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데스페라도 드림, 오리주 주의
※ 합작 홈 주소 http://moonmist.wix.com/kenshi
흠뻑젖은 맑은하늘 대민폐
written by Esoruen
손상된 종이는 절대 원래 모양으로 돌아오지 않는 법이었다.
물에 젖거나, 찢어지거나, 구겨지거나. 어떤 방법으로든 손상된 종이는 영원히 그 흉터들을 간직하게 된다. 물기를 말려도 종이는 이미 울어버린 후고, 찢어진 곳을 붙여도 테이프나 풀 자국이 남는 이상 원래 모습으로 돌아갔다곤 할 수 없는 법이니까. 딱 하나, 종이를 원래대로 돌리는 방법이라곤 완전히 종이를 파괴해 종이죽으로 만들어 다시 틀로 찍어내는 것 뿐.
그러니 데스페라도는 제 인생이라는 종이가 어떻게 손상되어도, 그저 그러려니 사는 것이 마음 편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애초에, 무법지대에서 태어난 사람의 삶이라는 것이 어찌 평탄하겠는가.
태평한 소리라고 할지 몰라도 데스페라도는 제 수많은 비극과 위기가 너무나도 당연하게 느껴졌기에 아픔은 느끼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도 다 이런데 뭘 새삼스럽게. 오히려 살아남아 수많은 상처를 가지게 된 게 더 자랑스러운 것이지. 그는 종이죽으로 돌아간 수많은 사람들을 기억조차 하지 못했다. 언젠가 자신도 저렇게 죽겠지. 그렇게 죽기 싫으면, 열심히 방아쇠를 당겨야 한다. 그렇게 간단하게 생각하며 살던 그의 인생에 처음으로 긍정적인 변화가 찾아온 것은, 난생처음 생겨본 ‘동료’라는 존재에 의해서였다.
“대충 다 처리했나?”
하늘 한번 더럽게 맑네. 날씨가 아주 죽여주게 좋아.
데스페라도는 끊임없이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빈 탄창에 총알을 채워 넣었다. 분명 이 근방의 카르텔들은 다 저세상으로 보내 준 것 같지만, 무법지대에서 방심은 곧 죽음. 언제 어디서 자신을 죽이려는 놈이 나타날지 모른다는 걸 잘 아는 그는 이 세상에 자신 혼자 남는 날이 오지 않는 이상, 언제든 총을 쏠 수 있는 준비를 멈추지 않을 것이었다.
“루엔! 루엔?”
아아, 또 어디서 뭘 하기에 대답도 없는가. 그는 돌아오지 않는 대답을 찾으러 골목을 어슬렁거렸다. 설마 당했나? 그런 생각이 아주 잠깐 들었지만 곧 머릿속에서 사라진다. 당연히 무사하겠지. 누구 동료고 누구 애인인데. 비록 사귄지 이제 겨우 2년째이긴 했지만, 같이 있어온 기간으로 치면 3년이다. 뭐, 제 나이에 비하면 3년은 그다지 긴 기간이 아닌가. 어찌 되었든 데스페라도에게 에소루엔 로시스라는 여자는, 자신을 제외하고는 그 누구보다 믿음직한 존재라는 것은 확실했다.
“루엔”
얼마나 돌아다녔을까. 데스페라도는 골목길의 끝에서 익숙한 긴 생머리를 발견했다. 낡은 오크통에 걸터앉아, 목이 빠져라 하늘을 바라보는 그림자. 제 말이 들리지도 않는지 여전히 한마디도 대답하지 않는 그녀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고개를 까딱이고 있었다. ‘뭐가 저렇게 신난 거야?’ 마음 같아선 지금 당장이라도 정신 차리라며 귀를 잡아당기고 싶지만, 그러기에는 저 뒤태가 여간 사랑스러운 것이 아니다. 잠시 그 자리에 서서 고민하던 데스페라도는 결국 부드러운 방법으로 그녀의 정신을 환기시켜 주었다.
“어이”
“으악! 깜짝이야!”
