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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D/Dungeon & Fighter

봄 드림 합작 / 입춘


※ 데스페라도 드림. 오리주 주의. 

※ 합작 홈 주소 → https://meirodr838.wixsite.com/spring




입춘

written by Esoruen




정신을 차려보니 봄이 되어있었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창문을 때리던 찬바람이 잠잠해지고, 식물이 적은 황무지에도 조금씩 푸른빛이 돌기 시작하는 시기엔, 나의 동거인에게도 긍정적인 변화가 찾아온다. 추위를 카르텔만큼이나 싫어하는 그녀는 11월 말부터 3월 초까지는 거의 시체처럼 생활하곤 했지만, 봄이 시작되는 그 순간 본인이 새싹이라도 되는 것처럼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생명력을 회복하곤 했다.

 

, 요즘 일찍 일어나네?”

? . 그러게. 흐음. 날이 따뜻해져서 그런가? 이불 밖으로 벗어나기가 쉬워지더라고.”

여전히 춥긴 하지만, 많이 나아졌긴 하지.”

 

후우. 내 말에 한숨으로 답한 루엔은 버리기 위해 테이블 위에 모아놓은 신문에 머리를 툭 걸치고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맑은 하늘, 강렬하지도 희미하지도 않은 적당한 볕. 이상적인 초봄 날씨지만, 역시 봄의 기운을 제대로 느끼기엔 부족한 점이 많았지. 여긴 무법지대. 낮과 밤의 기온차가 크고 척박해서 봄과 가을은 그저 어정쩡한 계절이 될 뿐 매력적이지 못했으니까.

 

왜 그래?”

아니. 춘곤증인가? 밥 먹고 나니 졸려서.”

그냥 일찍 일어나서 그런 거 같다만.”

아냐. 밥 먹기 전까진 안 졸렸어.”

 

그녀는 나른한 목소리로 답하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만히 있으면 계속 졸릴 거라는 걸 알고 억지로 일어난 것이겠지만, 굳이 그래야 할 필요가 있었을까. 오늘 오전은 쭉 한가하고, 외출은 해가 지고 나서야 할 건데.

이 집에선 낮잠을 잔다고 뭐라고 할 사람도 없다. 나랑 그녀, 단 둘이 사는 집이니까. 상황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우리는 서로의 눈치를 그렇게 보는 성격도 아니었고, 서로 연인으로서 예의를 지키긴 하지만 비위를 맞춰주지는 않는 관계였으니 나 때문에 저러는 것도 아닐 텐데. 그럼 역시,

 

봄이니까, 라는 건가.’

 

나는 기분파가 아니니 잘 모르지만, 루엔은 주변의 분위기에 쉽게 물드는 편이었으니 충분히 있을 법 한 이야기였다. 긴 겨울이 끝나고, 드디어 날이 풀렸다. 들짐승들도 뛰어다니고 싶어 할 시기니 자신도 최대한 움직이고 싶은 것인가. 아니 어쩌면, 제가 지독히도 싫어한 추위가 사라진 걸 기뻐하는 걸 수도 있겠지. 한겨울일 때는 나가고 싶어도 나가질 못했고, 잠도 평소보다 많이 잤으니까.

 

으음, 그러고 보니 커피가 다 떨어졌던데. 데스페라도, 별 일 없음 장보러 같이 갈래?”

 

졸린 몸을 이끌고 신문을 버리고 온 루엔은 아직 더 움직이고 싶은지 슬쩍 물어온다. 저 정도는 혼자 갔다 와도 문제없겠지만 굳이 권하는 건, 장을 빙자한 데이트가 하고 싶다는 것이겠지. 이래 뵈도 동거 년도를 꼽자면 한 손으론 부족한 기간을 살아온 사이다. 안하무인한 나라도, 이 정도 눈치는 당연했지.

 

그럴까.”

좋아, 옷 입고 나와!”

너는?”

나는 코트만 걸치면 돼!”

