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D/Pokémon

7대 죄악 합작 / 열등감

Esoruen 2017. 10. 1. 00:53


※ 합작 홈 주소 → https://kohmj2001cjdgk.wixsite.com/7deadlysins

※ 글라디오, 일리마 양날개 드림. 오리주 주의.




열등감

written by Esoruen




아주 옛날부터, 일리마는 열등감이라는 단어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유복한 집안, 하고 싶은 것은 뭐든지 할 수 있는 환경, 그리고 그 하고 싶은 것은 대부분 해보면 실패하는 일 없이 잘 풀린다. 가끔 실패하는 일도 있지만,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지는 날이 있다고 생각하면 아무렇지도 않아지지. 그러다 보면 실패도 과정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결과보다는 과정에 집중하게 되었다. 일리마는 좋은 환경에서 제대로 자란 도련님이었고, 본인도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도련님은 대부분 좋은 아가씨와 맺어진다. 이것은 편견이기도 했고 사실이기도 했지만, 일리마는 아마도 그 법칙이 자신에게도 적용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연애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다. 자신이 관심 있는 것은 포켓몬 배틀 뿐. 나이가 어려서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해봤지만, 자신도 벌써 10대 중반이었다. 또래의 친구들은 벌써 첫사랑을 경험했거나 연인이 있었고, 자신에게 관심을 보이는 여학생도 꽤 많았으니 나이가 문제인 건 아닐 것이다.

미래의 신부, 이상형, 데이트. 그런 것 보다 제가 관심 있는 건 어떤 배틀에서도 먹힐 전술이나 기가 막힌 만능 대처법 같은 것 뿐.

 

때가 되면 부모님이 적당한 짝을 구해주지 않으려나.’

 

자신이 직접 결혼 상대를 찾을 생각도 없으니, 아마 3류 드라마에서 나오는 것처럼 자신도 집안사정이 비슷한 영애랑 어영부영 약혼하고 결혼하겠지.

안일하다고 해도 좋은 그의 예상은, 몇 년 뒤 보기 좋게 빗나가고 말았다.

 

, 일리마 씨다!”

 

자신을 발견하고 활짝 웃는 얼굴에선 환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 탄식하듯 감탄한 일리마는 트레이너 스쿨로 서둘러 가던 발을 돌려 양 손 가득 쇼핑백을 든 리코이에게 다가갔다.

 

좋은 오후네요, 리코이 씨.”

알로라, 일리마 씨! 어디 가세요?”

그냥, 잠깐 산책 중이었어요.”

 

아무렇게 않게 거짓말을 하는 자신도 신기하지만, 사실 더 신기한 것은 그녀를 향한 감정이었다. 분명 맨 처음 그녀를 봤을 땐 이런 미래가 오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는데. 자신은 어쩌다 그녀를 좋아하게 된 걸까. 리코이는 곱게 자란 것도 아니고, 좋은 집 아가씨도 아니었는데.

예측 불가능한 그녀의 배틀 스타일처럼 리코이를 향한 제 연심은 늘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튀었다. 그래. 어쩌면 리코이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제 예상 밖의 일만 저질러 왔기에 자신이 이렇게 빠지게 된 걸지도 모르지. 그녀와의 했던 승부들을 곱씹던 그의 얼굴에, 평소 짓는 기계적인 미소와는 다른 환한 웃음이 번졌다.

 

리코이 씨는 어디 가나요? 그 쇼핑백들은?”

아아, 이거 말이에요?”

 

그녀가 들고 있는 쇼핑백은 전부 모양이 달랐다. 하나는 부티크의 것, 하나는 말라사다 가게의 것, 하나는 프랜들리 숍의 것. 어느 것도 물건으로 빵빵하게 부푼 쇼핑백은 리코이가 얼마나 즐겁게 쇼핑을 하고 온 건지 보여주는 것 같았다.

 

글라디오가 사줬어요! 나는 괜찮다고 했는데, 사양 말라고 해서 잔뜩 골랐어요!”

, 그런가요?”

