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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D/Dungeon & Fighter

드림 CC합작 / 연애소설


※ 데스페라도+제너럴 양날개 드림, 오리주 주의

※ 합작 홈 주소 → http://sgy950.wix.com/campuscouple

 

 

 

연애소설

written by Esoruen

 


 

캠퍼스에서 소문난 미남이 같이 점심 식사를 하지 않겠냐고 제안했다. 마치 하이틴 소설 같은 상황에 루엔은 도대체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감도 잡지 못했다. 혹시 제가 꿈을 꾸고 있는 걸까. 그런 생각도 해봤지만 역시 이건 현실이었다.

 

“저, 그러니까. 뭐라고요?”

“밥 사줄게 가자고. 왜, 싫어?”

 

싫을 리가 있나. 단지 믿기지 않을 뿐이다.

이런 말을 하는 건 자기비하라고 할 지 모르겠다만, 루엔은 스스로가 그다지 눈에 띄는 여자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얼굴은 나쁘지 않은 편이라고 생각하고, 딱히 모난 곳도 없지만 제가 잘난 것과 눈에 띄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예를 들어, 민들레는 확실히 아름다운 꽃이지만 길가에 피어있어도 그다지 눈에 띄는 꽃은 아니지 않는가. 그런데 어째서, 저 학교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눈에 띄는 남자가 제게 식사요청을 한단 말인가.

데스페라도, 라고 하던가. 제 눈앞에서 대답을 기다리는 저 남자는 연극영화과에서 유명한 3학년 선배였다. 신입생에 다른 과인 자신도 알 정도로 유명하다면 보통 여러 경우가 있겠지만, 그의 경우에는 외모와 배경이었다. 배우 지망생 아니랄까봐 곱상하게 생긴 외모에 매력적인 목소리, 게다가 큰 키까지. 굳이 취향이 아니더라도 ‘어머, 좋은 남자’ 라며 한번쯤은 뒤돌아 볼만한 남자. 그게 데스페라도였다. 심지어 '집에 돈이 많아서 배우를 꿈꾸는 것도 취미생활 같은 거라더라'라는 소문이 돈다면, 주목을 안 받을 수가 없겠지. 그런데, 그렇게 잘나가는 남자와 자신 사이에 무슨 인연이 있다고 일이 이렇게 된 것이란 말인가. 루엔은 어색하게 시선을 돌렸다.

 

“제, 제 이름은 아세요?”

“모를 리가. 로시스 아닌가? 아, 루엔이라고 부르라고 했던가?”

 

그걸 기억하고 있냐! 속으로 외친 그녀의 뺨으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그래, 사실을 말하자면 두 사람 사이에는 접점이라고 할까, 인연이라고 할 만한 사실이 하나 있었다. 연극영화과와 문예창작과. 서로 다른 과를 다니는 두 사람은 수요일 5교시에 같은 교양을 듣고 있었다, 과목 이름이 분명 철학의 이해였던가. 모두가 질색할만한 이름답게 그 강의는 반 이상이 조는 악명 높은 수면강의였고, 교재조차도 제대로 챙겨오지 않는 학생이 많았다.

그래, 포인트는 ‘교재도 챙겨오지 않는’ 부분이다.

두 사람의 인연은 3주 전, 그 악독한 수면 강의 시간에 생겨났다. 평소라면 교재를 보라고도 하지 않고, 밑줄을 그으란 소리는 더더욱 하지 않는 교수가 그날은 뜬금없이 중간고사에 낼 것이라며 책에 밑줄을 그으라고 했고, 양심이란 것이 있어 책을 들고 다녔던 루엔은 열심히 교재에 형광펜을 그었다. 그러던 와중, 옆구리를 찌르는 손에 놀란 그녀는 페이지를 넘기다 말고 시선을 돌렸고, 그대로 굳어버렸다.

 

“야”

 

분명 비어있었던 제 옆자리엔 어느 틈에 온 것인지 커다란 남자가 앉아있었다. 쥐도 새도 모르게 다가온 것도 충분히 놀랍지만, 루엔이 정말 놀라서 굳어버린 건 그 남자가 신입생들 사이엔 모르는 사람이 없는 캠퍼스의 미남이기 때문이었다. ‘네?’ 소리 죽여 대답한 루엔은 대뜸 공책을 올려놓고 펜을 꺼내는 그의 행동을 바라보는 것 밖에 할 수 없었다.