살짝 어깨에 손을 얹었을 뿐인데, 뭘 그리 놀라는 걸까. 그는 자신을 보고 화들짝 놀라 소리치는 그녀가 조금 우스워 보이기까지 했다. 아, 이 경우에는 우습다는 것 보단 귀엽다는 게 맞겠지만.
“뭘 그렇게 멍하게 있어? 내가 부르는 소리도 안 들렸지?”
“불렀어?”
“얼씨구”
“미안, 미안. 그냥 날씨가 너무 좋아서 노곤해지는 게… 잠깐 하늘 좀 본다는 게 정신을 놔버렸네?”
하하하. 그녀는 아무 문제없다는 듯 웃었지만, 데스페라도는 그러지 못했다. 겨우 그런 이유 때문에, 제 말에 대답도 안 한 것인가. 뭐 죽거나 다치지 않았으니 그걸로 됐지만. 그래도 역시 마음에 들지 않았다.
갑자기 불쑥 찾아와 제 인생을 통째로 뒤집어 놓은 주제에, 저 얼마나 팔자 좋은 행세란 말인가.
물론 인생이 바뀐 것은 자신뿐만이 아니니, 이런 불평은 옳지 않을지도 몰랐다. 분명 그녀도 자신을 만나 많은 것이 바뀌었고, 지금도 바뀌고 있었으니까. 평생 총질밖에 모르던 계집애가 사랑이라는 걸 알게 되었으니, 내면이 얼마나 다이내믹하게 바뀌고 있겠는가. 그리고 그건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자신도, 데스페라도라는 남자도 분명 루엔을 만나기 전까지는 사랑이라는 것을 몰랐으니까.
여자란 기본적으로 소모품. 필요성을 느끼지도 못하고 오는 여자는 안 막지만 갈 때도 잡지 않는다. 어차피 제 겉모습이나 강함에 눈이 멀어 꺅꺅거리는 계집들 따위, 쓰레기장에 모여드는 까마귀나 똑같았다. 제가 필요한 만큼 즐기다가 가겠지. 여자들이란 다 그렇지. 그렇게 생각하던 때가 분명 있었는데.
루엔은 그에겐, 여자라기보다는 무법자 중 한명일 뿐이었기 때문일까. 처음 만나서 같이 다니게 된 순간까지, 그에게 루엔은 10대 후반의 풋풋한 계집애가 아닌 무법지대의 악몽이었다. 자신만큼은 아닐지 몰라도 이렇게 강하고 전력이 된다면 같이 다녀도 나쁘지 않을 것 없지. 그런 안이한 생각으로 함께 1년을 지내는 동안, 그녀는 ‘여자’를 경계하는 자신을 알고 ‘무법자’의 신분으로 마음속에 들어와, 온갖 것들을 헤집어놓았다.
유대라는 감정을 가르쳐주고, 엉망진창인 마음을 정돈해놓는다. 그러다가 아예 잊고 있던 상처를 건드리기까지 하며, 천천히 제 마음속을 다 파악한 그녀는 결국 엉망진창이던 그의 종이에 처음으로 평화를 가져와 주었다. 루엔이라면, 이 여자라면 연애도 나쁘지 않겠지. 그렇게 시작된 연애도 벌써 2년째.
후우. 길게 한숨을 내쉰 그는 눈부신 햇빛을 가리기 위해 손을 들었다.
“돌아가자. 날이 이래서야 밖에서 조금만 더 있으면 그대로 말라 죽겠어”
“에, 그러지 말고. 우리 놀러가자. 놀러”
“무슨 소리야?”
“아깝잖아! 이렇게 좋은날에!”
역시 이 녀석은 알다가도 모르겠어. 데스페라도는 너무나도 해맑은 루엔의 표정에 할 말을 잃었다. 이 녀석, 분명 더위에 강하긴 했지만 이런 날씨에도 팔팔한 건가. 더위에 약한 그는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구름 한 점 없는 이 맑은 날씨가 그다지 달갑지 않았다. 분명, 그녀와 같이 다니기 전이었다면 볼일만 후딱 보고 집에 틀어박혀 쉬었겠지.
“…어디로 놀러가게?”
