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D/Dungeon & Fighter

드림 장기합작 2분기 / 여름의 이야기

Esoruen 2018. 6. 29. 21:43



※ 데스페라도 연애, 마이스터 우정 드림. 오리주 주의.

※ 합작 홈 주소 → https://moonmist.wixsite.com/a-year-together




여름의 이야기

written by Esoruen




달그락. 유리잔 속에서 녹아가는 얼음들이 작은 비명을 지른다.

‘정말이지 지독한 더위다.’ 이 생각도 오늘만 몇 번 했는지 모르겠지만, 마이스터는 제 머릿속 가득 차오르는 불평을 지워 낼 수 없었다. 언제나 냉방기구로 쾌적하게 유지되던 제 작업실에, 설마 ‘에어컨 고장’이라는 변수가 생길 줄이야.

고장 났다면 수리하면 그만이지, 매일 기계만 만지는 사람이 그게 뭐가 문제란 말인가. 누구나 그렇게 생각하고 마이스터 본인도 그렇게 생각했지만, 운명은 그를 도와주지 않았다.


“부품은 언제 오는 거야….”


하필 에어콘 수리에 꼭 필요한 부품이 다 떨어졌고, 주변 공방에서 구하려고 했지만 병기제작에 쓰인다고 부품을 탈탈 털려 남아있는 게 없었다니. 3류 시트콤도 아니고,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상황인가.


“선풍기가 이렇게 무능하게 느껴지긴 처음이네.”


결국 황도군 쪽에 부탁해 부품을 받기로 하긴 했지만, 그 동안은 선풍기와 얼음물로 버틸 수밖에 없다. 작업을 그만 두고 쉰다면 조금 더 시원해 질 수야 있겠지만, 손을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는 건 좀이 쑤셔서 견딜 수 없었다. 결국 최대한 시원한 밤에 환풍기와 선풍기를 전부 돌린 채 작업을 하고 있던 마이스터는 결국 자정이 가까워 진 시간 쯤 더위에 못 이겨 책상 위에 엎어지고 말았다.

낮에는 더 더울 테니 지금 일해야 한다. 하지만 지금도 충분히 더워 의욕이 나지 않는다. 얼음으로 가득 채웠던 잔 안에는 이제 그냥 물밖에 없고, 작업 중인 기계도 불에 달군 것 마냥 뜨거워 만지기도 싫었다.

다 때려 칠까. 아니면, 황도군 막사에 쳐들어 가?

그답지 않게 극단적인 선택지들이 푸념을 대신해 머릿속에 피어오를 때 쯤, 후덥지근한 작업실 안에 초인종 소리가 울려 퍼졌다.


“마이스터, 있어?”

“…응?”


이 목소리는 분명, 제 지인들 중 제일 소란스러운 녀석들 중 한 명의 목소리다. 원래는 무법지대에 있어야 할 인물이 왜 여기에 왔는가. 좀 수상하긴 했지만, 내치고 싶을 정도로 귀찮은 상대는 아니었다.


“루엔?”

“아, 있네! 문 좀 열어줘!”

“무슨 일이야, 또.”


루엔이 왔다는 건 분명 데스페라도도 같이 왔다는 의미겠지. 두 사람은 어지간하면 떨어지지 않고 같이 행동했으니까. 연애 같은 것에 관심이 없는 자신이 봐도, 그 둘은 좀 재수 없을 정도로 다정한 커플이었다. 물론 사이 나쁜 것 보다는 다정한 게 100배 낫지만, 이렇게 불쾌지수가 높은 날에는 별 것이 다 짜증나지 않던가.


“여어, 놀러왔…. 어라? 왜 이렇게 더워?”

“너 괜찮은 거냐? 왜 반쯤 죽어있어?”


역시 예상대로 데스페라도도 왔다. 하지만 마이스터가 주목하고 있는 건 손님들의 머릿수나 목적이 아니었다. 아무리 그래도 첫마디가 ‘왜 이렇게 더워?’ 라니. 그녀가 무법지대의 악몽인 줄은 알고 있었지만, 이건 악몽이라기 보단 악당같이 느껴질 정도인데.


“…살다 살다 루엔보다 데스페라도가 날 먼저 걱정해 주는 날이 오다니. 무더위 덕에 좋은 구경하네.”

“뭐야. 나도 걱정 하고 있다고? 그냥 늘 시원하던 네 작업실이 밖보다 더 더우니 이상해서 그것부터 물어 본 것뿐이야.”

“밖보다 더?”


‘과연. 밖은 바람이라도 불어서 더 시원하다는 것인가.’ 거의 책상이랑 한 몸이 되어있던 마이스터는 그렇게 중얼거리더니 한참 실소를 흘렸다.


“…데스페라도, 얘 지금 더위 먹은 거 맞지?”

“그런 거 같은데.”

“하아, 안되겠네. 더위 피하려고 온 건데, 반대가 되었어.”


뭔가 대단히 큰 결심을 한 사람처럼 등을 쭉 편 루엔은 늘어져있는 마이스터를 억지로 일으켰다. ‘우와, 완전히 젖은 빨래 같아.’ 그녀는 악의 없이 중얼거렸지만, 모든 것이 스트레스인 마이스터의 입장에선 저 말을 그냥 흘려 넘길 수 없었다.