 

“나 이번에도 F 받으면 진짜 망하거든? 좀 베끼자”

“아, 네. 뭐…”

 

그런 거라면 상관없겠지. 루엔은 그를 배려해 평소보다 조금 늦게 페이지를 넘겼고, 밑줄을 긋는 속도도 조절했다. 하지만 그냥 펜을 긋는 것과 베껴 쓰는 것이 속도가 비슷할 리가 없는 법. 강의가 끝나도록 페이지를 다 베끼지 못한 데스페라도는 망했다는 듯 혀를 찼다.

 

“아 망했네…”

“저, 그냥 빌려줄까요? 책. 다음 주에 돌려주시면 되는데”

“그래도 되는 거냐?”

 

어차피 시험까지는 여유가 있었고, 하루 전날부터 공부할 거였으니 상관없었다. 루엔은 흔쾌히 책을 빌려줬고, 데스페라도는 혹시 모르니 제 이름과 학과를 알려주며 그녀의 정보도 물었다.

 

“에소루엔 로시스에요. 문예창작과 신입생입니다”

 

그래, 정말 딱 저렇게만 가르쳐 줬는데. 루엔이라는 애칭은 어디서 주워들은 걸까. 아니, 생각해 보니 별로 놀라운 건 없었다. 그 교양을 듣는 같은 과 동기들이 자신을 루엔이라고 부르는 것을 들었을 수도 있고, 그 동기들에게 제가 ‘그냥 루엔이라고 부르라니까~’라고 투정하는 걸 들었을 수도 있으니까.

중요한 건 그래, 일주일 뒤 멀쩡하게 책도 돌려준 이 남자가 왜 거기서 일주일이 지난 이제에 와서야 이런 식사요청을 한단 말인가. 보통은 책을 반납하면서 묻지 않나? 아니면, 또 책을 빌리려고 이러나?

혼란스러워 하는 그녀를 대신해, 데스페라도는 웃으며 해답을 내놓았다.

 

“너, 책 뒤쪽 안 봤지?”

“네? 제 책이요?”

“그래. 내가 빌려간 거”

 

솔직히 강의 시간이 아니면 펴보지도 않고, 펴도 진도가 나갔던 부분만 보니 뒤쪽이라면 볼 일이 없다. 고개를 끄덕인 그녀는 지금에라도 책을 펴보려다가, 그의 대답에 숨이 멎고 말았다.

 

“그럴 줄 알았어, 봤으면 연락을 안 할리가 없지”

“네?”

 

설마. 루엔은 밤 10시의 월화드라마 같은 내용을 떠올리며 고개를 저었다. 설마, 메모라도 남겨놓았다던가. 그리고 그 메모가 그의 전화번호라던가. 그런 것은 아니겠지?

불길한 예상은 대부분 맞아떨어지는 법. 데스페라도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뭐, 음. 좋아. 이해해 주지. 밥 한 끼 사겠다는 제안이 아니라 다른 제안이라도, 못 봤다면 거절할 수도 승낙할 수도 없었을 테니까. 그렇지?"

“죄, 죄송합니다”

“아냐. 표지에 안 써놓고 뒤에 써놓은 내 잘못이지. 그래서… 대답은?”

 

아니, 그걸 꼭 들어야겠는가. 얼굴이 빨개진 루엔은 겨우 고개를 끄덕였다.

 

“저, 저야 좋죠”

“좋아, 그럼 가자고 루엔. 이 뒤에 강의는?”

“없는데... 데스페라도 씨는요?”

“그냥 선배라고 해. 없어. 잘 됐네. 가자”

 

정말 선배라고 불러 되는 걸까. 진짜로 하이틴 소설 같이 굴러가는 전개에 루엔은 눈앞이 아찔해 졌다. 아, 교수님. 대학 생활은 글이 잘 나올 만큼 스펙터클하다더니 정말이었군요. 그녀의 한탄은 마음 속 전공교수님 외엔 아무도 들어주지 않았다.

