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D/JOJO's

렛츠 드림 합작 / 그림자 밟기

Esoruen 2016. 10. 12. 04:42


5부 전원 생존 AU, 나란챠 드림, 오리주 주의

※ 합작 홈 주소 → http://letsdream0322.tistory.com/17




림자 밟기

written by Esoruen

 

 

 

그림자밟기라는 놀이가 있다. 아주 옛날, 내가 학교를 다녔을 때 쯤 동내 아이들과 어울려 놀 때 자주 한 그 놀이의 규칙은 아주 간단했다. 술래는 가만히 자리에 서서 10까지 숫자를 세고, 나머지 아이들은 도망친다. 숫자를 다 센 술래는 도망가는 아이들의 그림자를 밟으러 뛰고, 도망가던 아이들은 잡힐 것 같으면 건물이나 벽의 그림자로 숨는. 지극히 단순하지만 끝없이 움직이는 놀이.

옛날부터 나는 그림자밟기의 술래가 되는 것이 너무 싫었다.

심리전이라는 것은 처음부터 내 체질이 아니었다. 내가 내 마음도 모를 때가 있는데, 남의 마음 같은 것을 어떻게 읽는단 말인가. 게다가 난 머리까지 나쁘니, 속임수를 써 그림자에 숨은 아이들을 밖으로 끄집어내는 일은 할 수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숨어있는 아이들이 나오길 기다리거나, 해가 밝게 비치는 곳에서 도망가는 아이들을 잡으러 가는 것 뿐. 그러니까 난 술래가 되는 것은, 정말로 질색이었다.

 

그런데 언제부턴지, 나는 또 술래가 되어있었다.

 

 

 

죠르노가 보스가 되고 몇 개월이나 흘렀을까. 트리슈는 자신의 인생을 살겠다며 독립했고, 우리들은 지금까지와는 다른 파시오네를 만들기 위해 바쁜 나날을 보냈다. 거북이 폴나레프는 여전히 그 거북이 스탠드의 방에서 지내고 있고, 마약팀은 푸고가 전부 괴멸 시키러 갔다. 부차라티는 죠르노의 일을 돕느라 정신이 없고, 미스타는 간부가 되고 나서도 어딜 그렇게 싸돌아다니는지 모습도 보기 힘들다. 아바키오는여전히 죠르노가 못마땅한지 간혹 툴툴거리지만, 멀쩡히 살아서 돌아다니니 잘 지낸다고 해도 되겠지?

, 결국 정리하자면 우리 중에서 요즘 가장 한가한 사람은 나라는 거지만.

 

나란챠, 또 다른 생각 하고 있어?”

 

톡톡. 잘 가다듬은 손톱이 테이블을 두드리는 소리. 하루에도 몇 번이나 듣는 그 소리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소리지만 가장 듣고 싶지 않은 소리기도 했다. 꼭 누가 만든 것 같이 예쁜 손가락이 내 코앞에서 움직이는 걸 보는 건 오직 나만 누릴 수 있는 특권이라 좋았지만, 저렇게 주목시켜 놓고 잔소리를 하니 마냥 좋아할 수가 있나.

 

, 아냐. 문제 답 생각하고 있었어!”

그렇게 어려운 게 아닌데?”

 

킥킥. 귓가에 간질거리는 웃음소리에서 좋은 향이 난다. 향수라도 뿌린 걸까? 아니, 생각해 보면 시레나의 몸에선 언제나 좋은 향이 났다. 미스타는 이걸 여자에게서만 나는 좋은 향이라고 표현했지만, 나는 잘 모르겠다. 다른 여자들에게도 이렇게 기분 좋은 향이 나는지 맡아본 적이 없으니까.

 

이건가?”

……

 

. 아닌가. 내가 답을 적자마자 시레나의 표정이 갑자기 어두워졌다. 아아. 차라리 푸고처럼 때려주기라도 하면 죄책감은 안 들 텐데! 나는 급하게 지우개로 적은 답을 지웠다.

매일 오후 2시부터 4시까지. 그 싸움이 끝난 이후, 나는 시레나에게 과외를 받고 있었다. 원래라면 학교를 다닐 거라고 다짐하긴 했지만, 내 나이에 초등학교에 들어가는 것은 절차가 복잡하고, 내가 갱에 범죄자라 더 어렵다나 뭐라나? 처음에는 그런 게 어디 있냐며 짜증을 부리기도 했지만 결국 예전과 똑같이 푸고와 시레나가 공부를 봐주는 것으로 나는 만족해야만 했다.

그런데 푸고는 최근까지 마약팀의 뒤처리를 하느라 내 공부를 봐 줄 수 없었다. 솔직히, 이건 엄청 기쁘다. 그 빌어먹을 푸고는 사람이 실수 할 수도 있지, 내가 틀리면 포크로 날 찍거나 책으로 내려치는 등 사람을 열 받게 해서 솔직히 선생 취급 하고 싶지도 않다. 애초에, 자긴 똑똑하기만 하지 나보다 연하인 주제에.

하지만 시레나와 공부하는 것은 정말 좋다. 상냥한 시레나는 언제나 내가 이해할 때 까지 한 문제 한 문제를 자세히 알려줬고, 내가 틀렸다고 날 때리거나 하지도 않았으니까.

하지만 역시, 저렇게 시무룩해진 시레나를 보면 차라리 내가 맞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때도 있다.

아무리 나라도 좋아하는 여자가 슬퍼하는 걸 보느니 내가 아픈 게 낫다고 생각하니까.

 

, 미안해 시레나

괜찮아. 외우기 힘들지? 오늘은 이쯤 할까? 내가 표라도 만들어줄게. 틈틈이 외워봐

 

. 역시 시레나는 천사가 분명해. 나는 혹시라도 시레나의 마음이 바뀔까봐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오늘은 아침부터 소동에 휘말려서 피곤했었는데. 탁자에 엎어진 나는 책과 필기구를 정리하는 손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여기저기 상처가 나있지만, 색만큼은 눈같이 흰 손. 공부하러 오기 싫을 때 마다 저 손을 떠올리면 나는 레스토랑까지 한걸음에 달려갈 수 있었다. 공부가 힘든 것도 다 참을 수 있었고, 푸고자식이 시비 거는 것도 다 참을 수 있었다.

 

? 뭘 그렇게 빤히 봐?”

? , 안 봤는데!”

