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림 동화합작 / 빨간 두건
※ 데스페라도+제너럴 드림, 양날개랑 오리주 주의
※ 합작 홈 주소 → http://moonmist.wix.com/fairytale
빨간 두건
written by Esoruen
나는 너의 탄환에 목숨을 잃을 가여운 빨간 두건.
전쟁터에서 민간인과 적의 경계선은 도대체 어디쯤일까. 루엔은 그 질문을 들었을 때 도저히 표정관리를 할 수 없어 애를 먹고 말았다.
적과 적이 아닌 것의 구분이라.
그녀가 태어나고 자란 무법지대에선 죽지 않으면 죽는다. 오직 그것 뿐. 아주 간단하고 폭력적인 규칙아래에서 생의 전부를 살아온 그녀는 저런 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도 없었고, 대답할 필요성도 느끼지 못했다. 제게 총을 겨누면 그건 다 적이지, ‘민간인’이 어디 있단 말인가.
“글쎄, 난 군인이 아니니까. 역시 모르겠는걸. 애초에 나랑 데스페라도는 전쟁을 해온 게 아니라, 그냥 카르텔 좀 족치고 다니던 것뿐이니까”
“그거, ‘좀’이라고 말하기엔 좀 많지 않아?”
“그런가? 그런데, 갑자기 그런 이야기는 왜 꺼낸 거야? 블래스터”
“아아, 별건 아니고… 오늘 예상 밖의 사고가 하나 일어나서, 지금 제너럴이 골치를 썩고 있거든”
‘사고?’ 루엔은 그렇게 되묻고 불이 꺼지지 않은 막사를 보았다. 벌써 밤 11시가 다 되어 가는데도 회의가 끝나지 않아서 무슨 일이 있나 했더니, 뭔가 일이 터진 거였나. 오늘은 그를 따라 나서지 않고 데스페라도와 막사를 지켰던 그녀는 흥미 반 걱정 반의 얼굴로 물었다.
“무슨 일이기에 그래? 누가 배신이라도?”
“그런 거라면 차라리 일이 빨리 끝났겠지. 배신자만 죽이면 되는 거잖아?”
하아. 깊게 한숨을 내쉰 블래스터는 뒷머리를 긁적이고 말을 이어갔다.
사건의 발단은 오늘 낮, 겐트를 습격한 카르텔을 몰아내기 위해 벌어진 시가전에 있었다. 대부분의 적이 도망가고, 몇 명은 적은 민가에 숨어들거나 사살 당하던 와중. 황도군 병사 한명이 민간인의 집에서 카르텔을 발견해 사살했고, 그것이 문제가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카르텔을 죽였는데 도대체 뭐가 문제가 된 것인가. ‘설마 이런 시기에, 주택침입 정도로 이 난리를 치는 건 아니겠지?’ 루엔은 농담한답시고 그렇게 말했지만, 블래스터가 내놓은 답은 생각보다 복잡했다.
“그게, 아무래도 그 카르텔은 원래 거기 살았던 모양이야”
“응? …그러니까, 겐트에 거주하는 카르텔이다?”
“정확하게는 ‘전’카르텔 이었지. 어쩌면 아직 카르텔일지도 모르지만, 사망자 측근이 말하기엔 이미 손 턴지 오래라고 하고”
아하, 과연 그렇게 된 건가. 루엔은 그제야 질문의 의미를 이해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과거에는 카르텔이었지만, 지금은 카르텔이 아닌 일반인. 전쟁에 참여하지도 않았고, 먼저 공격하지도 않았는데 살해당했다. 이건 확실히 군사회의감이지. 적어도 루엔 본인이 생각하기엔 ‘쏜 사람이 정당방위’였지만 말이다.
“그런데 어쩌다가 카르텔이 황도에? 게다가 수도 겐트에 살고 있었다니. 베릭트 씨랑 비슷한 경우인가?”
“그렇다고 하는 거 같아. 사실 죽은 사람은 말이 없으니, 진실은 모르는 거지만”
“흐음”
이건 제가 더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생각한 그녀는 ‘알려줘서 고맙다’는 말만 남기고 제너럴의 막사로 향했다.