 

 

❋ ❋ ❋

 

 

“어라, 엔. 얼굴이 왜 그래? 피곤해 보이는걸…”

“어…? 그래?”

 

어떻게 알았지. 루엔은 제대로 자지 못해 퀭해진 눈을 비볐다. 어제는 아주 엄청난 일이 있어서 제정신이 아니었고, 집에 돌아와서도 잠들지 못했다. 뭐, 피곤했을 뿐 절대 기분 나쁘거나 불쾌한 일이 아니었으니 이 정도인 거지만.

 

“별거 아냐. 어제 집에 늦게 들어갔거든”

“아하. 난 또. 과제하느라 늦게 잔건가 했는데”

“하하… 하하하…”

 

그러고 보니 과제, 아직 시작도 안 했었지. 어쩔 생각인 걸까, 자신은. 마른세수를 하고 고개를 든 그녀는 제 옆에서 자신을 상냥한 눈으로 보고 있는 동기에게 물었다.

 

“제너럴은 했어? 과제”

“아직 하는 중이야. 잘 안 써져서 고민 중이지만”

 

‘엄살은’ 좀 너무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그녀는 감히 제너럴의 말에 그런 생각을 하고 말았다. 어차피 같은 동기끼리 실력차이가 있어야 얼마나 난다고, 라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세상은 잔인해서 재능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의 차이는 어지간해선 좁혀지지 않았고, 천재들은 범재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을 말이다.

제 동기인 그는, 흔히 말하는 천재에 가까운 남자였다. 동기들도, 선배들도, 심지어 교수들도 인정하는 우등생. ‘이렇게 잘 쓰는 놈들은 얼마나 좋을까’ 그녀는 교수가 처음으로 제너럴의 과제를 보고 중얼거렸던 그 말을 잊을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녀도, 교수와 똑같은 생각을 했으니까.

 

‘그런 녀석이, 어쩌다가 나랑 친해진 거지?’

 

어제 데스페라도에게 식사 약속을 받아낸 전적이 있는 그녀라지만, 사실 루엔은 어제의 데이트보다 제 옆의 동기가 어째서 자신과 친해진 것인지가 더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거, 네가 쓴 거야?’ 첫 번째 과제를 돌려주던 그 날, 교수의 채점과 평가가 적힌 과제들을 돌려주던 제너럴은 제 글을 돌려주러 와서 그렇게 물었다. 아직 이름을 다 못 외우는 걸까. 아니면 확인 차 물어보는 걸까. 과제 맨 앞에 쓰인 제 이름과 학번을 확인한 루엔은 고개를 끄덕였고, 과제를 돌려받으려다 다가온 손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괜찮으면, 나 이거 읽어봐도 될까?”

“어? 내 과제?

“응”

 

갑자기 자신의 과제는 왜? 다른 사람도 아니고, 제너럴이 저런 말을 꺼내다니. 교수님에게 과제를 제출할 때 보다 더 긴장한 그녀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 내일 돌려줄게’ 단정한 얼굴과 어울리는 상냥한 미소를 지은 그는 그대로 제 과제를 들고 가버렸다.

설마 보고나서 ‘시시하다’ 라던가 ‘이게 뭐야’라는 말을 하진 않겠지? 제너럴이 그럴 사람이 아닌 건 알았지만 루엔은 괜히 긴장이 되어 마른침만 삼킬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게 어찌된 일일까. 다음 날 그녀를 찾아온 제너럴은 어린아이처럼 들뜬 얼굴로 재잘거렸다.

 

“재밌다, 이거. 결말을 이렇게 정한 이유가 따로 있어?”

“에? 재미있다고? 어, 어어…”

 

보통은 ‘잘썼다’나 ‘별로다’라고 평가해 주지 않던가. 감상 보다는 평가가 익숙해져버린 그녀에게, 제너럴의 평가는 어떤 의미에선 충격과도 같았다. 제일 기계적인 평가를 할 것 같은 사람이, 가장 순수한 감상평을 주다니.

 

“괜찮으면 다른 글도 볼 수 있어? 아, 이건 실례인가. 아, 괜찮으면 내 글도 읽어봐 줄래?”