그래? 배고픈 줄 알았는데

 

사실 배도 조금 고팠지만. 내가 보고 있었던 건 그런 의미가 아닌데. 하긴, 시레나는 알 리가 없지. 내가 자길 좋아하는지 어떻게 알겠어. 시레나는 자신이 눈치가 빠르다고 하고 정말로 그렇다고 믿고 있는 것 같지만 정작 내 마음 같은 것은 하나도 몰라줬다. 딱히 숨긴 적도 없고, 그렇다고 표현한 적도 없긴 하지만. 그래도 저렇게 조금도 눈치 못 채는 건 너무하잖아?

아아, 어쩐지 혼자 이것저것 생각하니 짜증나는데

덜컥. 깨끗이 정리된 테이블 위에 엎어져 있던 나는 가게 문이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시레나~! 점심 먹을 수 있어?”

 

. 이 목소리는.

또 어딜 갔다 온 건지 여기저기 상처가 난 미스타는 싱글벙글 웃으며 내가 앉아있는 테이블에 와 앉았다. 이건 어디까지나 내 추측이지만, 또 죠르노의 명령에 일하러 갔다가 자기 총에 자기가 맞고 온 게 분명하다. , 가벼운 상처만 보이는걸 보면 죠르노에게 치료받고 오는 길이거나 총알에 스치기만 한 거 같지만.

 

어머, 어서 와. 미스타. 나란챠 공부 막 끝난 참이니까 돼. 기다려 줄래?”

좋았어~! , 나란챠 너 왜 이렇게 풀이 죽어있어!”

 

퍽퍽. 엎어져서 고개만 들고 있는 내 등을 무식하게 치는 손에는 엄청난 힘이 실려 있었다. 이 자식, 힘 조절도 모르냐고! 여기가 다른 식당이었으면 바로 일어서서 미스타의 얼굴에 한방 먹여줬겠지만, 시레나의 레스토랑에서 소란을 피워선 절대 좋을 게 없지. 나는 이를 꽉 물고 고개를 들었다.

 

으프즌으 음므

? 뭐라고?”

아프다고!! 아파! 아파! 아파! 아파!!”

!! 네 번 아프다고 하지 마!! 으아악!!”

 

어휴, 저 미친놈. 4 공포증은 언제쯤 고쳐지려나. 귀를 막고 미친 사람처럼 소리 지르던 미스타는 빨리 아프다고 한 번 더 말해라는 듯 간절하게 날 바라봤다. 나 참. 어쩔 수 없네.

 

아파

그래. 미안, 미안. 그런데 진짜 왜 그래? 또 쪽지시험 다 틀렸냐?”

아니거든?”

 

내가 문제 좀 틀리는 걸로 축 처질 리가 있냐. 일상인데. 가끔 보면 미스타 쪽이 나보다 더 바보 같다. 내가 고민 하는 건, 조금 더 심각하고 중요한 이유 때문인데.

잠깐, 그러고 보니 미스타는 여자랑 많이 얽히지 않나? 혹시 뭔가 도움을 되지 않으려나.

 

있잖아, 미스타

뭐야?”

마음에 드는 여자가 있는데, 어떻게 해야 이쪽으로 넘어올까?”

뭐야, 너도 사춘기냐! 푸하하하!”

웃지 마!! 이게 확!!”

 

사실 웃어도 상관없긴 하지만, 여기선 시레나가 들을 수도 있잖아! 깜짝 놀라 미스타의 입을 막은 나는 요리에 정신이 팔려 이쪽은 보지 않고 있는 시레나를 확인하고 나서야 손을 떼었다.

 

뭐야, 드디어 고백하는 거야? ? 위기감이라도 느낀 거야?”

? 드디어?”

너 시레나 좋아하잖아. 아냐?”

 

. 이 멍청이가 시레나가 들으면 어쩌려고! 시레나가 아무리 부엌에서 바쁘다고 해도. 이 쓸데없이 눈치만 빠른 4공포증 환자가!!

주먹이 나갈 뻔 했지만 나의 인내심은 위대했다. 숨을 몰아쉬고 겨우 어깨까지 올라온 주먹을 도로 내리고 나자, 어쩐지 가게 안이 너무 덥게 느껴졌다.

 

, 어떻게 알았어?”

척 보면 척이지. 그래서 고백할거야?”

그런 건 아니고그냥

 

그러고 보니 난 뭘 하고 싶은 걸까. 딱히 고백하고 싶은 것은 아닌데. 으음, 이럴 때는 역시 학교를 제대로 다니지 않을 것이 후회가 된다. 내가 조금만 더 똑똑하다면, 지금 내 마음에 대해서도 똑바로 말 할 수 있을 텐데. 셰익스피어 작품도 제대로 모르는 내게 감정을 언어로 표현하기란 보이지 않는 스탠드 유저를 상대하기보다 100배 쯤 어려운 일이었다.

 

, 흠흠. 어린애 취급 안 해줬으면 좋겠다고 할까. 조금은 날 의식해줬으면 좋겠어!”

한마디로, 남자로 보이고 싶다는 거 아냐? 솔직히 시레나는 어른이고 넌 아직 애니까

너도 아직 성인 아니거든?! 으윽. 하지만 맞아네 말 다 맞아

 

시레나와 나의 나이 차이는 4살차이. 그것도 시레나가 4살 연상. 나는 아직 17살이지만, 시레나는 벌써 21. 사실 4살 차이라는 것은 그렇게 큰 나이차가 아니었지만, 성인과 미성년자의 차이는 의외로 컸다.

그러니까, 예를 들어서 부차라티랑 아바키오가 시레나와 함께 술을 마실 때, 나는 오렌지 주스나 마셔야 한다는 건 굉장히 불공평하고 거리감이 느껴지지 않는가.

어른과 아이의 차이란 그런 것이라고 생각했다.

 

으음, 우선 나란챠의 경우라면 강하게 나가는 게 좋지 않을까?”

강하게? , 스탠드 대결이라도 하라는 거야?”

그럴 리가 있냐! 왜 있잖아? 영화 같은데서 나오는 거. 막 갑자기 여자 허리 끌어안거나 키스하거나 그런 거!”

 

난 영화 같은 거 안 보는 거 알면서. 하지만 미스타가 말하는 게 뭔지는 안다. 그런 건 텔레비전에서도 간혹 봤으니까. 하지만, 내가 시레나에게 그런 일을 할 수 있을까? 시레나를 끌어안거나, 안겨본 적은 많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동료나 누나 동생으로서 한 스킨십이지, 로맨틱한 분위기는 아니었는데. 내가 용기를 내어서 허리를 끌어당겨도, 시레나는 그냥 내가 장난치는 줄 아는 건 아닐까.