다행이라고 할까, 회의는 황도군의 병사 편으로 흘러가는 것 같았다. ‘그런 상황이라면 누구라도 오해할 수밖에 없을 텐데요?’ ‘전쟁 중이잖습니까, 지금 이곳은’ ‘그 여자의 말을 어떻게 믿습니까?’ 군인들의 말에 제너럴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제 입장을 명확하게 밝히지 않았고, 당사자인 병사는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테이블 위의 서류만을 보고 있었다.
이러니 회의가 늘어질 수밖에. 땅이 꺼져라 한숨 쉰 그녀가 톡톡, 제너럴의 등을 두드렸다.
“무슨 일입니… …엔?”
“이야기는 블래스터에게 전부 들었어요. 아직 이러고 있어요?”
“아, 으음… 네. 아무래도, 사안이 사안이다 보니”
원래도 일에 찌들어 피곤해 보이는 그이긴 하지만, 오늘따라 그 얼굴에 드리운 그늘이 더 짙어 보인다. 본래는 그저 ‘카르텔 처리’에만 도움을 주러 온 자신이지만, 이런 경우라면 자신이 도와주는 게 당연하지 않을까.
“제가 사망자 측근을 만나볼게요. 데스페라도랑 같이”
“…엔이요? 으음, 마음은 고맙지만… 이건 황도군 내에서 일이고…”
“그러지 말고요! 솔직히, 이런 일이라면 무법자들에게 맞기는 게 좋지 않겠어요?”
확실히 그럴지도 모르지. 루엔의 설득에 솔깃한 제너럴은 그녀에게 ‘잠시만요’라는 말을 남기고 부하들에게로 갔다. 아무리 제가 상사라도, 회의까지 연 일을 단독으로 결정할 순 없다는 걸까. 그녀는 고지식하다고 해야 할지 성실하다고 해야 좋을지 모를 그를 보며 킥킥 웃었다. 무법지대 남자들은 저런 맛이 없는데, 이런 면에선 참 매력적이란 말이지. 그가 돌아오기를 즐거운 표정으로 기다리던 루엔은 조금 뒤, 안도한 표정으로 돌아오는 그를 맞이해 주었다.
“다들 괜찮다고 하네요. 그럼 부탁해도 될까요?”
“맡겨주세요, 금방 다녀올게요!”
잘 해결할 자신은 없지만, 억울한 병사 하나가 영창을 갈 지경이라면 도와주고 싶은 것이 사람 마음 아니겠는가. 오만이라고 할지 몰라도, 루엔은 이번 사건이 전적으로 황도군 쪽이 억울하다고 생각했으니까.
다른 지역 사람들은 잘 모르겠지만 카르텔을 나온다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모래바람 베릭트는 실력이 있고 연륜이 있어, 자신에게 덤벼오는 조무래기들 따위는 단번에 저세상으로 보내줄 수 있었기 때문에 쉽게 손을 털고 나올 수 있었던 것이지. 보통이라면 ‘그만두겠다’라고 한 순간 동료였던 자들의 손에 목숨을 잃는 게 정상이었다. 그런데 그런 상황을 이겨내고 탈 카르텔 할 수 있을 정도로 실력을 가진 무법자가 손을 털고 나왔는데, 자신이 그 이름을 모르다니.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왜냐하면, 자신과 데스페라도는 무법지대에선 모르는 사람이 없는 ‘카르텔 사냥꾼’ 이었으니까.
“데스페라도, 잠깐 나갔다 오자”
요 며칠 황도군에 끌려 다니느라 많이 피곤했던 걸까. 데스페라도는 나무 의자에 앉아 졸고 있다가 그녀의 목소리에 슬쩍 눈을 떴다. ‘또 뭐야?’ 신경질 적으로 중얼거리며 마른세수를 한 그는 잠깐 숨을 돌리고 고개를 들었다. 아무리 짜증이 나도 제 연인에게 화풀이를 해선 안됐으니까, 진정할 틈은 있어야지.
“…갑자기 왜? 오늘은 아무 일도 없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뭐 황도군에서 뭔가 시킨 건 아니고. 그냥 외출이야. 내 흥미 위주의?”
“그럼 상관없지만, 이 시간에?”