“…나야 고맙지만…”

 

내 글이 어디가 좋다고 이러는 거야, 이 녀석은.

이해는 가지 않지만, 나쁘진 않은 기분이다. 누군가 제 글을 좋아해준다는 건 기분 좋은 일이었으니까. 사소하다면 사소하고, 엄청나다면 엄청난 이 일을 계기로 두 사람은 급속도로 친해졌고, 중간고사를 앞둔 지금은 단짝이라고 할 만큼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그런데 어쩌다 늦게 들어간 거야? 보통 학교랑 집 외엔 잘 안다니면서”

“아아, 누가 같이 밥 먹자고 해서 나갔다가, 술도 한 잔 하고 하다 보니…”

“술까지? 누구랑 놀러갔다 온 거야?”

“어어, 연극영화과 선배랑?”

 

아. 제너럴은 짧은 한숨과 함께 대화를 멈췄다. 같은 과에서도 자신 외의 동기와는 이야기도 잘 하지 않고, 선배는 더더욱 모르는 그녀가 다른 과 선배랑 늦게까지 같이 다녔다고?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린 그가 다시 한 번 물었다.

 

“연극영화과?”

“응. 어어, 그… 우리 같이 듣는 그 교양 있잖아? 거기서 알게 된 선배… 왜 있잖아, 되게 잘생겨가지고 과 여자애들이 자주 말하는”

“아, 그 사람…”

 

확실히 유명하긴 유명한가 보구나. 루엔은 대략적인 설명만으로 누군지 알아듣는 그를 보고 새삼 데스페라도가 대단하게 느껴졌다. 역시 잘생긴 건 재산이라더니, 아니, 그 이전에 연기도 잘 하니까 그 외모가 빛을 발하는 건가.

 

“뭐 그냥 밥만 먹고 술만 마시고 온 거지만. 전에 책 빌려준 게 고맙다고 한턱 쏜다는데 거절할 필욘 없을 것 같아서”

“그렇구나, 응”

“그런데 진짜 잘생기긴 했더라, 난 과 애들이 하도 뭐라고 해서 어느 정도인가 했는데, TV에 나오는 연예인들이 오징어로 보여서 어제 하루는 아무것도 안 봤어”

 

평소 같으면 이런 농담엔 살갑게 웃어 주었던 제너럴인데, 오늘은 이상하게도 입을 꾹 닫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런, 이번 농담은 별로 재미없었나?’ 저절로 자신까지 입을 닫은 루엔은 교수님이 들어오는 걸 보고 조용히 교재를 폈다.

 

 

오늘 수업이 두 개 뿐이라는 것이 이렇게 고마웠던 적이 있었나. 피곤한 몸을 이끌고 강의실을 나온 그녀는 아무렇게나 가방을 들쳐 메고 제너럴을 기다렸다. 원래 공부 잘하는 놈이 더한다더니. 교수님께 물을 게 있다며 아직도 강의실에서 나오지 않는 제너럴덕분에 복도에 우두커니 서있던 루엔은 핸드폰을 열었다.

 

“응?”

 

부재중 통화 1건. 수신자 번호도 확인하지 않았지만, 어쩐지 이 통화가 누구에게서 온 건지 알 것 같은 건 왜일까. 그래도 혹시 몰라 발신자를 확인하려는 순간

 

“너 왜 전화 안 받아?”

“으악!”

 

제 뒤에서 불쑥 나타난 얼굴은 불만이 가득한 눈빛으로 자신을 훑어보고 있었다. 역시나.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린 루엔은 어제 지겹도록 본 잘생긴 얼굴을 향해 웃어보였다.

 

“바, 방금 강의 끝났는데요?”

“아, 그런 거였냐?”

“그것보다 선배…는 어쩐 일이에요? 수업 없어요?”

 

역시 아직은 선배라는 말이 어색하다. 고등학교 때도 불러 본 적이 별로 없는데, 설마 대학에서 선배라고 부를 남자가 생기다니. 게다가 그게 다른 과의 남자라니. 인생이란 참으로 기구한 법이었다.