 

, 하긴 너한테는 무리인가~ 애초에 너 연애는 해본거야?”

이게 날 또 무시하네? 내가 못할 게 뭐야!”

좋아. 내기하자. 일주일 안에 네가 시레나랑 키스하면 내가 저녁 풀코스로 쏜다!”

 

키스. 말만 들어도 얼굴이 빨개지는 저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다니. 분명 봄인데도 한여름 같은 더위가 느껴지는 것도 분명 지금 내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서 그렇겠지?

 

좋아! 돈이나 실컷 벌어 두라고!”

오냐~ 대신 실패하면 너도 뭔가 해야지?”

, 그래. 뭘 해줄까!”

 

, 지금 미스타 저 녀석 엄청 수상하게 웃었어. 무슨 꿍꿍이지. 난 스스로가 생각해도 머리는 나쁘지만 감은 좋다고 생각하니까 확신할 수 있다. 지금 저 녀석은, 내가 가장 곤란해 할 일을 생각하며 웃고 있는 게 분명하다.

 

푸고를 일주일간 형님이라고 부르기

미쳤냐?!”

? 자신 없으면 다른 걸로 하고~”

 

솔직히 지금 내가 자신만만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난 내가 못할 거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래, 그러니까 괜찮겠지. 저거? 아냐. 그래도 푸고를 형님이라고 부르는 조건이라니. 절대 실패하지 않을 거란 자신감은 없는데.

잠시 고민하던 나는 이죽이죽 웃는 미스타의 얼굴에 정신이 들었다. 그래, 나란챠 길가. 넌 할 수 있어! 이제까지 담가버린 적이 몇이나 있는데! 절대 저 뺀질뺀질한 녀석에 도발에 넘어 가는 게 아냐! 난 정말 할 수 있으니 하는 거야!

 

좋아! 그걸로 해!”

오케이~ 그럼 내일부터로 할까?”

됐어! 오늘부터야! 오늘부터 다음 주까지!”

 

호오. 내 단호한 결정이 놀라운지 미스타는 의외라는 듯 감탄했다. 거봐. 미스타 저거 완전 나를 물로 보고 있다니까. 어째 아까 부끄러워서 빨개진 얼굴이, 지금은 열 받아서 빨게 질 것 같은데.

 

두 사람,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재밌게 해?”

 

다행이 우리 대화는 조금도 못 들은 걸까. 부엌에서 고개만 삐죽 내민 시레나는 곧 큰 쟁반 가득 피자와 음료수를 들고 나타났다. 어쩐지 시간도 많이 걸리고 바빠 보이더라니, 마르게리타를 만든 거구나. 미스타가 왔다고 굳이 미스타가 좋아하는 걸 만들다니. 어쩐지 섭섭해 지는데, 이걸 알면 속 좁다고 생각할까.

 

고마워~ 시레나도 같이 먹을래?”

난 괜찮아. 둘이서 먹어. 다 큰 남자 둘이서 먹기엔 모자라려나?”

아냐, 걱정 마! 그렇지 나란챠~?”

? 으응!”

 

사실 모자라도 별로 상관없다. 난 시레나가 해주는 밥이 먹고 싶은 거지, 배를 채우고 싶은 건 아니었으니까. 애초에 여기엔 공부하러 온 거기도 했고.

 

많이 먹어 나란챠~ 공부하느라 수고 했어

 

내 앞에 놓인 오렌지 주스.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손. 오후의 창가에서나 볼 수 있을 것 같은 색으로 빛나는 눈부신 미소.

나를 향해 상냥하게 웃어주는 시레나에게선 여전히 좋은 향이 난다.

빵 냄새나 오렌지 주스의 향긋함과는 다른, 시레나만의 체향이.

 

내가 정말 할 수 있을까

 

저렇게 무방비하게 내 머리를 쓰다듬는 여자에게 키스하는 건 죄책감이 들 것 같은데. 스스로가 생각해도 어이없는 죄책감이 화가나, 나는 피자를 크게 한입 베어 물었다.

 

   

 

나는 평소에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그렇게 짧은 시간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나에게 일주일이란 재미있는 만화영화가 방영되는 간격이라는 지루하고 긴 시간. 그래서 미스타가 이 내기의 시간제한을 일주일로 걸었을 때, 나는 전혀 위기감을 느끼지 않았었다. 내가 설마 일주일 안에 못하겠어. 그런 마음으로 기꺼이 일주일이란 단위에 고개를 끄덕인 거였는데.

 

어째서 벌써 이틀이나 지나 버린 거야!’

 

시간은 생각보다 야속하게 흘러갔다. 화요일에 시작한 내기는 벌써 금요일이 되었는데도 아무 진전도 없었고, 남은 기간은 지나간 시간보다 긴데도 나는 괜히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아무리 그래도, 조금의 진보는 있을 줄 알았는데. 요 며칠간 내가 한 짓은 토킹헤드가 내 혀에 붙었을 때 했던 것처럼 멍청한 짓들뿐이었다.

처음에는 그저, 손을 잡아보려고 했다.

길거리를 걷는 연인들이 하는 것처럼 부드럽게 손을 잡고 깍지를 끼고, 손가락과 손가락을 꼬는 아주 간단한 접촉. 나는 그걸 키스의 발판으로 삼으려고 했지만, 난 어른의 세계를 너무 우습게 봤던 거였다.

 

그러니까, 여기 이 부분은 이 공식을 이용해서

 

수요일, 내가 배운 과목은 수학이었다. 내가 가장 싫어하는 공부중 하나인 수학. , 애초부터 집중도 잘 되지 않는 공부를 하는 날이었으니 나는 과외를 받으면서 시레나의 손을 잡아보려고 했다. 사실, 그냥 손을 잡는 거라면 평소에도 얼마든지 해 보았고 할 수 있었으니 큰 걱정은 없었다. 평소와 다른 건 덥석 잡던 손을, 그저 텔레비전 속 어른들 마냥 잔뜩 점잔빼고 잡은 후 깍지만 끼는 것뿐인걸.

그런데, 마음먹은 것과 달리 내 손은 시레나의 손 근처에도 다가가지 못했다.

 

어라?’

 

이 병신 같은 손! 움직여! 움직여서 저 손을 잡으라고!