억지로 따라가 주는 것은 아니었다. 물론 강제성을 느끼지 못했냐고 하면 부정할 수 없지만, 그는 제 인생의 구김살을 조금이라도 펴준 여자와 시간을 보내는 것이 싫지 않았다. 꺼려지는 일이라도, 하다보면 괜찮아지는 법. 뭐든 익숙해지냐 아니냐의 차이였지. 담배도, 연애도, 뭐든지 하다보면 느는 법이었다.
“음, 글쎄?”
“무작정 말하고 본 거였냐”
“방금 막 생각해 낸 거니까, 어쩔 수 없잖아? 흐음, 바다 보러 가고 싶다”
“…가끔 생각하는 건데 말이야, 넌 이상한 곳에서만 스케일이 커”
여기서 바다를 보려면 해상열차가 있는 곳까지 가야 할 텐데, 아마 가는 데만 날이 다 저물어 버릴게 뻔했다. 물론 ‘보러 가고 싶다’지 ‘보러가자’가 아니었지만, 데스페라도의 입장에서는 저런 발상을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가 그렇게 생각하기 무섭게, 루엔이 폭탄발언을 던졌다.
“보러 갈까?”
“…어?”
“가자. 지금 가면 밤에는 도착하겠지”
“어이, 이봐?”
혹시 이 녀석. 제 생각을 읽기라고 한 건가. 담배를 꺼내 물려던 그는 얼빠진 표정으로 제 연인을 보았다. 설마 뭐, 서당 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더니 자기랑 같이 산지 3년이면 텔레파시라도 통한다는 건 아니겠지?
“진심이야?”
“내가 농담으로 이러겠어?”
“……”
“뭐 어때, 애초에 떠돌이 인생. 하루정도 일탈한다고 아무 일도 안 일어나”
확실히 그건 사실이었다. 애초에 집도 따로 없고, 안전을 위해 한 달에 한번은 거처를 옮기는 자신들이었으니 갑자기 은신처가 아닌 곳에서 잔다고 세상이 무너질 리도 없었다. 다만, 데스페라도는 이 갑작스러운 외출이 너무나도 놀라울 뿐이었다.
분명, 자신 혼자 살아갔다면 평생 있을 수 없는 이벤트겠지.
그런 생각이 들자 어째서일까, 데스페라도는 이 일탈이 조금 재밌어지기 시작했다.
“그래, 가자”
“진짜? 갈 거지?”
“자기가 가자고 해놓고 뭘 두 번 확인하는 거야? 일어나, 가자”
호오. 작은 감탄사를 내뱉은 루엔은 싱글벙글 웃으며 앞서나가는 그를 따라나섰다.
“그럼 저녁은 어떻게 할까? 굶긴 싫은데”
“거기서 대충 때우면 되는 거지”
“그건 그렇지만. 흐흐”
“그렇게 좋냐?”
“응. 좋아”
데스페라도랑 같이 라면 어디든 좋아.
그녀의 말이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 울려 퍼졌다.
걷는 일에는 익숙해져있다 해도, 역시 이런 날씨에 쉬지 않고 걷는 것은 힘든 일이었다. 다행인 것은 머리 꼭대기에 떠있던 해가 지금은 제법 위치가 낮아져, 햇볕이 많이 약해졌다는 정도일까. 아직 노을은지지 않았지만, 그림자는 제법 길어진 오후. 데스페라도는 아직도 갈 길이 멀다는 사실에 지쳐 결국 그 자리에서 멈춰 섰다.
“안 피곤하냐?”
“응? 아니 별로”
이런 젠장. 피곤하다고 하면 쉬려고 했더니. 데스페라도는 전혀 지쳐 보이지 않는 그녀의 낯짝에 한숨을 쉬었다. 평소에도 늘 싸우고, 돌아다니고, 쫒아 다니는 자신들인데. 이 정도에 피곤할리 없지. 자신도 지금 체력적으로는 그다지 피곤하지 않았으니, 그가 기대한 피로는 어떻게 보면 정신적인 문제에 가까웠으리라.
“데스페라도야 말로 피곤해? 지금이라도 돌아가?”