 

“난 조금 뒤. 너 원래 연락을 그렇게 잘 씹냐?”

“그런 건 아닌데, 수업 중엔 안 받죠”

“성실하네. 생긴 것처럼”

“그거 반어법이에요, 아니면 진심이에요?”

“글쎄다?”

 

원래 표정을 감추는 게 능숙한 걸까. 아니면 학과가 학과인 만큼 이것도 다 연기인 걸까. 속을 읽을 수 없는 표정으로 자신을 지그시 바라보는 청록색 눈동자에 어쩐지 부끄러워진 그녀가 고개를 돌려버렸다.

 

“어쨌든, 무슨 일이에요?”

“그냥 어제 잘 들어갔나 싶어서 전화해 봤다만. 안 받아서 와본 거고”

“…그게 다에요?”

“그렇다면?”

 

그런 실없는 이유로 여기까지 왔단 말인가. 이걸 타박해야 할지 좋아해야할지 애매한 상황에서 그녀를 구해준 것은 그토록 기다리던 동기였다.

 

“엔?”

“아, 왔어?”

“미안, 이야기가 좀 길어져서…”

 

다정한 얼굴로 대답하던 그가 갑자기 말을 멈춘 건, 루엔 옆에 딱 붙어있는 낯선 남자와 눈이 마주쳤기 때문이었다. 아니, 낯설다고 하기엔 이미 알고 있는 사람이니 말이 이상해져 버리려나. 몇 번 강의실에서 마주치고, 또 몇 번은 여자 동기들의 가십으로 들어온 그 남자는 별로 곱지 않은 말투와 시선으로 제게 물었다.

 

“뭘 봐?”

“네?”

“야, 네 동기냐?”

“아, 네. 뭐… 친구인데요?”

 

‘그래?’ 루엔의 대답에 느리게 숨을 내뱉은 그가 제너럴을 힐끔 보고 물러섰다.

 

“슬슬 강의시간이라 간다. 다음부턴 연락 제대로 받아”

“그러지 말고 문자해요, 문자!”

“그러던가”

 

‘나 참’ 제 마음대로 왔다가 불쑥 가버리다니.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한숨을 내쉰 루엔은 제너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 미안. 갈까?”

“…응, 가자”

 

어라. 어쩐지 아까 전 보다 표정이 안 좋아 진 것 같은데, 제 착각일까. 확 가라앉은 제너럴의 표정에 말을 걸려던 그녀는 쓸데없는 말은 독이 되는 것을 잘 알았기에 애써 입을 닫았다.

 

 

❋ ❋ ❋

 

 

그리고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중간고사가 바로 다음 주로 다가와 다들 다급히 공부를 시작하고 있는 도서실, 루엔은 책상에 앉아 공부를 하지 않고 이 책장 저 책장을 오가며 책들을 둘러보고 있었다. 주로 둘러보는 곳은 소설 쪽. 고전부터 최근에 나온 서적까지, 이것저것을 꺼내고 살펴보던 그녀는 결국 절망적인 표정으로 벽에 기대었다.

 

‘역시 모르겠어!’

 

이대로라면 성적이 어떻게 될지 모른다. 루엔의 얼굴에 짙은 그림자가 드리우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시험공부는 그럭저럭 해놨으니 상관없었다. 다만 지금 그녀를 괴롭게 하는 것은, 중간고사 대신 과제제출로 점수를 주겠다고 한 필수과목의 과제가 잘 되지 않는다는 것이었으니까. 사실 글을 쓰는 것 자체는 언제나 고통의 연속이니 새삼스러울 것이 없었지만, 그녀가 고민하는 이유는 글의 내용 때문이었다.

 

‘자네는 너무 진지한 글만 쓴단 말이지, 아니 나쁘다는 건 아니지만… 연애소설 같은 건 못쓰나?’