과연. 황도군이 시키는 일은 죽어도 싫지만 루엔의 부탁이라면 사정이 다른 건가. 벗어둔 코트를 걸치고 금방 나갈 채비를 마친 그는 피곤한 정신을 깨우기 위해 담배를 꺼내 물었다.
“미안, 모처럼 쉬는 날인데”
“됐어. 언제는 쉬었냐?”
“그건 그렇지. 우린 우리끼리 다닐 때 더 바빴으니까”
무법지대에서 두 사람이 하는 일은 간단했다. 법이 없는 그곳에 조직을 만들고 규칙을 만들어 지배하려는 카르텔을 ‘사냥’하는 일. 겨우 단 둘이서 거대 조직에 맞선다. 말도 안 되는 일이라 할지 몰라도 두 사람은 총을 몇 번 잡아보지도 않고 조직의 이름만 빌려 양아치 짓을 하는 잡배도 못 해치울 정도로 약하지 않았다.
옛날의 카르텔은 이렇지 않았지. 어차피 아직 젊은 두 사람에겐 그다지 공감되지 않는 말이지만, 카르텔은 본디 무법자들의 로망을 위해 뭉친 소소한 모임 같은 것이었다. 이렇게 조직화 되고, 길거리 양아치나 끌어들여 몸집을 불린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은 일. 베릭트가 카르텔을 나온 것도, 딱 그 시기 쯤 이었다.
“그런데, 어딜 가는 건데?”
“아, 맞아. 말해주는 걸 잊었네. 저기, 좀 신경 쓰이는 일이 있는데 말이야”
그래도 혹시 모르니 자신과 같은 입장인 그에게 물어보는 게 좋겠지. 루엔은 제가 이제까지 본 것과 들은 것은 가감 없이 그에게 이야기 해주었다. ‘뭔가 했더니, 그런 거였냐?’ 얌전히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며 고개를 끄덕이던 데스페라도는 단번에 이 사태에 대한 제 감상을 내놓았다.
“그 놈이든 측근이든, 거하게 속여 보려고 한 거겠지”
“그렇지?”
“카르텔이 요즘 개나 소나 다 들어갈 수 있다지만, 나오는 건 마음대로 안 되는 법이니까. 그리고 무법지대에 살던 놈이 뭐 하러 여기까지 와? 숨어 살 거면 파워스테이션까지 도망가던가. 아니면 무법지대에서도 숨어살 수 있잖아?”
구구절절 맞는 말이다. 루엔은 속이 시원해졌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하고 싶었던 말이 이거다. 역시 5년 정도같이 살아온 연인이란 말하지 않아도 생각이 통하는 걸까. 괜히 뿌듯해진 그녀가 데스페라도의 등을 두드렸다.
“…그런데, 뭘 물어볼 건데?”
“응? 그 사망자 측근에게?”
“그래. 어쩌면 그 측근인가 뭔가부터 속았을 수도 있잖아? 애초에, 왜 네가 나서서 해결한다고 한 거야?”
“그냥? 제너럴이 그런 회의에 잡혀서 못 자는 게 좀 불쌍하기도 하고. 더 알아보고 싶은 것도 있고?”
“아, 그래?”
호오. 루엔은 명백하게 불쾌해 보이는 데스페라도의 대답에 웃어버리고 말았다. 분명 ‘제너럴’이라는 이름이 나오자마자 인상을 썼지. 그의 마음은 잘 이해하지만, 저렇게 솔직하게 굴면 더 삐딱하게 나오고 싶어진다는 걸 모르는 걸까.
“뭐 그래도 내 호기심이 우선이야. 따라와 줄 거지?”
“안 간다고 해도 끌고 갈 거면서 무슨”
“어라, 나 그렇게 너무하진 않은데”
솔직하게 말하자면 ‘너무한 사람’은 맞지만, 그에게 너무한 사람은 아니라는 거였지만.
짓궂게 웃는 루엔을 보던 데스페라도는 어깨를 으쓱이고 반쯤 태운 담배를 버렸다. 그녀는 언제나 ‘데스페라도는 못 이기겠다’고 투덜거리지만, 제 입장에선 자신도 충분히 휘둘리고 있다는 걸 알긴 할까.
