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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D/Pokémon

월간 드림 11월호 / 네가 없는 자리



※ 월간 드림 11월 호 참가글

※ 마적 드림. 오리주 주의.




가 없는 자리

written by Esoruen




굳이 말할 것도 없지만 인간관계에서 첫인상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 사람은 시각에 크게 의존하는 동물이니 낯선 무언가와 마주치면 가장 먼저 제가 본 모습을 통해 상대를 판단하고, 그 다음으로 얻은 정보들은 제가 판단한 그 인상을 통해 해석하곤 했으니까.

물론 그걸 잘 아는 내가 굳이 남들에게 보이는 스스로의 모습을 잘 점검하느냐 하면 그건 아니지만, 뭐든지 알고 있는 것이 모르는 것 보다 나았다. 몇몇 인간들은 아는데 실천하지 않는 건 모르는 것만 못하다고 하지만, 그건 본인들이 잘 몰라서 하는 소리인게 분명하다. 최고의 악은 언제나 무지(無知). 모르는 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뜻이고, 거기다 스스로 알아가려고도 하지 않는다면 그야말로 최악 중 최악이 되는 것이다.

 

비담 씨, 괜찮나요? 역시 조금 더 쉬셔야.”

됐습니다. 꼬박 하루를 잤으니 이제 일어나야지요. 전 괜찮습니다.”

아니, 안색이 아직 안 좋으신데!”

 

아아. 귀찮게. 얼마나 내 꼴이 말이 아니면 평소엔 나랑 눈만 마주쳐도 입을 다무는 사람이 이러는 걸까. 알고만 있고 실천하지 않는 게 무지보다 낫다고 방금 주장한 나지만, 지금은 그 생각을 철회하고 싶다. 조금은 사람다운 꼴로 여기 오거나 화장품이라도 챙겨왔어야 하는 건데. 그랬으면 적어도 지금은 내 연구실로 갈 수 있었겠지. 답답함에 참으려고 했던 한숨이 절로 나왔다.

 

저기, 괜찮으세요? 여기가 아니라 큰 병원에 가야 하는 거 아닌가요?“

 

어제 쯤, 두통약을 얻어가기 위해 의무실에 온 나는 약 대신 걱정이 가득한 잔소리와 함께 강제로 침대 위로 눕혀졌다. ‘약 가지곤 안 됩니다. 주무세요. 제발. 며칠이나 밤 새신 거예요?’ 의료인의 본능, 뭐 그런 거였을까. 초췌한 내 얼굴을 보고 수면이라는 처방을 조무래기는 내가 일어나면 오열이라도 할 것 같은 눈으로 나를 필사적으로 재웠었다. 평소라면 누가 울든 말든 난 약만 받아서 나갔겠지만, 어제는 그럴 기력도 없을 정도로 머리가 아팠었지. 나는 결국 머리가 울리는 고통에 못 이기고 눈을 붙였었고, 눈을 뜨니 이미 하루가 꼬박 지나있었다.

지나간 시간은 되돌릴 수 없지. 그러니 이미 자버린 자신을 자책하진 않을 것이다. 다만, 조무래기가 아직도 내가 괜찮아 보이지 않다며 보내주지 않으려는 건 분명 내 얼굴 꼴이 말이 아니라서 그런 게 분명했으니 이 점은 자책해야겠지. ‘짙은 색 립스틱이라도 하나 발랐다면, 통과 시켜 줄 법도 할 텐데. 아깝기도 하지.’ 라고 말이다.

 

, 정 그러면! 포도당 수액이라도 한 대 맞으실래요? 그냥은 못 보내드립니다! 리더에게 혼난다고요!”

거기서 왜 리더 이야기가 나오는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진짜 몰라서 묻는 건 아니시죠?”

 

당연히 아니다. 이해는 못하지만 추측은 가능하니까.

리더 마적과 나는 평범한 상사와 부하 관계가 아니다. , 내가 쓰러지기라도 하면 리더가 가만있지 않을 것이고, 자신은 혼나는 것에서 끝나지 않고 처벌이라도 받을 것이다. 분명 이렇게 생각하는 모양인데. 도대체 어디서부터 이 잘못된 편견을 설명해 줘야 하는 걸까.

우선, 내가 아는 마적이라는 남자는 조직생활에 개인감정을 앞세울 만큼 미숙한 남자가 아니다. 그리고 난 당장 쓰러질 만큼 상태가 안 좋은 것도 아니고, 만약 쓰러진다면 그건 미뤄놓은 일들에 의한 스트레스로 화병이 나서 기절하는 것이겠지. 반박할 말은 이것 말고도 더 있지만, 일일이 말하기에는 시간이 부족하다. 난 당장이라도 일하러 가야하는데, 남을 납득시키고 있을 시간이 어디에 있는가.