 

언제나 그녀의 글을 봐온 교수님은 웬일인지 다른 학생들에겐 별다른 소릴 하지 않았으면서, 루엔에게만 특별한 주문을 해왔다. ‘뭐든 좋으니, 연애하는 이야기를 써 봐. 그러면 점수를 더 잘 줄게’ 점수를 잘 준다는 말에 넘어간 그녀는 덥석 그 제안을 승낙하긴 했지만, 막상 써보려고 하니 손은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미치겠네, 정말”

 

참고로 읽어본 글들은 모두 달달했지만 그것 뿐, 제 연애세포를 살려주진 못했다. 아아, 어쩌란 말인가. 이 나이까지 연애를 못해본 제 잘못이 제일 크다곤 해도, 이건…

 

“미치면 안 되는 거 아니냐? 루엔”

“헉!”

 

갑자기 옆에 다가온 목소리 때문에 소리를 지를 뻔 했던 그녀는 급히 제 입을 막았다. 이렇게 갑자기 다가오는 건 제가 아는 선에서 단 한명 뿐이지. 두근거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고개를 든 눈에 비친 것은 장난스럽게 웃는 잘생긴 얼굴이었다.

 

“가, 갑자기 나타나지 마요. 놀랐잖아요?”

“이제 슬슬 익숙해 질 때도 되지 않았냐? 뭐 하고 있어? 공부보다 책?”

“과제 때문에… 선배는? 공부 하러 왔어요?”

“아니, 너 찾으러”

 

아. 또 저런 농담. 루엔은 아무렇지 않게 드라마에서 나올 법한 말을 내뱉는 그가 얄미워 입이 불쑥 튀어나오고 말았다. ‘쯧’ 데스페라도는 가볍게 혀를 차고 삐죽 튀어나온 입을 검지로 꾹 눌렀다.

 

“거 표정 관리 좀 해라. 나도 뭐 좀 빌릴 책이 있어 온 거니까. 가려는데 네가 보여서”

“무슨 책이요? 시험공부는?”

“공부의 일종이야, 이것도”

 

‘너도 힘내라고’ 가볍게 볼을 찌르고 자리를 떠나는 그는 뭐가 그리 즐거운지 시야에 사라지는 동안 미소를 잃지 않았다. 얄밉다. 얄밉다 못해 한 대 때려주고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싫지 않은 건, 다 저 잘생긴 얼굴 때문일까.

 

‘…어’

 

이거, 나쁘지 않을지도.

데스페라도의 뒷모습을 떠올리며 작은 소리로 중얼거리던 그녀는 기껏 고른 책들을 모두 반납대에 올려놓고 도서관을 나갔다. 그래, 세상에는 겪어본 일로 쓰는 글이 제일 잘 써지는 법이었지. 머릿속으로 글을 구상해나가는 그녀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여어, 과제는 잘 되어가?”

 

수면강의, 아니, 데스페라도랑 유일하게 같이 듣는 그 교양 강의의 시험 날. 밤새 과제로 제출할 글을 쓰고 시험을 치러 온 루엔은 제 옆자리에 앉으며 그렇게 인사하는 그의 얼굴에 무슨 반응을 보여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평소라면 ‘그러는 선배는 공부 많이 했어요?’ 라고 물었겠지만, 글에 너무 몰입하며 살았기 때문일까. 평소와는 달리 얼굴부터 빨개진 루엔은 허겁지겁 교재와 공책을 꺼내며 아무 대답이나 했다.

 

“뭐, 그럭저럭요”

“그럭저럭? 애매한 대답인데”

“글은 원래 쓴 본인은 재밌는지 어떤지 잘 몰라요. 외울 정도로 보게 되니까”

 

확실히, 맞는 말일지도. 다른 과의 이야기지만 어떤 느낌인지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그가 새 책이나 다름없는 교재를 폈다.

 

“시험공부는?”

“할 만큼만 했어요. 어차피 이 강의, 오픈 북 시험이잖아요?”

“1학년이 배짱도 좋다?”

 

장난스럽게 웃는 그의 목소리가 간지럽다. 아아, 이게 다 글 때문이다. 어쩌다 저 남자랑 자기를 모티프로 삼아 글을 쓰겠다고 생각한 걸까. 막상 글은 잘 써지고 있어서 후회는 하지 않았지만, 이래가지곤…

 

“뭐, 잘 쳐라. 벌써 F로 도배하면 힘들어진다”

 

쉬는 시간이 끝나고 교수가 들어오자 시험은 곧바로 시작되었다. 오픈 북 시험이라 해도 시험인 이상 긴장감이 도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법. 루엔은 필기한 것을 열심히 종이에 베끼며 시간을 체크했다. 얼른 돌아가서 글을 마무리 해야지. 모래까지 제출해야 하니까. 돌아가는 길에 에너지 드링크도 사고, 그래도 졸리면 운동장이라도 뛰고…

 

‘다 했다!’