“아, 저기 있다”
데스페라도를 끌고 황도군 진영을 돌아다니던 그녀는 저 멀리, 천막 아래 놓여있는 보디백(body bag)과 한 여자를 가리켰다. 아까 전 제너럴과 블래스터에게 들은 정보가 확실하다면, 저들이 그 ‘전’ 카르텔 이라고 주장했던 남자와 측근이라는 사람이겠지.
“저기, 잠깐 이야기 좀 들을까 하는데”
고개를 숙이고 있던 여자는 루엔의 목소리에 느리게 고개를 들었다. 울고 있었던 걸까. 퉁퉁 부은 눈으로 두 사람을 훑어본 그녀는 일단 제게 말을 걸어온 상대가 황도군이 아니라는 점에서 안심한 것인지 쉽게 대답을 해왔다.
“누구세요?”
“아아 뭐 그냥… 지나가던 무법자? 이쪽은 내 동료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마. 이번에 사고로 죽었다던 남자에 대해, 좀 묻고 싶은 것이 있어서”
굳이 사고라는 표현을 쓴 것은 어디까지나 상대를 배려해서였다. 마음속으론 ‘죽어도 싸다’고 생각해도, 당사자 앞에서 그런 말을 하는 건 무례한 짓이었으니까.
전 카르텔의 측근이라고 했으니 무법자라고 소개하면 좋아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무슨 일일까. 여자는 루엔의 말에 얼굴이 굳더니, 누가 봐도 당황한 표정으로 시선을 돌렸다.
“무, 묻고 싶은 거라면…”
“뭐 간단하게 이것저것? 걱정 마. 당연한 이야기지만 우린 카르텔은 아니니 복수니 뭐니 그런 것 때문에 온 게 아냐. 우리도 카르텔은 질색이거든”
혹시 자신들이 카르텔 일까봐 겁을 먹은 걸 수도 있다. 그렇게 생각하고 제 나름 해명도 했지만 여자의 표정은 도저히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역시. 원래도 수상하다 생각했지만, 이젠 정말 의심밖에 되지 않는다. 그녀는 경계심을 풀어주기 위해 애써 웃는 얼굴로 다가왔었지만, 이젠 그럴 필요가 없다는 걸 깨달았다.
“이봐”
방금 전까지 상냥했던 그 말투는 어디로 간 걸까. 곧바로 제 고향에서 쓰던, 평소의 말투가 튀어나온 그녀는 순식간에 리볼버를 뽑아 움직일 리 없는 보디백에 총구를 들이밀었다.
“아까 말했지만 우린 황도의 샌님 오빠들이랑은 좀 달라서, 곱게 뭘 물어보는 건 잘 못하거든?”
“뭐, 뭐 하는…”
“무슨 사정으로 카르텔에서 나왔다는 녀석의 신변을 보호해 주는지 모르겠지만 말이야 아가씨. 그렇게 까지 소중하다면 안 그래도 총 맞아 죽은 몸에 또 총알이 박히는 건 싫겠지?”
“뭐 하는 거냐고 했잖아요!”
총을 보고 겁이라도 먹은 걸까. 아까 전 보단 목소리가 커졌지만 여자의 새하얀 얼굴은 이제 완전히 핏기가 없어지고 말았다. 겨우 총 하나에 겁먹을 정도면, 이 여자는 확실히 민간인일 텐데. 왜 자꾸 이 남자의 무고를 주장하는 걸까.
“간단해, 내가 묻는 말에 아가씨는 대답만 하면 돼. 아 혹시 날 어떻게 해보려는 생각은 안하는 게 좋아. 나 그렇게 약하지 않고 내 뒤에 있는 남자도 가만히는 안 있을 거거든. 그렇지?”
“긴 말 말고 빨리 묻기나 해. 내가 대신 족쳐줘?”
“누구 울릴 일 있어? 아, 이미 울렸나… 어쨌든. 알아듣겠어? 아가씨”
“……”
목소리도 잘 나오지 않는지 고개만 끄덕여 대답한 여자의 시선이 보디백 속 시체를 향했다.
“우선 첫 번째. 이 남자랑 무슨 관계였어?”