 

리더 마적이 당신을 혼낼 일은 없을 겁니다. 이만 가보지요. 잘 쉬었습니다.”

, 잠깐만요! 비담 씨! 비담 씨!!”

 

뒤에서 날 부르는 목소리가 좀 처량하긴 하지만, 미뤄둔 일은 누구도 처리해 주지 않는다. 지금 하던 연구는 다른 연구원들은 처리할 수 없는, 나만 접근 가능한 일이었으니까. 애초에 다른 연구원들도 가능한 일이었다면 철야도 안했겠지만. 어쩌겠는가. 연구원 일이라는 게 다 이런 거지.

 

휴우.”

 

일단 돌아가면 커피부터 한 잔 하고, 이 개운함이 다 사라지기 전에 일을 시작하자. 조금만 더 하면 얼추 마무리되니 오늘부터는 밤샘은 안 해도 되겠지. 아직 기간은 꽤 남았으니 마무리는 천천히 해도 된다. 그렇게 되면 여유시간에 동생에게 안부도 물어보고, 미뤄둔 잠을,

 

왔나, 비담.”

……?”

 

자려고 생각했는데. 왜 리더가 내 연구실에 있는 거지?

오늘 할 일과 이후의 일정을 차근차근 정리하며 연구실로 돌아온 나는 내 자리에 앉아서 가만히 날 보고 있는 리더 마적을 보고 다시 사고가 정지되고 말았다. 머피의 법칙도 때와 장소를 가려가며 일어날 것이지, 왜 하필 내가 자리를 비웠을 때 그가 온 걸까. 그것도 그냥 자리를 비운 것도 아니고, 의무실에서 자고 온 때에.

 

왜 허깨비라도 본 표정이지?”

아무것도 아닙니다. 무슨 일입니까?”

그건 내가 묻고 싶군. 하루 종일 어디 갔었던 거지? 여기 있는 건 모두 자네 몫의 일 같다만.”

 

젠장, 망했군. 망했어. 하루 종일 여기 있었다니. 아무리 이젠 구체적인 목표도 없는 마그마 단이라지만 리더라는 사람이 24시간 가까이 본인 자리에서 이탈해도 좋은 걸까. 구열이나 호걸이 알았다면 뒤로 넘어갔겠군. 망했어, 정말.

 

의무실에 좀.”

의무실?”

. 약을 받으러 갔는데 약은 안 주고 잠이나 자라고 해서 자고 왔습니다.”

 

어설프게 변명해봐야 남는 건 없다. 애초에 그리 켕기는 일을 한 것도 아니니, 거짓말을 할 이유도 없다. 나는 모든 일을 최대한 객관적으로 설명했고, 리더는 빈말로도 밝다곤 할 수 없는 표정으로 날 훑어보았다.

하아.’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며 일어선 리더는 내 바로 앞까지 다가오더니, 다짜고짜 날 의자에 앉혔다. 혹시, 리더도 그 조무래기랑 비슷한 생각을 하는 걸까. 이쯤 되니 내가 내 얼굴을 맨눈으로는 볼 수 없는 게 안타까울 지경이다.

 

그래서, 자고 온 게 이 상태인가?”

실례입니다만 제 얼굴이 그렇게 초췌합니까?”

당장 쓰러져도 납득이 갈 정도군.”

…….”

 

그 조무래기가 과민반응을 하는 거라고 확신했는데, 아무래도 내가 잘못 생각한 거 같다. 리더는 이런 걸로는 거짓말을 하지 않으니까. 신뢰할 수 있다. 의자에 앉힌 건 좀 오버라고 느끼지만, 어차피 앉을 거였으니까 굳이 일어나진 않을 거지만.

 

지금부터 일해도 제출기간 안에는 낼 겁니다. 걱정 마십시오.”

늦어도 되니 쉬게.”

?”

늦어도 되니 쉬어라고 했네, 비담. 뭐 이렇게 말해도 어차피 자네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서류만 붙잡고 있다가 금방 끝내겠지만.”

 

과연 리더. 같이 지낸 시간이 오래 되니 이제 내 행동 패턴까지 정확하게 분석해 낸다. 나는 반박할 말을 찾지 못해 입을 다물고 어깨만 으쓱였다. 갑작스러운 호의이긴 해도, 쉬라고 한다면 나야 좋지. 물론 리더 말대로 내가 순순히 쉴 인물은 아니지만, 중요한 건 발언에 담긴 마음이다.

 

혼내시진 않는군요.”

피곤해서 쉰 거지 농땡이를 피운 건 아니니까.”

계속 여기 있었습니까?”

그래. 자네가 올 때 까지 있을 생각이었네.”

