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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D/Pokémon

그냥 드림 합작 / 환청


포켓몬스터 HGSS 아폴로 드림. 오리주 주의.

※ 합작 홈 주소 → http://gnyangdream.creatorlink.net/




환청

written by Esoruen




이 세상에는 태어났을 때부터 정해져서 바꿀 수 없는 것들이 몇 가지 있다. 예를 들어 종족이나 유전자, 핏줄 같은 것들. 그런 것들은 바꾸고 싶다고 하루아침에 휙 바꿀 수 있는 것들이 아니었지. 자신이 고른 것도 아닌데, 그저 부모에 의해서 만들어 진 것뿐인데, 당사자는 그것을 평생 가지고 살아야 한다. 그 얼마나 불합리한 일인가. 니켈은 거울을 보다 말고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아가씨, 왜 그러십니까?”

 

갑자기 들린 대답은 방심하고 있던 소녀를 놀라게 하기엔 충분했다. 눈에 띄게 어깨를 움츠리며 고개 돌린 니켈은 소리도 없이 문을 열고 들어온 아폴로를 보고 숨을 삼켰다.

 

, . 아무것도 아니에요. .”

무언가 걱정거리라도 있으신가요? 그렇게 큰 소리로 한숨을 쉬고.”

아니에요. 신경 쓰지 않아도 되어요.”

 

이런 거짓말은 이제 눈 한번 깜빡이지 않고 할 수 있다. 자신은 그렇게 키워져왔으니까. 언제나 어디서나 의연한 무표정으로 있어야 하고, 나약한 모습은 보여선 안 된다. 그것이 조직을 이끄는 자에게 어울리는 행동이었고, 제 아버지가 자신에게 바라는 것이었으니까.

 

혹시 비주기 님이 걱정되셔서 그러는 거라면, 부디 걱정 마세요. 저희가 반드시 로켓단을 부활시켜 아가씨와 비주기 님에게 영광을 돌려드리겠습니다.”

 

자신은 아무 소리도 하지 않았는데, 그는 또 제멋대로 착각하고 위로를 해온다. 처음에는 진절머리가 났어도, 이젠 이것조차도 익숙하다. 특별히 대답하고 싶지 않아 입을 다문 그녀는 다가오는 발소리와 그림자에 고개를 숙였다.

 

니켈은 아폴로가 무서웠다.

 

아버지의 부하이자 지금은 해산 상태인 로켓단을 부활시키겠다는 원대한 계획의 주동자인 그는, 지금 남아있는 로켓단 잔당들에겐 꿈과 희망 그 자체나 다름 없는 인물이었다. 객관적으로 생각하면 아버지의 조직을 재건시키겠다고 애쓰는 그를 제가 꺼려 할 이유는 없어 보이겠지. 다른 간부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몰라도, 아폴로의 충성심은 모두가 인정했으니까. 보호자도 없는 자신을 거두고, 사라진 제 아버지를 모른 척 한 채 보스의 자리에 앉을 수 있는 기회를 걷어찬 사람이니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하지만 그녀가 무서워하는 건, 바로 아폴로의 그 맹목적인 충성심이었다.

 

아시겠지요? 아가씨.”

 

제 코앞까지 다가온 그는 굳이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자신과 눈을 맞춰온다.

고개를 들면 안 된다. 머릿속으로 그렇게 수십 번 되뇌는 니켈의 마음을 알 리 없는 아폴로는 약하다고는 말할 수 없는 강도로 그녀의 양 팔을 덥석 잡았다.

 

아가씨는 저희들의 미래입니다. 아가씨까지 사라지면, 저희는 더 멀리 돌아가야 합니다.”

.”

 

비명을 지를 정도는 아니지만, 잡힌 팔뚝이 아프다.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흘린 니켈은 무심코 고개를 들었다가 조용히 이글거리고 있는 아폴로의 두 눈과 정면으로 마주보게 되었다.

기대. 애착. 존경과 열망.

강렬한 감정들로 뒤섞인 그 두 눈은, 걱정과 부담으로 짓눌려 사는 니켈에게는 견딜 수 없는 공포를 안겨주기엔 충분했다.

 

로켓단은 반드시 부활합니다. 저희와, 아가씨의 힘으로.”

 

어째서 당신은 내가 부활을 바란다고 생각하나요. 나는 여기가 싫어요. 갈 곳이 없어서 여기 있는 것뿐인데, 내가 정말 로켓단을 좋아한다고 생각하나요. 아버지의 잘 부탁한다는 말만 없었어도, 실버를 따라 갔을 텐데. 나는 왜, 아버지의 딸이라서.

넘치는 생각은 결국 목소리가 되어 나오지 못했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그녀를 가만히 보던 아폴로는 정중하게 웃고 몸을 일으켰다.

 

저는 일이 있어 가보겠습니다. 식사는 꼭 챙기세요, 니켈 아가씨.”

 

아직도 양 팔이 얼얼하다. 아폴로가 나갈 때 까지 숨을 죽이고 있던 그녀는 문이 닫히자마자 몸을 웅크려 얼굴을 숨겼다.

차라리 자신을 무시하거나 가르치려 들었다면 이렇게 무섭지 않았을 텐데. 아직은 어린아이인 자신은 저 위협적일 정도의 사모를 감당할 수 없었다.

여기서, 아버지가 만든 울타리에서 벗어나야 한다.

하지만 어떻게 하면 되는 걸까. 어디로 가면 되는 걸까.

로켓단만을 위해 키워진 그녀는 저 문제에 대한 답을 곧바로 낼 수 없었다.

 

실버.”

 

제 동생은 이런 일을 겪지 않아도 되어 얼마나 다행인가. 쥐어짜듯 낸 목소리로 남동생의 이름을 부른 니켈은 다시 한 번 숨을 삼켰다.

제가 두려워하는 발소리가, 문 앞에서 서성거리는 환청이 들렸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