“…약혼, 자… 인데요”
“약혼자?”
간단히 말해, 사귀는 사이라는 건가. 데스페라도와 루엔의 시선이 가볍게 교차되었다. 카르텔과 겐트의 민간인이라. 이런 말은 실례겠지만, 지독하게도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다. 적어도 무법지대의 민간인이면 몰라. 열차 없이는 오가기도 힘들 텐데, 이런 장거리 연애를 하다니? 게다가 무법자들은 무법지대에 있으니 ‘무법자’인 것이지, 법과 질서가 있는 황도에서는 그저 ‘범법자’일 뿐인데.
“…뭐, 믿어줄게. 그래, 어차피 우린 황도군도 아니니 솔직하게 대답해 줬으면 좋겠는데 진짜 이 남자 손 턴 거 맞아? 원래 같이 살았고?”
“……”
“…데스페라도?”
이름만 불렀을 뿐인데도, 뭘 부탁하는지 귀신같이 알아듣는다. 가만히 있던 그가 손을 움직이기 무섭게, ‘탕!’ 보디백에 작은 구멍이 생겼다. 조용한 밤에 들린 요란한 총성. 쉬고 있던 근처의 황도군들이 모두 세 사람을 바라봤지만, 말리는 사람은 없었다.
“무, 무슨…!”
“뭐긴 뭐야. 경고 했잖아? 그래서, 뭘 물어보면 대답해 줄래? 아무리 무법지대에서 악몽이니 사신이니 불리는 우리라고 해도, 아무 죄 없는 사람을 쏘고 싶지는 않거든”
“…악몽… …아”
그제야 자신에게 다가온 이 한 쌍이 누군지 눈치 챈 걸까. 자신도 모르게 물러선 여자는 보디백 옆에 주저앉아 차갑게 굳은 애인을 끌어안았다. 이미 죽은 것을 보호하려는 건 무슨 심리일까. 매일 누군가의 죽음을 봐온 그녀에겐, 잘 이해가 가지 않는 행동이었다.
“안 돼, 안 돼… 이 사람은 아무 잘못 없어요. 제발…”
“전 카르텔이? 손 털었어도 살인자는 살인자야. 아 우리도 살인자지. 무법지대에선 자랑도 안 되는 이야기지만”
“최근엔, 최근엔 정말 착하게 살았단 말이에요! 매일, 매일 날 위해서 아침도 차려주고… 같이 장도 보고… 주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도, 날 지켜주겠다고 했는데…”
울면서 토해내는 이야기에는 거슬리는 점이 많았다. ‘최근엔’ 도 신경 쓰이지만, ‘주변에 무슨 일이 일어나도’ 라는 건 무슨 뜻일까. 전쟁 중이니 지켜준다는 것 까진 이상할 것 없는 말인가? 그게 아니면, ‘누구로부터 지키겠다’는 건지 명확하지 않아, 이렇게 거슬리는 걸까? 두 사람이 생각에 잠긴 동안, 여자는 계속해서 말을 쏟아냈다. 웅얼거리듯이, 혹은 소리치듯이.
“그런데, 그렇게 좋은 사람인데. 그 사람들은 이야기도 들어보지 않고 대뜸 집에 들어오자마자, 이 사람을 죽여 버렸다고요. 믿어져요?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도 모르면서, 카르텔이라도, 카르텔이라도 내 연인인데. 나랑 만나면서 변해간 사람인데. 같이 살면서, 착해진 사람인데. 날 해치지 않는데. 날 구해주려고 쐈다니, 그게 무슨…”
결국 울음에 삼켜진 말들은 눈물이 되어 시체가방 위로 떨어졌다. 이 이상은 물을 필요도 없겠지. 사정을 대충 파악한 루엔이 리볼버를 치웠다. ‘갈까?’ 데스페라도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여자를 보고 있는 연인에게 속삭이듯 물었다.
“…가자, 제너럴에게 보고해 줘야겠네”
분명 원하던 답은 받아 냈을 텐데. 뭐가 그리 찜찜한 걸까. 울고 있는 여자를 두고 자리를 뜬 두 사람은 각각 자신의 방과 제너럴의 막사로 가는 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차라리 사람을 쏴 죽이는 게 마음이 편하지. 이런 일은 역시 찝찝해서 뒷맛이 나쁘다. 루엔은 새삼 제가 왜 이 일을 하겠다고 나섰는지 생각해 보기까지 했다.