돌덩이마냥 굳은 내 왼손을 보며 아무리 소리 질러도, 내 손은 의지대로 움직여 주지 않았다. 정말로 바로 코 앞. 두 뼘 앞의 거리에 놓인 시레나의 손을 잡기만 하면 되는 일인데. 그게 뭐가 어렵다고 난 팔이 움직이지 않는 걸까.

 

나란챠? 듣고 있어?”

? 아아, 당근이지! 듣고 있어

흐음

 

거짓말은 안 돼. 그렇게 말하는 것 같은 시레나의 입술이 장난스럽게 웃었다. 아아, 혼내는 것도 저렇게 혼내다니. 어쩐지 팔이 더 무거워 진 것 같잖아.

쪼다새끼! 스스로가 한심해 애꿎은 혀를 꾹 깨물자 머리가 핑 돌 정도의 아픔이 머리를 울렸다. 이때다. 고통으로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틈을 타 나는 몸을 숙였고, 움직이지 않는 팔은 내 기울어진 몸체 덕에 시레나의 손 위에 착지 할 수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지금부터였다.

 

나란챠?”

 

펜을 쥐고 있던 손도 아니고 놀고 있던 손을 잡았을 뿐인데, 시레나는 문제지에 열심히 밑줄을 긋고 동그라미를 치던 손을 멈추었다. 아니, , 갑자기 이유도 없이 내가 손을 잡았으니 놀라서 그럴 수도 있는 거긴 하지만, 내 머릿속 시나리오에는 시레나가 태연하게 공부를 가르쳐 주어야 하는데.

 

무슨 일이야? 갑자기

? 어어?”

 

무슨 일이야?’ 라니. 나는 그냥 손을 잡고 싶었던 거야. 시레나랑.

그렇게 말할 수도 없던 나는 그저 포개놓기만 한 손을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라 시선을 바닥으로 떨구었다. 내 손 밑에 깔린 흰 손은 갓 구운 빵처럼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금방이라도 입에 넣으면, 크림 맛이 날 것 같은 그런 느낌이라고 할까. 시레나의 손은 언제나 기분 좋은 온기가 느껴지긴 했지만, 어째서 오늘은 평소보다도 기분 좋게 느껴지는 걸까.

크림보다 희고 부드러운 손은 무식하게 힘으로 누르는 내 손을 피하지 않았다. 게다가 시레나는 시선을 피한 나를 계속 바라보며 대답을 기다리는 것처럼 입을 다물고 있다.

아아, 이 부담감.

파시오네 입단 시험을 치를 때도 이렇게 긴장되지는 않았는데. 식은땀이 차오르는 손이 미끌미끌 거렸다. 물론 식은땀이 나는 것은 손뿐만이 아니었다. 아마 볼 수는 없지만, 내 이마도 식은땀이 잔뜩 나 있을 것이다.

 

혹시 어디 아파? 표정이 안 좋아

 

결국 참다못해 입을 연 시레나는 내 손 밑에 깔린 제 오른손을 뒤집었다. 식은 땀 때문일까. 아니면 내가 너무 긴장하고 있기 때문일까. 나보다 조금 작은 손의 손등이 손바닥을 스쳐지나가며, 손바닥과 손바닥이 마주 닿는 그 찰나의 과정에서 나는 소름이 돋고 말았다.

펴져있던 손가락이 내 손가락 위로 올라타는 간질간질한 느낌. 분명 잡으려고 한 건 나인데, 정신을 차려보니 내 손을 꼭 쥐고 있는 것은 시레나였다.

, 이러면 안 되는데.

그제야 정신이 든 나는 가볍게 나를 쥐고 있는 손가락 사이로 내 손가락을 쑤셔 넣었다.

흠칫. 밀착한 피부를 타고 전해지는 떨림.

그 어느 때보다 놀란 것 같은 표정으로 날 바라보는 얼굴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 이 부분 잘 모르겠는데

 

태연한 척 문제지를 가리키며 말했지만 이미 내 오른손은 덜덜 떨고 있었다. 마주 잡은 손이 따뜻하다 못해 뜨겁다. 식은땀은 멈출 줄을 모르고, 시레나는 여전히 문제지가 아닌 내 얼굴을 보고 있다.

제발. 더 이상 뚫어져라 보지 마. 나도 부끄럽단 말이야! 남자답지 못하고 쪼다같이 구는 게!

마음속으로 외치는 비명을 들은 걸까, 펜을 잡은 손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물론 날 빤히 보던 얼굴도 평소와 같은 온화한 표정으로 돌아왔고, 날 뚫어져라 보던 시선도 내 얼굴을 떠났다.

 

여긴 전에 배운 부분을 응용하면 돼. 자꾸 해 보면 늘어

 

시레나는 그날 수업이 끝날 때 까지 내 손을 뿌리치지 않았다. 물론, 수업은 평소보다 더 엉망이었지만 나는 아무 잔소리도 듣지 않았다.

그렇게 수요일은 겨우 손을 잡았지만, 그게 내게 독이 된 건지 약이 된 건지는 잘 모르겠다. 분명, 평소와는 조금 다른 스킨십을 한 것 같지만. 이걸 계기로 날 남자로 볼 것 같다는 생각은 전혀 들질 않았다. 초등학생도 아니고! 뭘 그렇게 허둥지둥 한 걸까. 지금 생각하면 이불에 구멍이 날 정도로 창피한 일이었지만 진짜는 다음 날, 그러니까 목요일에 있던 일이었다.

목요일에는 수업을 하지 않았다. 시레나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은 아니고, 내가 일이 생겨버려서 레스토랑에 갈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수업이 없다고 그녀를 만나지 마란 법은 없으니, 나는 일이 끝나자마자 그녀의 레스토랑에 놀러갔다.

 

시레나~! 가게 마쳤어?”

 

갱의 일이란 솔직히 다 비슷한 것이었다. 누군가를 담가버리거나 우리를 담가버리려는 것들을 족치는 일. 내가 그날 한 일은 후자였다. 새로운 보스가 된 죠르노의 뒤를 캐려고 하고, 심지어 암살하려고 한 불손한 무리를 제거하고 온다. 실로 갱다운 업무. 상대가 스탠드사도 아니었기에 그 일은 하룻밤도 지나지 않아 마무리 되었지만, 내가 레스토랑에 도착했을 때는 벌써 밤 10시가 다 되어가는 늦은 시간이 되어있었다.

 

나란챠! 무사히 다녀 온 거야?”