 

그렇게나 내가 걱정된 걸까. 리더는 평소답지 않게 제법 로맨틱한 소리를 했다. 내가 딱 10살만 어렸어도 감동해서 껴안아 줬을지도 모를 텐데. 지금의 나는 말 하나하나에 감동하기엔 너무 낡아버렸다.

물론 내가 낡은 만큼 리더도 낡았으니, 우리는 잘 어울리는 걸지도 모르지만.

 

도망가지도 않는데, 올 때 까지 기다리실 것까지야.”

.”

 

나는 농담으로 던진 말인데 상대방은 그렇지 않았던 걸까. 리더는 내 말에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주변을 살폈다. 혼자 쓰기엔 넓은 연구실 안. 아무렇게나 쌓여있는 서류로 어지러운 책상과 언제 누워봤나 기억이 나지 않는 1인용 침대까지. 이곳저곳을 살펴본 리더는 쓸 일이 거의 없는 보조의자를 끌어와 내 맞은편에 앉았다.

 

그런 생각은 해봤네.”

무슨 생각이요?”

자네가 없는 연구실을 보면서, 그 때 자네가 마그마 단을 나갔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

 

별일이다. 아무리 리더가 반성할 건 반성하는 성격이긴 해도 본인 입으로 인생 최고의 과오를 말하다니. 그란돈 부활. 인류에게 넓은 땅을 선물하려 했으나 결과적으로는 세상의 멸망을 몰고 올 뻔 했던 대사건. 잊을 수도 외면 할 수도 없는 일이지만, 자발적으로 꺼내기엔 무거운 이야기임에는 분명한데.

 

어디까지나 자네가 내 밑에서 일한 건 그란돈 부활을 위해서였지, 나나 인류를 위해서는 아니었으니 여기 남아있을 이유가 없었는데.”

과거형으로 말씀하고 있지만,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 일단 자네가 지금 여기 있을 이유는 없지. 자네 입장에서는 말이야. 나야 우수한 인재를 놓치기 싫으니 여기 있겠다고 해준 게 고맙다만.”

 

말끝을 흐린 리더의 시선이 내가 아닌 다른 쪽으로 향했다. ‘인재를 놓치기 싫어서. 틀린 말은 아니지만, 분명 더 좋아해야 할 이유가 있지 않던가. 본인도 알고 있으니 눈을 피하는 거겠지만 나는 굳이 그 다른 이유를 말하게 하고 싶어졌다.

 

그것뿐입니까? 제가 여기 있어서 좋은 이유는.”

아니지.”

그러면요?”

자네는 역시 날 곤란하게 만드는 걸 제일 좋아하는 것 같단 말이야.”

 

한숨 쉬는 것 같은 말투를 하고서, 눈앞의 남자는 웃고 있었다. 저런 여유로운 미소가 또 어디 있을까, 얼마 전 까지만 해도 상상도 못할 일이다.

그 사건의 전까진 그렇게나 초조해 하고, 못마땅해 하고, 안달 냈으면서. 내가 나의 의지로 자신의 곁에 남아주는 게 그렇게나 좋은 걸까.

 

가능한 한 최대한 근엄하게 있으려는 분이 제 말 한 마디에 표정을 구기는 게 좋거든요.”

꼭 좋아하는 여자애를 괴롭히는 사춘기 남자애 같은 발언인건 알고 있나, 비담?”

좋아하긴 합니다만, 리더를.”

 

크흠.’ 조금은 뻔뻔한 내 발언에 리더의 얼굴이 결국 구겨져 버렸다.

 

어쨌든, 자네가 없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가정을 여기서 기다리는 동안 해봤지만 결론이 하나밖에 안 나오더군.”

뭐였습니까? 궁금하군요.”

나는 어떻게 해서도 자네를 잡았을 걸세. 내가 여기 왔을 때 자네가 앉아있어야 할 자리가 비어있는 걸 보는 것도 어색한데, 그 상태가 계속 이어진다면 빈자리가 신경 쓰여서 아무것도 못 할 것 같거든.”

 

아까 전부터 이리저리 시선을 돌리던 리더였지만, 이번에는 제대로 내 눈을 바라보고 말했다.

아아. 저렇게 진지하게 말하면 아무리 낡고 지친 나라도 가만히 있을 수 없게 되는데. 하지만, 그런 점이 싫지 않다. 내 성질머리를 받아주면서 날 애정으로 대할 남자가 이 세상에 몇이나 있겠나. 물론, 성격 외에도 얼굴이 취향이라 좋기도 하지만.

 

전 늘 여기 있을 겁니다. 리더 마적.”

그거 고맙군.”

 

대화는 그대로 끊겼지만, 리더는 자리에서 일어서지 않았다.

편안한 침묵. 익숙한 존재감. 애틋한 체온.

평소와는 달리 옆자리가 비어있지 않은 상태였는데도 불구하고, 나는 너무나도 편안하게 미뤄둔 업무를 다시 시작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