쥐 죽은 듯 조용한 막사에 돌아온 그녀는 긴 회의로 지친 병사들을 동정어린 눈으로 봐주고 제너럴을 불러냈다. 시간이 많이 늦었는데 졸리지도 않는 걸까. 약간 피곤해 보일 뿐 곧은 자세로 서있던 그는 구세주마냥 돌아온 루엔을 따라 막사를 나가자마자, 일의 결과부터 물었다.
“어떻게 되었나요?”
“정당방위, 라고 해야 할까. 잘 죽였어요. ‘전’ 카르텔은 무슨. 그냥 카르텔인 모양이던데요? 그 여자랑 눈이 맞아서 같이 산 모양이지만”
“…그런가요?”
잘 된 일이다. 더 이상 회의를 할 필요도 없다. 마른세수를 한 제너럴은 막사로 들어가려다 말고,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멈춰 섰다.
“제너럴”
“네?”
아무리 질질 끈 회의를 빨리 마무리 하고 싶어도, 그녀가 부른다면 돌아서는 것이 제너럴이었다. 원래도 상냥하고 매너 있는 남자이긴 했지만, 제가 좋아하는 여자에겐 한없이 약해지기도 했으니까. 그런 그가, 어찌 멈춰 서지 않을 수 있겠는가.
“혹시 그 여자도 처벌받나요? 위증죄라던가. 카르텔을 숨겨준 죄 같은 걸로”
“글쎄요. 아마,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이 일이 알려진다면 그렇게 될지도”
“흠”
기대했던 대답이 아니었던 걸가. 루엔이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고 시선을 피했다.
“여자는 그냥 내버려 뒀으면 싶어서 물어봤는데. 음, 그렇군요”
“특별히 뭔가 이유라도?”
“그냥, 조금 불쌍해 보여서? 사람은 누구나 사랑 앞에선 바보가 되는 법이니까요. 어쩌다 죽여야 할 사람에게 연정을 느끼고, 죽이러 왔던 남자에게 반해서 동거까지 하게 되었던 건진 모르겠지만… 이런 걸 뭐라고 하더라. 스톡홀롬 증후군? 그런 거 아닐까요?”
자신답지 않게 관대한 시점일지도 모르지만, 루엔은 제 애인의 시체를 끌어안고 울던 여자의 눈물이 도저히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자신도 애인이 있으니까 공감이 되는 걸까. 그게 아니면, 언젠간 이렇게 될지도 모른데도 곁에 있고 싶었던 그 마음이 갸륵하게 느껴진 걸지도.
“스톡홀롬 증후군이라기엔, 좀 경우가 다를지도 모르죠”
“그런가요?”
“네. 음, 어쨌든. 엔이 그렇게 말한다면 제가 어떻게든 해볼게요”
‘그럼 이만’ 따뜻한 미소와 함께 고개를 숙여 인사한 제너럴은 금방 표정을 굳히고 막사 안으로 돌아갔다. 제 앞에서만이라도 필사적으로 웃는 얼굴을 유지하려 하다니. 어쩐지 그가 안쓰러워져 웃을 수도 없어진 루엔은 그가 남긴 말을 곰곰이 생각하며 방으로 돌아갔다.
“다녀왔냐?”
“응”
“…표정이 왜 그래? 무슨 일 있었냐?”
얌전히 제 옆으로 와 앉는 루엔은 그녀답지 않게 입을 꾹 다물고 먼 곳만 바라보고 있었다. 뭔가 달갑지 않은 소리라도 들은 걸까. 궁금하긴 하지만, 막상 캐묻기는 난감하다.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데스페라도는 조용히 루엔의 반응만 살폈다.
“…루엔?”
“아, 그런 건가?”
“뭐가?”
“아니, 그 커플 말이야… 그, 아까 그 여자랑 골로 가버린 남자. 처음엔 스톡홀롬 증후군 같은 거 아닐까 했는데, 제너럴이 조금 다르지 않으냐고 했거든”
“…그래서?”