 

가게를 정리하고 있던 시레나는 나를 보더니 걱정스러운 얼굴로 달려왔다. 방금까지 설거지라도 한 걸까. 더듬더듬 내 얼굴을 감싸는 두 손은 평소보다 차가웠다. 다른 사람이 이랬다면 굉장히 기분 나쁠 텐데. 좋아한다는 감정은 역시 위대하다. 내 양 볼을 감싼 찬 기운도, 시레나의 체온이라고 생각하니 이렇게 기분 좋다니.

 

당연하지~! 나랑 내 에어로 스미스가 깔끔하게 처리하고 왔다고!”

다행이야. 정말 다친 곳은 없는 거지?”

, 어어. 별건 아닌데까진 곳은 있어

까진 곳?”

 

내 말에 놀란 시레나는 얼굴을 놓고 내 몸을 이리저리 훑어보았다. 아아, 저 걱정스러운 표정. 나는 시레나의 안절부절 하는 표정을 볼 때 마다 표현하기 힘든 감정을 느꼈다. 나 때문에 애타주는 것은 솔직히 기쁘지만, 나를 너무 어린애 취급 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꺼림직 한건 어쩔 수 없다고 할까. 좋으면서도 싫고, 좀 더 바라면서도 막상 볼 때마다 불편해 지는. 이런 걸 모순이라고 하는 것이겠지.

 

별건 아니라니까? 여기

 

나는 오늘 적이 던진 나이프에 긁힌 손목을 보여주기 위해 왼쪽 손목의 밴드를 걷었다. 지혈은 대충 했다지만, 역시 피딱지가 흉하게 남은 손목은 내가 보기에도 괴로웠다. 이런 건 좋아하는 여자에겐 보여주면 안 되는 거지 않을까. 잠깐 그런 생각도 들었지만 그건 역시 괜한 걱정이겠지. 시레나는 나와 같은 갱. 그리고 뭐, 인정하긴 싫지만. 나만큼 강한 훌륭한 전투원이었으니까. 그러니까, 이런 상처 같은 건 아무렇지도 않을 거야.

라고 생각했는데.

 

세상에, 이게 뭐야! 괜찮아?! 약도 안 발랐지?! 이러고 그냥 오면 어떡해! 균이라도 들어가면 어쩌려고!”

 

이젠 딱딱하게 굳어 잘 지워지지도 않은 피 얼룩을 본 흰 얼굴에서 핏기가 싹 가셨다. 정말로 놀란 표정.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듯 동그랗게 뜬 눈에 괜히 나까지 놀라버렸다. 이런 표정을 지을 줄은 몰랐는데. 황급히 상처를 가리기 위해 도로 손목밴드를 내리려고 한 나는 그대로 시레나에게 그 손을 잡히고 말았다.

 

안 돼! 치료 하고 가!”

, 괜찮아 이 정도는! 죠르노에게 고쳐달라고 하면 금방인걸!”

죠르노에게 너무 의지 하지 마. 그러다가 정말 크게 다쳐서 죽으면 어떡해?”

 

드물게 단호한 표정으로 야단친 시레나는 나를 의자에 앉혀놓곤 가게 안쪽으로 사라졌다. 자신보다 큰 남자를 끌고 오는 저런 힘은 도대체 어디서 오는 걸까. 스탠드를 쓴 것도 아닌데. 여자의 집념은 무섭다고 들었는데, 어쩌면 그거랑 관계가 있는 걸까?

고민하고 있던 찰나 구급상자와 함께 돌아온 그녀는 내 손목밴드를 벗겨내고 소독약을 꺼냈다. 코를 찌르는 알코올 냄새. 분명 저게 상처에 닿는다면, 엄청난 따끔거림이 몰려오겠지. 그 아픔을 잘 알고 있던 나는 손목을 빼려다가, 또 다시 그 흰 손에 덜미를 잡혔다.

 

안 돼. 가만히 있어

 

착하지?’ 어린아이를 달래는 것 같은 말투와 달리 표정은 단호하고 달콤하다. 어떻게 사람이 저렇게 헷갈리는 모습을 보일 수 있는 걸까. 역시, 여자란 너무나도 신기했다.

눈을 차분히 내리깔고 내 상처를 소독하는 시레나의 목덜미에선 여전히 좋은 향이 났다. 소독 솜의 지독한 알코올 향보다 나를 어지럽게 만드는 그 체취. 손목을 쿡쿡 쑤시는 것 같은 통증은, 그 앞에선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다.

굳은 피딱지가 닦여나가고 차가운 내 손목 위에는 연고와 함께 붕대가 감겼다. 다 됐다. 그녀의 만족스러운 중얼거림에 고개를 들자 평소엔 풍성한 금발 아래 숨어있던 흰 목덜미가 보였다. 머리를 어지럽게 만드는 이 체취의 근원. 삶은 계란의 속같이 뽀얀 그 목에 난 마른 침도 삼킬 수 없었다.

끌어안고 싶다. 저 목덜미에 이마를 부비고 싶다.

누가 들으면 깜짝 놀랄 만한 욕심에 나는 눈이 먼 사람마냥 두 손을 뻗었다.

 

나란챠?”

 

툭 소리가 날 정도로 어깨에 머리를 처박은 건 순전히 내 실수였다. 원래는 조금 더 로맨틱하게 기대려고 했는데. 왜 이놈의 멍청한 머리는 이럴 때 마다 굳어버리는 걸까. 아니, 적어도 뇌가 굳으면 몸이라도 제대로 행동해 줘야 하지 않는가.

어정쩡하게 시레나의 양 어깨를 잡고 고개만 목덜미에 비비고 있는 나는 누가 봐도 남자답다고 하기엔 어정쩡한 꼴을 하고 있었다.

. 그녀의 웃음소리가 비수를 파고들었지만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저 웃음은 분명, 내 행동이 우스워서 웃어버린 거겠지. 아아. 나는 왜 그랬을까 후회와 함께 고개를 들려는 순간, 시레나의 두 손이 내 허리를 감쌌다.

 

많이 피곤하지? 수고했어. 장하다 우리 나란챠

 

등을 토닥여주며 말하는 그 목소리에는, 정말이지 과분할 정도의 사랑스러움이 담겨있었다. 귀가 녹아버릴 것 같은, 얼마 전 먹었던 초콜릿이 잔뜩 뿌려져있던 케이크와 같은 달콤함. 저런 말을 들을 수 있다는 건 얼마나 행복한가. 하지만 역시 나는 욕심쟁이라, 붉어진 얼굴을 들 수는 없었다.

나를 진심으로 걱정해 주는 건 고맙지만, 나는 지금 어리광을 부리는 것이 아닌데.