 

이거, 완전히 오늘 외출하려고 벼르고 있었던 거지?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올 뻔 했지만, 진짜로 웃으면 잔소리를 들을 것이다.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알겠다고 대답한 나는 코트와 모자를 챙기다가 주머니 속 담뱃갑이 상당히 가볍다는 걸 눈치 챘다. 그러고 보니, 몇 개 안 남았었긴 한데. 나간 김에 사오면 될까. 참으로 적절한 권유였다. 나는 마음속으로 그녀에게 박수를 보냈다.

외출을 결정하자마자 밖으로 나온 우리는 느긋하게 가게로 향했다. 아직 이른 시간이라 그런 것인지, 거리에는 공을 차며 뛰어노는 어린애들 정도 외에는 딱히 행인이 보이지 않았다.

 

날씨 좋다, 그렇지? 황도엔 꽃도 피었겠어.”

뭐 그렇겠지.”

조금 있으면 겨울옷은 다 넣어도 되겠다. 올 겨울은 추웠지. 괴로운 한 철이었어.”

 

확실히 그랬다. 올해도 그녀는 심한 감기를 앓았고, 수도가 얼어 물이 나오지 않을 땐 답지 않게 짜증도 심하게 냈으니까. 루엔에게 뿐만이 아니라, 나에게도 혹독한 겨울이었지.

물론 나는 더위 쪽이 300배는 더 싫지만 말이다.

 

, ! 누나!”

 

. 데구르르. 눈앞에 굴러온 조잡한 공이 루엔의 발에 부딪혔다.

아까 그 꼬맹이들의 공인가. 멀리서 보았을 땐 몰랐는데, 가까이서 보니 공이라고 하기에도 민망할 만큼 대충 만들어져있다.

 

공 좀 차주세요!”

거 조심 좀 하.”

그래!!”

 

아니, 왜 그렇게 신나서 차주는 건데. .

내가 뭐라고 할 틈도 없이 발을 움직인 루엔은 공을 차며 어린애들 곁으로 가버렸다. 방금 장을 보러 가니 마니 한 사람, 분명 내가 아니라 저 녀석 아니었던가? 황당함에 니코틴이 절로 간절해지는 순간이었다.

 

, 상관없나. 급한 일도 없고.’

 

언제나 쫓고 쫓기는 삶을 살고 있으니, 여유가 있을 땐 최대한하고 싶은걸 하게 내버려 두는 게 좋다. 그건 굳이 그녀에게 뿐만이 아니라 나에게도 해당되는 이야기였다. 나는 몇 개 남지 않은 담배 중 가장 끝에 있는 걸 골라 불을 붙였다. 재촉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지만, 이 담배가 다 타들어가기 전 까지는 와줬으면 좋을 텐데 말이지.

 

! 누나 잘 한다!”

, 내가 원래 걷어차는 건 잘하거든.”

정말? 나도 가르쳐 줘!”

나도!”

 

루엔의 주변에 몰려들어 조잘거리는 어린애들이 해맑게 웃는다. 아무리 힘들고 아무리 고되어도 쉽게 꺾이지 않는, 천진난만함이 가득한 미소였다. 나나 루엔은 절대 저렇게 웃지 못하지. 물론, 루엔은 또 다른 의미로 환하게 웃을 수 있지만.

 

봄이 오긴 왔네.”

 

아이들의 머리를 쓰다듬는 루엔의 얼굴엔 다정함이 가득한 웃음꽃이 활짝 피어있다. 메마르고 척박한 땅에서도 필 수 있는 저 꽃이야 말로, 이 무법지대의, 나의 봄의 지표겠지.

나는 반쯤 타들어간 담배의 불씨를 벽에 비벼 끄고 근처 버려진 상자 위에 앉았다. 아까까진 너무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했지만, 저 미소를 구경하며 그저 시간을 보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겨울 동안은 볼 수 없었던, 나름 희귀한 미소였으니까.

시선을 루엔에게 고정시킨 나는 등을 기대고 어깨의 힘을 뺐다. 나른한 봄볕이, 썩 나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