“됐어. 네 걱정해준 거지 내 걱정 해달라는 거 아니니까”
“헤에, 그래? 피곤해 보이는데?”
“웃기지 마, 너도 이렇게 쌩쌩한데 내가 지치겠냐?”
그 말에는 딱히 비하하려는 의도 같은 건 들어있지 않았다. 애초에, 자신의 여자를 까 내리는 멍청한 남자가 세상 어디에 있는가. 만약 있다 해도 그게 자신은 아니었다. 데스페라도는 그저, 그녀 못지않게 만만찮은 삶을 산 자신이, 구겨지고 찢어지고 울어버린 제가 이정도도 못 견딜 리가 없다는 뜻으로 한 말이었을 뿐이다.
옛날에는. 아주 옛날에는 이것보다 더 필사적으로 걸었던 적도 많았지.
살기 위해서, 혹은 죽이기 위해서. 지금은 이렇게 커버린 자신이었지만, 그에게도 분명 어린 시절이란 존재했다. 지금보다 약하고 깨끗한 종이를 가졌을 그 소년은, 언제나 살기 위해서 하루 종일 달려야 했고 누구라도 죽일 수 있어야 했다. 뭐, 지금도 별로 다를 건 없지만 옛날처럼 살기 위해 아등바등 거리는 게 아니라, 죽이기 위해 바쁘게 뛰는 거니 마음은 훨씬 여유로웠지만. 본디 세상은 도망치는 토끼보단 쫒는 늑대가 더 마음 편한 곳이었으니까.
‘그때에 비하면’
지금은 아주 좋아졌지. 후우. 담배연기를 제 머리 위로 내뱉은 그의 앞으로 긴 생머리가 나부꼈다.
제가 멈춰서기 무섭게 자신을 앞질러간 그녀는 춤이라도 추듯 빙글, 자신을 향해 돌아서서 손을 뻗었다. 잡으라는 건가. 아니면? 제가 잠시 망설이는 시간도 아까웠던 걸까, 루엔은 곧바로 멍하니 선 그의 손목을 낚아채더니 앞으로 나아갔다.
“쉬는 건 도착한 후에 해도 안 늦어! 가자!”
“…거 오늘따라 되게 보채네”
만약 다른 사람이 이랬다면, 자신은 어떻게 대했을까.
깊게 생각할 것도 없었다. 아마 바로 놔라며 발길질을 하던 총을 쏴버리던 공격부터 했겠지. 애초에 다른 사람과 같이 다니지도 않는 그지만, 누가 자신을 잡아끈다는 건 상상만 해도 불쾌한 일이었다. 마치, 잡혀가는 것 같아서 짜증나지 않는가.
하지만 루엔이라면 예외였다. 3년이나 같은 공간에서 자고, 먹고, 생활해서 그런 걸까. 아니면 처음 생긴 동행이자, 유일하게 연인이라고 부를만한 관계까지 간 여자라 그런 걸까. 루엔이 하는 그 모든 행동은 데스페라도에게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거나, 이미 얼룩져있던 의미를 씻어주곤 했다.
마치, 그러기 위해 제게 온 사람처럼.
루엔과 함께 있으면, 제 인생의 구김살들은 전부 사라지는 것 같았다. 죽지 않는 이상 사라질리 없는 흔적들을 잊을 수 있는 것은, 분명 그 위에 덧칠되는 그녀의 색이 너무나도 강렬하기 때문이리라. 그 위에라면 무엇을 덧그려도 티가 나지 않을 , 그 머리칼과 닮은 검정색.
그는 그 새까만 색이 덮어주는 인생이라면, 어떤 잘못을 저지르며 나아가도 아픔을 잊을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날씨 한번 좋네”
이제 슬슬 노을이 지려는 하늘을 향해, 그가 소리를 내었다.
웃을 줄도 모르던, 도망치기 바쁜 삶을 살던 그 작은 소년은 어디 간 걸까. 그는 자신도 모르게 자연스럽게 지어지는 미소의 원인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이런 것 까지 가르쳐 주진 않아도 되었을 텐데 말이지’ 그녀에겐 들릴 리 없는 중얼거림이, 담배연기와 함께 흩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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