 

순식간에 답안지를 채운 그녀는 교수에게 답안을 제출하고 교재만 챙겨 급히 나갔다. 제너럴은 아직 시험을 치고 있었지만, 과제 때문에 먼저 간다고 아까 말해뒀으니 괜찮겠지. 그것보다 그녀가 신경 쓰이는 것은, 제 옆에 앉은 데스페라도에 대한 것이었다.

 

‘솔직히, 나보단 선배가 더 말아먹을 것 같은데. 이 과목’

 

뭐 그래도 3학년이니, 벼락치기 요령 같은 거라도 있겠지. 제가 필기도 빌려줬었고. 아마 괜찮을 것이다. 아니, 애초에 왜 자신이 그를 이렇게 걱정하고 있단 말인가.

이게 다 그놈의 글 때문이지. 스스로의 머리를 가볍게 쥐어박은 그녀는 급히 집으로 돌아갔다.

 

 

“응?”

 

거의 마지막으로 답안을 제출하고 강의실을 나가려던 데스페라도는 제 옆자리에 놓인 노트에 발을 멈췄다. 저 자리는, 분명 루엔이 앉았었지. 급하게 나간다 싶더니 설마 노트를 두고 갈 줄이야. 성실하게 생긴 주제에 이런 나사 빠진 행동을 해버린 그녀가 귀여워서, 그는 살짝 웃어버리고 말았다.

나중에 돌려줘야지. 그런 생각으로 노트를 챙긴 데스페라도는 슬쩍 안쪽의 내용물을 확인했다. 과연 1학년. 군기가 바짝 든 필기에 기특하다는 생각을 할 무렵, 중간부터 글씨체가 다른 글이 빼곡한 페이지를 본 그가 손을 멈추었다.

 

“흠?”

 

앞의 필기 때 쓴 정갈한 글씨체와는 다른, 누가 봐도 휘갈겨 쓴 글씨체. 정황 상 아마도 이것이 루엔의 본래 글씨체 같았는데…

 

‘이 녀석, 엄청 악필이군’

 

뭐, 급하게 쓴 것 같으니 당연한가. 강의실을 나가 천천히 노트의 내용물을 읽어보던 그는 그것이 무슨 글인지 알고 표정을 감출 수가 없었다.

 

‘이거, 소설?’

 

사실 완성된 글이라기보다는 중간 중간 쓰고 싶은 부분과 아이디어를 메모해 놓은 글에 가까웠지만, 그의 눈에는 이미 이것 자체가 한편의 단편집 같이 느껴졌다. 뭐, 과가 과니까 노트에 글을 쓰는 건 놀라울 걸도 없지. 다만 그가 눈길을 뗄 수 없는 이유는, 그 글의 내용이었다.

신입생과 재학생의 운명적인, 혹은 진부한 만남. 주인공인 여자 신입생은 매력적인 선배에게 조금씩 빠져들고, 이내 그에게 반해버린다는, 어떻게 보면 흔해 보이는 그 이야기는 분명 자신과 루엔의 이야기였다.

 

‘이 녀석…’

 

자신도 모르게 웃어버린 그는 노트를 가방에 챙겨 넣었다.

 

 

❋ ❋ ❋

 

 

“야, 거기 너”

 

마주치고 싶지 않은 상대와 마주쳤을 때, 가장 좋은 대처법은 무시가 아닐까. 하지만 그게, 무시하기조차 껄끄러운 상대거나 무시할 수 없는 상황일 때면 어떻게 해야 할까. 제너럴은 강의실로 향하는 도중 자신을 불러 세우는 목소리에 인상을 찌푸리고 말았다. 흡연구역도 아닌데 가로수에 기대 담배를 피우고 있는 데스페라도는 자신을 향해 노골적인 적의를 보이는 제너럴이 귀여운지 그저 웃었다.