하지만 또 나는 남자다워 보이기보다, 그저 그렇게 조금 더, 그 품에 안겨있고 싶어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완전 등신 같아!!’

 

허무하게 지나간 이틀을 생각하면 할수록, 나는 과거로 돌아갈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반드시 과거의 나를 두들겨 패주겠다는 생각만 들 뿐이었다. 손을 잡은 것도 좋았다. 시레나의 목덜미에 파묻힌 것도, 시레나에게 꼭 안겼던 것도 좋다.

하지만 이 모든 행동이 전혀 남자다워 보이지 않고 어리광으로 보였다면, 다 헛수고가 아닌가!

 

오늘이야 말로, 뭔가를 저질러야

 

라고 결심해도, 사실 오늘은 몇 시간 남지도 않았다. 지금은 저녁 9. 아까 전 점심시간에 공부하러 갔을 때, 긴장해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공부만 하고 온 나에게 더 이상 오늘의 기회는 없었다.

내일은 또 어쩌지, 내일도 멍청하게 굴었다간 정말로 푸고를 형이라고 부르는 배드엔딩을 보고 말 것 같은데. 그건 죽어도 싫다! 그냥 혀 깨물고 죽으면 죽지, 푸고를 형이라고 부르는 건 다시 태어나도 하기 싫다.

물론 그 이전에, 시레나랑 뽀뽀를 하고 싶다는 마음도 크지만 말이다.

 

나란챠! 너 푸딩 먹을래?”

 

내 이런 심란한 마음을 모르는 걸까, 아니면 알기 때문에 놀리려는 걸까. 소파에 뻗어있는 나에게 다가온 미스타는 차가운 푸딩을 눈앞에 내밀었다.

 

푸딩? 됐어!”

? 안 먹어? 야단났네! 너무 많이 사왔는데~”

죠르노가 심부름이라도 시킨 거야?”

 

애초에 우리들 중에서 저런 걸 먹을 사람은 한정되어 있는데, 바보도 아니고 왜 수를 못 맞춰 사온 걸까. 정 남는다면 제 시끄러운 스탠드들에게 줘버려도 될 텐데. 입속으로만 반박을 우물우물 거리고 있자, 미스타는 푸딩을 뜯어 스푼을 찔러 넣었다.

 

심부름 까진 아니고, 아 맞나? 시레나가 왔는데 대접할 게 없어서 사왔는데 시레나랑 죠르노 외엔 아무도 안 먹는다고 해서 머릿수대로 사온 게 소용이 없어졌지 뭐야

아 그래?!”

 

내 귀가 잘못되지 않았다면 지금 분명 미스타의 입에서, 시레나라는 말이 나온 것 같았는데. 상체를 벌떡 일으켜 일어난 나는 속편한 얼굴로 푸딩을 퍼먹는 미스타의 옷자락을 잡고 흔들었다.

 

시레나가 와있어?!”

, ! 이거 놔!! 푸딩 흘리겠다!! 그리고 몰랐어? 부차라티 보러 온 거 같던데

내가 어떻게 알아! 지금 어디 있어?”

죠르노 사무실에. 셋이서 무슨 이야기 하는 거 같던데? 야 어디가?!”

 

어디가긴, 당연히 시레나 보러 가지!

대답할 시간도 아까워 머릿속으로만 대답한 나는 죠르노의 사무실로 뛰어갔다. 굳게 닫힌 문, 그 너머로 들려오는 소리에는 확실히 시레나의 목소리가 섞여있었다.

부차라티를 보러 왔다면서 왜 죠르노의 사무실에 있는가, 사실 그런 건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내가 지금 신경 쓰이는 것은 단 두 가지. 어째서 시레나가 부차라티를 만나러 왔는가, 그리고 지금 내가 들어가도 괜찮은 타이밍인가.

사실 시레나는 부차라티와 오랜 시간을 같이 보낸 사이니 둘이서 나눌 이야기가 있다고 해서 이상할 건 없었다. 질투가 나긴 했지만, 같이 지내온 세월이라는 것은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이었으니까. 그래도 나는 왜 지금 시레나가 부차라티를 만나러 이까지 왔나 신경 쓰여서 버틸 수가 없었다. 할 이야기라면 낮에 만나도 되고, 가게로 불러도 되지 않는가.

 

그럼, 일단은 푸고에게 연락하는 걸로

으응, 부탁할게요. 부차라티

이정도야. 나 말고 여기 죠르노에게 고마워해야지

 

, 다행이 시레나가 찾아온 이유는 조직의 일 때문인 것 같았다. , 그렇다면 안심이지. 놀란 가슴을 가라앉히고 문에 기대선 나는 대화를 조금 더 엿들을 생각으로 숨은 죽이고 귀는 기울였다.

그런데 어째서일까, 그 다음 들려오는 소리들은 목소리가 아니었다. 저벅저벅. 스윽. 각종 잡다한 잡음만 들리는 것은 안에서 귓속말이나 필담이라도 오간다는 걸까. 그렇게 귀를 문에 딱 붙였을 때, 내 귀를 파고드는 것은 문고리가 돌아가는 소리.

달칵.

 

으아아악?!”

 

순식간에 뒤로 빠진 문, 무게중심을 잃고 쓰러진 내게 보이는 것은 천장과 세 사람의 얼굴. 당장이라도 웃음이 터질 것 같은 죠르노, 황당하다는 얼굴로 한숨 쉬는 부차라티, 그리고 깜짝 놀라 손을 뻗는 시레나.

 

나란챠?! , 여기서 뭐해? 괜찮아?”

, 아아 그게~”

 

이럴 땐 뭐라고 해야 좋은 변명이 될까. 그런 걸 생각하기엔, 머리가 너무 아팠다. 비유적인 표현이 아니라, 부딪힌 뒤통수가 너무 아파서 눈앞이 어질어질 할 정도였다. 우물쭈물 아무 말도 못하던 난 결국 시레나의 손을 잡고 일어섰지만 시선은 들 수 없었다.

쪽팔린다. 쪽팔려서 죽을 거 같다! 왜 나는 이렇게 바보 같은 짓만 골라서 하는 걸까!

 

괜찮습니까, 나란챠

문에 기대지 말라고 내가 옛날부터 말했잖아! 그리고 들어올 거라면 노크했다면 될 것을

미안 부차라티~ 뭔가 심각한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아서!”