“젖은 빨래는 어디다 쓰게?”

“어라, 화났어? 그러지 말고, 산책이라도 하고 오자고. 시간이 좀 늦었지만, 어차피 파워스테이션은 다들 철야하느라 밤에도 온 거리가 불빛으로 번쩍번쩍 하잖아?”

“그럴 기운 없어.”

“그건 네가 앉아만 있으니까 그런 거야! 데스페라도, 가자!”


‘제발 말려라. 데스페라도.’ 마이스터는 그에게 눈짓으로 그렇게 부탁했지만 상대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만 으쓱일 뿐이었다. 아아. 더위는 자신보다 데스페라도 쪽이 더 많이 타니 제 편을 들어줄 거라 생각했는데, 설마 루엔의 편을 들 줄이야. 이래서 커플은 안 돼, 라고 진심으로 생각하는 마이스터였다. 


“뭐 확실히 여기보다는 밖이 더 시원하니 말이지, 어차피 저 녀석 고집엔 져주는 게 이기는 거고 말이지. 포기해.”


데스페라도는 당사자에겐 들리지 않게 마이스터 귓가에 그리 말했지만, 그래도 마이스터는 도저히 표정을 풀 수 없었다. 평소라면 산책 정도는 얼마든지 해주겠지만, 지금처럼 몸에 아무 힘도 없을 땐 침대까지 걸어가는 것도 싫은데.

하지만 안타깝게도 지금 자신은 격렬하게 싫다는 의견을 피력하려는 기운도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두 사람에게 이끌려 밖으로 나온 마이스터의 표정은 결코 좋지 않았지만, 막상 차가운 밤바람이 땀에 젖은 얼굴을 스치자 구겨졌던 미간도 스르륵 펴졌다.

아아. 파워스테이션의 밤거리가, 이렇게 시원했던가.

생각해 보니 늦은 밤에 외출을 안 한지도 좀 되었다. 원래도 작업실 밖으로 나가는 일이 적기도 하지만, 밤에는 주로 일을 하고 나가야 할 경우가 생기면 대부분 낮에 외출했으니 밤거리는 정말 볼 일이 없었다. 그렇다고 해도, 이렇게 까지 시원할 필요가 있나? 속인 사람도 없는데 사기라도 당한 기분이었다.


“어때? 시원하지?”

“…그러게.”


제가 뭔가 큰일이라도 한 듯 말하는 루엔에게 피식 웃으며 답한 마이스터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에어컨 바람보다는 못하지만, 확실히 체온과 실내의 공기로 덥혀졌던 몸에 이 밤바람은 딱 고마운 온도였다.


“그나저나, 네 작업실은 어쩌다 그 모양이 된 거냐.”

“어? 아아. 에어컨이 고장 났어. 부품이 없어서 못 고치고 있었지.”

“그런 거였냐. 기계는 기계 나름 문제가 생긴다 이거군.”


자초지종을 알게 된 데스페라도는 습관적으로 담배를 피우기 위해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가 곧 손을 빼었다. 아무리 골초라도 사람 체온도 덥게 느껴지는 지금만큼은 담뱃불이랑도 마주하기 싫다, 뭐 그런 거겠지.


“무법지대엔 기계가 보급화 되어있진 않으니, 이런 고충은 없겠네.”

“대신 무법지대는 밤엔 시원하니까 상관없지.”

“…황무지는 온도차가 많이 난다는 건 알았지만, 그건 좀 부럽네.”

“뭐, 여기도 여기 나름 밤의 좋은 점이 있으니까.”

“그래? 어떤 건데?”


정작 거주자인 입장에서 봤을 때 파워스테이션의 밤이 가지는 장점은 상대적으로 치안이 안전하다는 것과 밤길이 밝다는 것뿐인데. 외부인의 눈으로 봤을 땐 뭐가 좋아 보일까.

마이스터는 정말 호기심에 물은 것이었지만, 돌아온 대답은 그다지 순수하지 않았다. 데스페라도는 슬쩍 자신들을 두고 앞서나가는 루엔을 가리키고, 슬쩍 입 꼬리를 올렸다.


“저 녀석이 야경을 배경 삼아서 서있는 걸 볼 수 있는 건 여기뿐이거든. 황도는 생각보다 야경이 화려하진 않으니까.”

“…….”


역시 너희들은 좀 짜증난다. 연애에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도 짜증나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어.

목구멍 끝까지 차오른 말을 삼킨 마이스터는 들이마셨던 숨을 푹 내쉬었다. 그래도 오늘은 고마운 일이 있으니, 표정으로는 드러내지 않도록 할까. 가끔 사람의 염장을 지르고, 남의 말도 안 듣는 무모한 녀석들이라도, 제 몇 없는 지인들이니 말이다.

땀이 완전히 식은 마이스터의 얼굴엔 어느새 편안한 미소가 지어져 있었다. 나쁘지 않은 여름밤이다. 그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