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D/Dungeon & Fighter

시 드림 합작 / 청혼

Esoruen 2017. 3. 21. 00:29


※ 데스페라도 드림. 오리주 주의. 주제로 고른 시는 '진은영 / 청혼'

※ 합작 홈 주소 → https://rien96.wixsite.com/poemdream




청혼

writtern by Esoruen




창밖에는 겨울비가 내리고 있었다.

별 일이 다 있군.’ 데스페라도는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곧 봄이 올 거라곤 해도 아직 제법 추운데, 눈이 아니라 비가 오다니. 참으로 별로였다. 니코틴 생각이 절로 났다.

비는 여러모로 좋아할 수가 없다. 화약을 젖게 만들고 쓸데없이 발소리를 크게 만드니 무법자로서 어떻게 좋아할 수가 있나. 게다가 제 연인은 추위에 취약했다. 그냥 비라도 걱정되는데, 겨울비라면 걱정을 안 할 수가 없지.

 

루엔. 오늘은 집에 있을까?”

 

어차피 두 사람에게 외출의 목적은 두 가지 뿐이었다. 카르텔의 정보를 얻거나, 카르텔을 소탕하러 가거나. 삭막할 정도로 간단한 용무들 뿐. 하지만 두 사람은 그게 딱히 나쁘단 생각은 하지 않았다. 물론 저런 의도 외의, 그러니까, 의식주에 관한 외출도 없지는 않았지만. 그런 건 미룰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니 물어볼 필요가 없었지. 그러니 자연스럽게 이야기는 늘 살상의 목적에 관한 것으로 돌아 갈 수밖에 없었다.

 

루엔?”

 

두 번이나 불렀는데 대답이 없다. 이건 별로 좋지 않다. 데스페라도는 습관적으로 담배를 꺼내 물었다가 라이터를 도로 내려놓아야 했다. 무법지대의 악몽. 그런 별명까지 가진 그녀니 집 안에서 갑자기 습격당해 죽었을 리는 없지만, 이렇게 조용하면 누구든 이상하게 여기지 않겠는가.

조용히 루엔의 방으로 들어간 그는 곧바로 안심했다. 제 연인은 무사했다. 비록 방의 상태는 무사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아침부터 뭘 하나 했더니.”

 

조금 있으면 거처를 옮길 시기긴 하지만, 대뜸 짐 정리를 하고 있었을 줄이야. 바닥 가득 어질러진 짐들과 침대에 기대어 잠든 루엔을 보며 데스페라도는 한탄했다. 좁은 방이긴 하지만 바닥 가득 물건이 늘어놓아져 있다니, 무슨 짐이 이렇게 많은 걸까. 제대로 된 거처도 없는 떠돌이 인생인데. 이렇게 짐을 많이 가질 수 있다는 게 신기할 지경이었다. 루엔을 깨우기 위해 다가가던 데스페라도는 문득 제 발치에 놓인 쇳덩이에 눈길을 빼앗겼다. 분명 저건, 제가 옛날에 준.

 

아직 가지고 있었던 건가.’

 

별난 녀석이다. 몇 년을 함께 했다지만, 제 연인은 알면 알수록 별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는 여자였다. 그는 지난겨울 그녀에게 주었던 제 라이터를 집어 여기저기를 살펴보았다. 여기저기 흠집이 난 라이터는, 얼룩하나 없이 차가운 광택을 내뿜고 있었다.

그거 가지고 싶어.’ 언젠가 제게 새 라이터를 선물하면서 그녀가 받아갔던 이 낡은 라이터는 제가 가지고 있던 물건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 중 하나였다. 아마 그때 라이터를 선물 받지 않았다면, 자신은 여전히 이걸로 불을 붙이고 있었겠지. 어림짐작이긴 하지만 그녀가 이걸 달라고 했던 이유도 짐작이 간다. 자신과 오랜 시간을 보낸 물건이니, 가능하다면 꼭 가지고 싶었던 거겠지.

 

루엔. 일어나.”

 

자는 걸 깨우고 싶진 않지만 이대로라면 감기에 걸릴 것이다. 그녀가 놀라지 않게 가볍게 어깨를 흔든 데스페라도는 비몽사몽 눈을 뜨는 연인의 얼굴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좋은 꿈이라도 꾼 걸까. 표정은 나쁘지 않았다.

 

, 지금 몇 시야?”

아침 7시 조금 지났던가.”