별거 아니었으니 들어와도 됐다만

 

부차라티는 가볍게 혀를 차고 시레나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럼 조심해서 돌아가기를. 아무리 너라도, 밤길은 위험하니까

걱정 마세요, 아직 그렇게 늦은 시간도 아닌 걸요?”

? 시레나 가는 거야?”

 

안 돼! 난 이제 겨우 만난 건데 돌아가다니! 초조해 보이지 않게 물어보려고 했지만 이미 내 말투는 다급함이 절절하게 느껴졌다.

 

, 볼일도 끝났고

그럼 내가 마중 나갈게! 밤길은 위험하잖아! 그렇지? 응응?”

 

부차라티에게 허락을 구하듯 시선을 그쪽으로 돌린 나는 시레나의 손을 잡았다. 드라마에서 봤는데, 이렇게 남자 주인공이 여자 주인공을 데려다주면서 사이가 좋아지거나 키스를 하는 경우가 엄청 많았다. 그러니까 나는, 이번 기회를 이용해 반드시 시레나랑 키스를!

 

뭐 괜찮겠지, 얼른 다녀오도록

어쩐지 아빠랑 아들 같네요, 두 사람

시끄러워 죠르노!”

 

나랑 부차라티는 겨우 3살 차이인데 무슨 아빠랑 아들이야. 저 말이 별로 악의가 없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나보다 어린 죠르노가 나를 어린아이로 보는 것 같아 기분이 좋지만은 않았다.

 

그럼 다녀올게, 가자 시레나!”

, 잠깐! 천천히 가 나란챠!”

 

부차라티와 죠르노의 시선을 얼른 피하고 싶어서였을까, 건물 밖으로 나가는 발걸음은 의도치 않게 빨라졌다. 거리로 나와서도 잠시 동안은 평소보다 빠른 걸음으로 걷던 나는 건물과 조금 떨어지고 나서야 발을 멈출 수 있었다. 내게 손을 잡혀 끌려오듯 따라 나온 시레나는 가빠진 숨을 고르며 웃었다.

 

좀 천천히 가, 누가 쫒아오는 것도 아니고

, 하지만 더 늦어버리면 좀 그럴까봐! 아무리 갱이라도 시레나는 여자니까 밤길은 위험해

부차라티도 그렇고 다들 날 너무 걱정한다니까? 고맙긴 하지만

 

그래, 잘 알고 있다. 시레나가 얼마나 무시무시한 갱인지는. 나는 시레나가 스탠드를 쓰는 그 순간을 몇 번이고 봤으니까. 그녀는 우리가 걱정할 필요가 없는 사람이었고, 사실 나도 이렇게 유난 떨 정도로 시레나를 걱정하는 것도 아니었다.

나는 그냥 빨리 단 둘이 있고 싶었을 뿐인 거짓말쟁이일 뿐이지.

 

그럼지금부턴 천천히 갈까?”

그래, 그래. 애초에 그렇게 먼 거리도 아닌데~”

 

하긴 누구도 걸어서 10분 거리를 멀다곤 하지 않는다. 게다가 시레나의 레스토랑까지 가는 거리는 사람도 많고 가로등도 많으니 위험하지도 않고, 천천히 산책하듯이 걷기엔 딱 좋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그 드라마 속의 연인이 걷던 거리도 이런 느낌이었는데.

그런 걸 의식하고 나서야, 아까 덥석 잡은 시레나의 손이 갑자기 뜨겁게 느껴졌다.

 

오늘 밤은 조금 쌀쌀하네, 그렇지?”

 

시레나는 나랑 손을 잡은 것이 별로 대수롭지 않다는 듯 평소와 같이 말을 걸어왔다.

그네를 타듯, 앞뒤로 살랑살랑 마주잡은 손을 흔드는 모습은 아무리 봐도 나보다 연상의 여자가 할 모습으론 보이지 않았다. 물론 시레나가 어린애로 보인다는 뜻은 아니었다. 누가 봐도 시레나는 숙녀 같이 생겼고, 생각하는 것도 어른스러웠으니까. 다만 가끔 이렇게 드러나는 소녀 같은 모습은, 정말이지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귀엽다고 할까.

 

그러게, 안 추워?”

난 괜찮아. 추위는 잘 안타거든. 나란챠는?”

나도 괜찮아

 

춥기는커녕 덥다. 단지 시레나와 손을 잡고 나란히 걷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난 온몸이 가슴을 중심으로 따끈따끈해졌다. 내가 이렇게 자기를 좋아한다는 게 마주잡은 손을 통해서 느껴진다면 좋을 텐데. 그런 만화 같은 일도 생각했지만 역시 현실은 만화와 달랐다. 아무리 손을 꽉 쥐어도. 시레나는 앞만 보며 걷고 있었으니까.

답답하다. 초조하다.

두근거리는 압박감은 익숙한 듯 낯설었다. 주변을 걸어가는 사람들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나는 시레나의 옆모습만 바라보았다. 반만 묶은 긴 금발이 가로등 불에 따뜻한 색으로 흔들리고, 밤공기에 섞인 목소리는 어느 때와 같이 향기롭다. 영화는 안보는 나지만 만약 이게 영화라면, 지금이 하이라이트 장면일까.

 

, 시레나

 

저 멀리 시레나의 가게가 보이자 초조해 진걸까. 아니면 분위기에 이끌려 버린 걸까.

나는 멈춰서 시레나를 부르고 말았다.

 

?”

 

아차. 자고로 이미 해버린 말이라는 건 다시 주울 수 없다고 배웠는데. 무의식 적으로 한 행동에 아마 제일 당황한 것은 나일 것이다.

이제 어쩌면 될까. 시레나를 끌어당겨, 허리를 끌어안고 입을 맞추면 될까. 그랬다가 따귀라도 맞으면? 아냐, 시레나가 날 때릴 리가 없어. 하지만, 역시 난 아직 시레나의 마음을 모르겠는데.

 

나란챠?”

 

. 사람을 불러놓고 이렇게 아무 말도 안 하면 실례인데. 마음은 알고 있지만 머릿속은 아직 새하얗다. 어쩌지. 어쩌면 좋지. 발만 동동 구르던 나는 지금 이 상황이 조금은 익숙한 이유를 깨달았다.

옛날에 내가 어렸을 적, 학교를 다녔을 때쯤에 한 그림자밟기 놀이.

그림자밟기의 술래가 되었을 때었을 때도, 분명 이런 기분이었지.