제너럴이란 말에 또 그의 표정이 구겨졌다. 루엔은 제 연인의 얼굴을 분명 보았지만, 그것을 구태여 지적하거나 놀리지 않았다. 그녀에겐 지금, 더 중요한 깨달음이 있었으니까.
“지금 생각해 보면, 좀 빨간 두건 같네”
“…빨간 두건? 그… 동화 말이야?”
“응. 늑대 나오는 그거”
‘이 녀석의 상상력은 어디까지일까’ 그는 가끔 엉뚱한 소리를 하는 루엔이 신기하게 느껴졌다. 원래도 책 읽는 것을 좋아하고, 제가 못 견딜 정도로 로맨틱 한 생각을 하긴 했지만. 뜬금없이 동화이야기라니. 하지만, 놀랍게도 그녀의 말이란 이유만으로 흥미가 가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거기서, 사냥꾼이 빨간 두건을 구하려고 늑대를 죽이잖아?”
“그렇지”
“사냥꾼은 선의였을지 몰라도, 빨간 두건이 늑대를 사랑했다면 그건 그냥 살인… 아니 도축 아닐까. 이번 경우도 그런 거라고 생각해”
“원래 동화에선 빨간 두건도 사냥꾼에게 고마워하지 않냐?”
“그렇지. 뭐, ‘예를 들어 사랑했다면’을 이야기 하는 거니까. 음. 잠이나 자자”
시간이 늦었으니 자야 한다. 오늘은 쉬었지만, 내일은 자신들도 나가서 싸워야 하니까. 먼저 침대에 드러누운 루엔은 얼른 제 옆에 오라는 듯 가볍게 침대 위를 두드렸지만, 그는 자리에 눕는 대신 질문을 하나 던졌다.
“…만약에”
“응?”
“굳이 너랑 날 동화로 따지자면, 난 사냥꾼이냐 늑대냐?”
오, 설마 제 연인이 저런 질문을 던질 줄이야. 루엔은 해가 서쪽에서 뜨는 걸 본 사람마냥 얼빠진 얼굴로 눈을 끔뻑였다. 저 표정을 보아하건데, 그는 꽤 진지하게 물은 게 분명하다. 대답을 회피했다간 별로 좋은 꼴은 못 보리라.
“음…”
곧바로 대답이 나올 질문은 아니었지. 데스페라도는 뜸을 들이는 그녀를 재촉하지 않고 기다려 줬고, 루엔도 기다리는 그를 위해 최대한 빨리 답을 내주었다.
“늑대지”
“늑대냐”
“왜? 늑대 쪽이 좋잖아? 아, 근데 사냥꾼도 나쁘지 않을 것 같고”
“…어느 쪽인 거냐…”
킥킥. 어이없어하는 그의 반응에 웃은 루엔이 상처투성이 손을 잡아당겼다.
“어느 쪽이던 상관없어. 늑대라면 잡아먹혀 줄 거고, 사냥꾼이라면 네 총에 맞아 죽어줄 테니까”
“…둘 다 비극 아냐?”
“빨간 두건은 새드 엔딩 아니었던가?”
“나 참”
그녀를 따라 웃은 데스페라도는 제 연인 옆에 누워서야, 동화의 결말 같은 것은 별로 상관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신들이 살아가는 세계는 동화도 아니었고, 자신은 늑대도 사냥꾼도 아니었지만.
하지만 뭐,
제 연인은. 빨간 두건인가?
그렇게 생각하면 또 괜히 자신을 이야기 속에 끼워 넣게 된다. 원치 않게 그녀의 상상력까지 닮아버린 데스페라도는 내용이 가물가물한 동화 속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아보았다.
역시, 자신은 늑대 역이 맞는 것 같다. 동화에서 히어로 역할은 굳이 따지자면 사냥꾼이지만, 제게 그런 역은 별로 어울리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역이라면…
‘…그 샌님이 어울리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그는 얌전히 루엔을 껴안고 눈을 감았다. ‘역시 그런 생각은 하지 말았어야 했어’ 그의 한숨이 루엔의 목덜미에 내려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