얼마 안 잤네, 다행인가.”

 

처음 일어났을 때가 분명 6시 조금 전이었으니, 기껏 해봐야 한 시간 정도 더 잔건가. 아니다, 이렇게 어질러 놓고 잠든 거니 한 시간은 채우지 못했을 수도 있지. 어찌 되었든 더 자는 편이 좋을 거라는 건 확실해 보였다.

 

졸리면 더 자, 뭐하고 있던 거야?”

아아, 뭐 좀 찾느라. 짐 정리도 할 겸.”

찾는 거?”

. 뭐 찾았으니 이제 정리만 하면 되는데.”

 

본인도 심하게 어지럽혀놨다는 것 정도는 아는 걸까. 루엔은 말을 잇다 말고 어색하게 웃었다. 미워 할 수 없는 미소. 데스페라도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이고 아까 주웠던 라이터를 그녀 손에 넘겼다.

 

잃어버리고 찾지 말고, 잘 챙겨 둬.”

? , 아아. 이거!”

 

제비꽃 색 눈동자에 라이터의 모습이 비추어지자 졸음에 취해있던 얼굴 가득 생기가 돌았다. 기쁜 얼굴로 라이터를 챙겨 넣은 루엔은 일어나 마른 얼굴을 쓸었다. 후우. 숨소리에 섞인 한숨엔 옅은 피로가 섞여있었다.

 

고마워. 아까 가방에서 꺼내놓고 다시 안 집어넣을 뻔 했네. 찾는 물건에만 관심이 쏠려서 그만.”

어지간히도 급했나 봐? 그나저나, 계속 가지고 있을 줄은 몰랐네.”

이거? 내가 버릴 리가 있어? 내가 달라고 해서 받은 걸 휙 버릴 사람으로 보여?”

그건 아니다만. 낡았잖아, 그거.”

오래 되어서 좋은 것도 있는 법이잖아?”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눈이 자신을 향한다. 장난스러운 눈길, 따뜻한 미소. 몇 년을 봐와도 좋은 얼굴이다. 데스페라도는 저 말에 긍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곳에서 태어나 살아왔기 때문일까. 아니면 제 생에는 절대 찾아오지 않을 것 같은 사랑이었기에 그런 걸까. 그에게 있어 루엔은 함께 한 시간이 길어질수록 더 사랑스러워지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건 루엔 또한 마찬가지. 질리지도 않는지 매년 어쩜 이렇게 잘생겼을까?’ 같은 말을 중얼거리는 그녀는 지치지도 않고 자신을 사랑해 주었다. 권태기도 오지 않는 사랑은 놀랍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납득이 가기도 한다. 이 세상에서 자신을 가장 잘 아는 상대가 자신의 편으로 함께 살아가 주는데, 어떻게 마음이 식겠는가.

 

새삼스럽지만.”

 

슬쩍 입을 연 그는 연인의 얼굴을 가볍게 양 손으로 감싸 쥐었다. 따뜻함이 손바닥 가득 차오르는 느낌은 행복하다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지. 자꾸만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겨우 끌어내리며, 데스페라도가 이마를 마주했다.

 

너를 만나서 다행이야.”

뭐야, 갑자기. , 나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지만.”

 

쑥스러운 걸까. 그녀는 소리 죽여 웃었다. 거짓말이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대답. 그는 뺨을 몇 번이고 손가락으로 쓸어내며 연인의 체온을 두 손에 가득 담았다.

어쩌면 제 사랑은 단순히 인간이 인간을 사랑하는 것을 넘었을 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단순한 사랑이었다면 이런 복잡한 감정은 들지 않았겠지. 그는 제가 느끼는 이 안식과 행복함이 모두 그녀와 함께한 세월에서 왔다고 확신했다.

마치 태어나 자란 고향의 오래된 거리를 사랑하듯, 자신은 그녀를 사랑하고 있다.

살아갈 이유를 찾지 못해 미아가 되었던 때에 길을 인도해 준 그녀를, 서로에게 두려워하지도 아첨하지도 않아주었던 그녀를, 메마른 인생이라는 잔에 희로애락의 술을 잔뜩 부어준 그녀를.

 

오후에 비가 개면, 별을 보러가자.”

 

데스페라도의 속삭임은 청혼 마냥 간절했다.

 

, 둘이서 가자.”

 

루엔은 아직 개지도 않은 날씨가 무색하게도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