눈앞에 있는데도 단지 그림자 속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잡을 수 없고, 상대는 언제 그림자 밖으로 나올지도 모른다. 머리가 나쁜 나에게는 언제나 가장 괴로운 역할이었던 술래. 그게 싫어서 언제나 그림자밟기를 할 때면 슬쩍 빠지거나 술래가 되지 않기 위해 필사적이었는데.

언제 또 나는 이렇게 술래가 되어버린 걸까.

 

나란챠? 왜 그래?”

시레나

 

, 울면 안 되는데. 우는 건 전혀 남자답질 못한데. 나는 새어나오는 눈물을 숨길 수 없었다. 하지만 나는 도저히 시레나를 어떻게 대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손을 잡고 있는데도, 다른 세상에 있는 것 마냥 아무것도 알 수 없는 시레나의 마음이 무서워서 나는 울어버리고 말았다.

 

나란챠? , 왜 울어? 내가 뭐 잘못했어?”

그게, 아니라

뭔가 말 못할 고민이라도 있어?”

 

고민일까. 이런 것도 고민이라고 하면 고민이겠지? 시레나의 마음을 전혀 모르겠는 게, 키스하고 싶은데 방법을 전혀 모르겠는 게, 비록 누군가는 비웃을지 몰라도 고민이라고 할 수 있겠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울음만 끅끅 삼키는 나를 시레나는 이상하게 보지 않았다. 오히려 다정하게 끌어안아주고, 등을 토닥여주며 내가 진정하기만을 기다려줬다.

 

괜찮아, 울지 마. ? 왜 그래?”

, 키스하고 싶어

?”

시레나랑, 키스하고 싶어

 

이건 남자답게 용기를 낸 것이 아니었다. 술래의 비참한 항복 선언. 전부 그림자 속으로 숨어버려 손 쓸 방도가 없는 술래가, 아무런 수도 쓰지 못할 때 하는 마지막 방법.

겨우 쥐어짜낸 그 말에 시레나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나랑?”

그것 때문에 운거야?”

그건 아니지만, 아니, 맞나? 모르겠어,

 

이제 어찌 되도 상관없다. 미스타랑 했던 내기도, 져도 상관없다. 결국 난 이정도 밖에 안 되는 사람이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눈물이 나오는 눈을 꾹 감았는데, 시레나는 화를 내거나 기분나빠하지 않았다.

 

흐음

 

짧은 신음과 함께 껴안은 팔을 빼낸 시레나는 눈물범벅이 된 내 얼굴을 닦아주었다. 눈을 감고 있어서 그런 걸까. 아니면 찬 공기에 비해 그 손이 너무나 뜨거워서 그럴까. 내 얼굴을 스쳐지나가는 손가락 하나하나가 눈을 뜨고 있을 때 보다 더 선명하게 와 닿아, 나는 얼굴을 뒤로 빼버릴 뻔 했다.

 

해줄까?”

?”

키스. 입에다 하는 거 말이지?”

 

신이시어. 지금 제가 잘못 들은 건 아니겠지요.

깜짝 놀라 눈을 뜬 것도 잠시, 난 부끄러움에 차마 똑바로 그 얼굴을 바라볼 수 없었다. 코앞까지 다가와 생글생글 웃고 있는 시레나는 내가 시선을 피하자, 내 시선에 따라 고개를 기웃거렸다.

 

, 해도 돼?”

. 나란챠라면 뭐~ 괜찮아

 

저 말은 무슨 뜻일까. 나라서 괜찮다니. 나는 어린애니까 키스해도 괜찮다는 걸까, 아니면 정말로 나라서 괜찮다는 걸까. 어느 쪽이든 그런 말, 이런 타이밍에 해 버리면 부끄러워서 죽을 것 같은데. 게다가 해 줄까라니. 내가 시레나에게 하는 게 아니라, 시레나가 나한테 해준다고?

나는 아직 상황 파악도 다 되지 않았는데 시레나는 눈물을 닦아주던 손을 거두고 내 어깨를 덥석 잡았다. 그리고 꼭 드라마의 주인공처럼, 눈을 감고 천천히 고개를 내밀었다.

잠깐, 아무리 키스하고 싶다고 하긴 했지만. 이건 아니잖아! 나도 남자의 자존심이라는 게 있는데!

 

, 진짜

 

쥐도 궁지에 몰리면 고양이를 문다고 했던가, 그건 마치 비참한 술래 앞에 등장한 마음씨 착한 그림자를 밟는 것과 비슷한 행동이었다.

어깨를 잡고 있는 손을 낚아채는 것은 아주 간단했다. 그리고 그 손을 잡아당겨 다가오는 얼굴에 속도를 붙이는 것도, 어느새 내 눈앞에 다가온 입술에 입을 맞추는 것도 놀라울 정도로 간단했다. 이제까지 고민하고 울어 버린 게 바보 같을 정도로, 나는 순식간에 내게 키스해주려는 시레나에게 먼저 입을 맞추었다.

하나, , .

무슨 법칙이라도 정해놓은 듯 마음속으로 정확히 3초를 센 후 손을 놓자, 마주 닿았던 입술이 휙 도망가 버렸다.

 

, 나란챠, 너어

 

. 얼굴 빨개졌다.

시레나는 한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힐끔힐끔 이쪽을 보고 있었다. 저런 표정은 한 번도 본 적 없는데. 좀 못된 생각일지 몰라도, 아까 울어 버린 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당황하는 시레나는 귀여웠다. 놀란 얼굴은 몇 번 봤지만, 저렇게 당황하는 건 처음 본다. 그리고 그 당황하는 이유가 내 키스 때문이라니.

 

, 난 이만 갈게! 내일 봐!”

 

어차피 이러기 위한 배웅이었고, 가게도 코앞이니 괜찮겠지. 그렇게 자기최면을 걸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어나갔다.

드디어, 드디어!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나는 지금 당장이라도 길 한복판에서 만세를 부를 수도 있었다. 미스타가 들으면 이렇게 사람이 많은 거리에서 무슨 쪽팔린 짓이냐고 하겠지만, 시레나랑 키스도 했는데 만세정도야 껌이지 않겠는가. 그러고 보니, 내기는 이걸로 내 승리인가? 지금 당장 미스타한테 가서 자랑해야지!

 

만세!”

 

미스타가 사준다는 저녁은 시레나랑 먹으러 가야지. 어차피 쏘기로 한 건 미스타니, 가격 따위 내가 알 바 아니니까. 대신, 저녁을 먹으러 가자고 말할 때는, 오늘보다 더 멋있고 정중하게 말해야지.

 

술래의 항복 선언은, 한번밖에 안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