 인간들은 이걸 타락이라고 한다지? 하지만 내가 당신에게 하려는 건 그런 단순한 게 아니야. 좀 더 거부할 수 없고, 질이 나쁜 것이지”
“재미있군요. 굳이 그런 걸 말해주시는 이유는?”
“이길 자신이 있으니까”
참으로 대단한 이유다. 제너럴은 그 공포 속에서도 헛웃음을 짓고 말았다. 몇 백을 살아온 저것의 눈에는, 자신의 신앙이 우스울 뿐일까. 아니면, 그저 자신을 우습게 보는 걸까. 어느 쪽이던 제너럴은 오기가 생겼다. 그는 제가 겨우 이런 시골의 부제일지라도, 제 신앙을 얕볼 수 있는 건 신 이외에는 아무도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한 달이라고 했습니까?”
“네~ 부제님”
“좋습니다. 대신 제가 이긴다면 다시는 이 마을 근처는 얼씬도 하지 마십시오. 아니, 이왕이면 이런 내기 같은 걸 그만둬 줬으면 좋겠군요”
“뭐, 그거야 어렵지 않죠! 어차피 부제님 아니면, 이런 내기 같은 거 안 할 거니까!”
그게 무슨 뜻인지 알았다면, 자신은 이런 내기를 하지 않았을 텐데. 제너럴은 이 악마의 속셈도 모르고 기세 좋게 그 내기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며칠이나 흘렀을까.
처음부터 이 성당의 수녀인 양, 자연스럽게 그의 옆에 녹아든 악마는 자신을 루엔이라고 칭했다. 아마 그녀의, 아니 악마의 본명은 저게 아닐 테지만 마땅히 부를 이름도 없으니 어쩌겠는가. 그는 제 옆의 악마를 그녀가 말한 이름으로 불렀다.
“루엔, 거기 앉아있지만 말고 일을 도와줬으면 합니다만”
“에에, 싫은데”
실제로 수녀라면 절대 쓰지 않을 법한 말투와 억양. 누가 봐도 악마 같은데, 어째서 성당의 모두는 속아 넘어가는 걸까. 제너럴은 그 모든 게 이 악마의 능력인지, 아니면 자신만이 그녀의 정체를 알기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애초에 난 수녀도 아니고, 그런 건 만지기 싫어요”
“과연, 악마는 악마군요”
“딱히? 만지기 싫은 거지, 불가능 한 게 아니라고요”
휙. 그가 들고 가는 성경을 낚아채 던져버린 그녀는 자신을 향해 화내려는 제너럴의 입에 쑥, 제 검지를 밀어 넣었다. ‘윽’ 짧은 감탄과 함께 붉게 물든 흰 얼굴은 확실히 경멸로 가득 차있었지만, 새어나온 소리는 쾌락에 가까운 기쁨을 담고 있었다. 후후. 장난스럽게 웃은 그녀는 제 손가락을 씹지도 뱉지도 못하는 못된 이를 가볍게 훑고, 말캉한 혀를 꾹 눌렀다.
“지금 기분 좋았죠? 으응?”
“뭐 하는 겁니까, 정말”
평소라면 더 큰 소리로 화를 냈을 텐데, 어째서 자신은 겨우 이정도 호통밖에 칠 수 없단 말인가. 마치 이 악마가 제게 저주라도 건 것 같다, 그렇게 생각하는 건 순전히 제 망상일까. 그는 불에 덴 것 마냥 화끈거리는 혀와 목구멍이 무섭고 미웠다. 분명 불쾌해야 할 일인데, 그 욱신거림이, 심장이 입 안에 있는 것 같이 두근거림이 멈추지 않는 제 혀와 잇몸과 목이 거부할 수 없을 정도로 간질간질 기분이 좋아서…
“아하하, 얼굴이 빨갛게 변했어요, 부제님”
“당신이 숨 막히게 했으니까…”
“어머? 전 아무 짓도 안 했어요. 그냥 손가락만 집어넣었지”
저 말은 정말일까. 아니다, 어찌 악마의 말을 믿는단 말인가. 하지만 책에서 본 바에 의하면, 모든 악마들은 거짓말을 하지는 않는다고 했다. 진실을 곡해하여 사실이 무엇인지 알 수 없게 대답하거나, 애매모호한 언동을 할 뿐이지.
그렇다면, 정말 자신은. 자신의 의지대로, 혹은 몸의 솔직한 반응으로 그녀에게 흥분한 것이란 말인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렇게 생각했지만 제 목구멍은 아직도 터질 듯 부풀어 올라 두근거리고 있었다. 분명, 며칠 전까지는 무슨 짓을 해도 그저 무섭고 혐오스러웠는데. 어째서.
“부제님, 부제님은 그런 말을 아시나요?”
아까 제 손으로 집어던진 성경을 주워온 루엔은 그것을 도로 그의 품에 안겨주며 웃었다.
“무슨 말 말입니까?”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
“…그 정도는 압니다”
“그거 다행이네요, 그럼 그 반대도 성립한다는 건, 잘 알겠죠?”
“몸이 가까워지면 마음도 가까워진다, 이겁니까?”
“물론이죠!”
지나친 흑백논리다. 제너럴은 그녀의 말을 감히 그리 평가했다. 이 세상이란 그리 간단치 않아서, 가까이 있을수록 틀어지는 사이도 있으며 멀리 있어도 변하지 않는 사이도 있었다. 뭐든 저리 간단히 표현할 수는 없는 법. 그건 저들, 악마가 더 잘 알 텐데.
“그러니까, 나 같은 미녀가 가까이 있으면 성자 성부 성령마저도 빠져들 수밖에 없다고 할까~ 뭐, 그런 거죠. 지극히 당연한 거니까 내가 무슨 이상한 수를 쓰는 건 아닌지 걱정하진 말라고요. 후후”
“그거, 신성모독입니다”
“자꾸 잊어버리지 마요. 난 악마야”
신성 같은 건 내게 지나가는 길에 있는 돌멩이보다 의미 없는 거예요. 그녀의 속삭임에, 또 목이 욱신거렸다. 아니, 이번에 욱신거린 건 목이 아니었다. 목보다 아래, 그리고 더 깊은 곳.
가슴 위에 손을 얹은 그는 목에 걸고 있는 십자가를 꽉 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