 

쇼핑백을 들어주기 위해 손을 뻗으려던 일리마는 황급히 동작을 멈추었다. 혼자 다니고 있어서 당연히 일행이 없을 줄 알았는데. 또 예상이 빗나갔다. 평소라면 어떤 의외의 상황도 즐겁게 넘겼겠지만, 이건 아니지. 그는 조잘조잘 떠드는 리코이의 뒤편을 눈으로 훑었다.

 

리코이. 여기 있었군.”

 

역시나. 곧 올 줄 알았다. 일리마는 포켓몬 센터에서 나와 곧바로 이쪽으로 다가오는 글라디오를 보고 모른 척 시선을 거두었다.

 

글라디오! 포켓몬 회복은 다 하고 왔어?”

물론. 이제 슬슬 돌아갈까. 너무 오래 자리를 비우면 비케 씨가 걱정할 테니.”

 

말을 이어가던 글라디오는 자리를 뜨지 않는 일리마를 힐끔 쳐다보았다. 경계하는 눈빛은 아니지만, 일리마는 오히려 그 악의 없는 시선이 더 싫었다. 마치 자신은 아무 방해물이 안 된다는 것 같은 눈짓. 리코이와 함께 있다 해도 전혀 신경 쓰이지 않는다는 건, 자신은 경쟁상대도 안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지 않겠는가.

 

가지, 리코이.”

? , 알았어! 일리마 씨, 바이바이! 다음에 만나면 또 승부해줘요!”

 

눈이 마주쳤지만 글라디오는 제게 인사도 하지 않았다. 물론, 일리마 본인도 별로 인사할 생각이 없었으니 상관은 없었지만 말이다.

잘 가요.’ 리코이의 인사에 손을 흔들어 주며 대답한 그는 나란히 붙어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 까지 그 자리에 가만히 서있었다. 참으로 사이좋은 한 쌍이다. 스컬단이었던 시절부터 붙어 다녔으니 저렇게 친한 것도 이해는 가지만, 그래도, 따지고 보면 알아온 세월은 제가 더 긴데.

 

왜 저 사람이 좋은 걸까?’

 

자만은 아니지만, 남자친구로 삼는다면 자신 쪽도 절대 나쁘지 않은데. 일리마는 진심으로 이해 할 수 없었다. 자신은 글라디오보다는 몸도 마음도 어른이었고, 안면을 튼 기간도 훨씬 길었다. 비록 친했던 것은 아니어도 칼로스로 유학을 떠나기 전부터 몇 번이나 스쳐지나가며 얼굴도 익혔는데. 유학을 다녀온 후엔, 캡틴과 스컬단 단원으로서의 조우라고 해도 몇 번이나 배틀도 하고 잡담도 나눴는데. 어째서. 리코이는 자신보다 글라디오가 더 좋은 걸까.

 

어떻게 해야 하지?’

 

그는 처음으로, 포켓몬 승부 이외의 것으로 깊은 고민에 빠졌다.

좋아하는 여자아이를 가지고 싶다. 참으로 어린아이 같은 욕심이었지만 그는 제 욕심 자체를 이상하다 생각하지 않았다. 물론 사람은 소유물이 아니고, 볼로 잡아 가질 수 있는 것도 아닌데 가지고 싶다고 느끼는 건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어떻게 해야.”

 

소리 내어 중얼거린 그가 엄지를 가볍게 깨물었다.

지금 제가 느끼는 감정은, 단순히 사랑받고 싶다거나 제가 그녀의 첫 번째로 중요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욕망이 아니었다. 제가 지금 느끼는 건 좀 더 단순하고 원초적인, 물리적으로 가까워지고 싶다는 갈망과 그걸 막는 누군가를 향한 원망.

 

왜 이렇게 마음대로 되는 게 없는 걸까.’

 

처음으로 느껴보는 열등감. 자신의 예상을 벗어난 것이, 제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 이렇게나 답답하다는 걸 느끼게 되는 날이 오다니. 일리마는 머릿속을 꽉 채운 이 감정이 모두 리코이를 향한 사랑이라 믿었다. 이뤄지지 않는 사랑의 초조함이 만들어내는 아픔. 첫사랑이라는 이름의 고역. 분명 그것뿐일 것이라 믿었지만, 사실은, 자신도 알고 있었다.

 

이 아픔 중 절반 이상은. 아마 지금 리코이의 옆에 있는 그 남자를 향한 시기일 것이라는 사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