 

“무슨 일입니까?”

“인상 펴지 그래? 누가 보면 내가 돈이라도 받으러 온 줄 알겠어?”

“…곧 강의가 있어 빨리 가봐야 합니다. 용건이 있다면 빨리 말해주세요”

 

아까 전 보다는 표정이 좀 누그러졌지만, 그래도 역시 싫어하는 기색이 역력한 얼굴이다. ‘참 연기 못하는 놈이네’ 아니면, 싫은 기색을 감출 필요도 없다는 걸까. 어떤 의미로든, 참으로 솔직한 녀석이다. 그것이 데스페라도의 평가였지만, 그렇다고 봐줄 생각도 없었다.

 

“루엔에게 이것 좀 전해주겠어? 얼마 전에 교양 강의 때, 강의실에 두고 갔거든”

“아”

 

무슨 일인가 했더니, 그런 거였나. 그제야 표정이 조금 누그러진 제너럴이 자신 앞에 내밀어진 노트를 받았다. 그래, 이런 일이 아니면 제게 말을 걸 리가 없는 상대지. 제너럴은 한편으론 안심했고, 한편으론 불쾌해 져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뭐, 그럼 난 간다. 루엔에겐 안부 전해주고”

“안부라면 직접 전할 수 있지 않습니까? 문자도 하는 사이로 아는데”

“그냥 하는 말이잖아. 생각보다 더 딱딱한 녀석이네? 그렇게 좋냐?”

 

주어도 없는 물음이지만 제너럴은 그 말뜻을 단번에 알아듣고 표정을 구겼다.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저렇게 뭐든 가벼워 보이는 상대에게 제 마음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그는. 저 남자는.

 

“좋아하면 어쩔 겁니까?”

“그러면 빨리 고백하는 게 좋을 걸. 이미 늦었을지도 모르지만?”

 

킥킥. 소리죽여 웃은 데스페라도는 담뱃불을 끄고 자리를 떠났다. ‘기분 나쁜 사람’ 저런 타입은 안 그래도 질색인데, 어쩌다 그녀는 저 남자와 엮여버린 걸까. 그녀의 노트를 만지작거리던 제너럴은 슬쩍 노트를 펴보았다. 혹시 데스페라도가 메모라도 남겨놓진 않았을까. 단지 그걸 확인하려던 것뿐이었는데.

 

“……”

 

정갈한 필기 뒤에 늘어선 지저분한 단문들. 그녀의 글이라면 지겹도록 읽어본 제너럴은 그것이 루엔의 글임을 단번에 알아챘다. 아니, 애초에 그녀의 노트니 그녀의 글인 게 당연하지. 그렇게 당연한 사실을 굳이 상기한 것은, 그 글의 내용이 그로선 도저히 믿기 싫었던 것들이었기 때문이었다.

괜히 봤다. 아니, 지금이라도 봐서 다행인가.

‘이미 늦었을지도 모르지만?’ 데스페라도의 말을 떠올린 제너럴이 가볍게 입술을 깨물었다. 정말로. 정말로 싫은 남자다. 원망인지 질투인지 모를 감정이 그의 목구멍 안에서 욱신거렸다.

 

 

“엔, 이거 네 노트지?”

 

제너럴이 강의실에서 만난 그녀에게 노트를 내밀자, 루엔은 뭐라 단정 짓기 힘든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안도와 환희, 그리고 당황. 노트 안 내용들 만큼이나 다양한 감정을 지닌 그녀의 표정은 곧 다정한 미소 아래로 가라앉았다.

 

“응, 어디서 찾은 거야? 잃어버린 줄 알고 걱정했는데…”

“그 선배가 교양 강의실에서 찾았다더라, 나보고 대신 돌려주라고 부탁해서”

“그 선배? 아, 아아…”

 

데스페라도를 떠올린 걸까. 루엔의 뺨에 붉은빛이 돌았다. ‘아, 역시’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노트 안의 글은 마냥 허구가 아닌 모양이었다. 감당하기 힘든 상실감. 제너럴은 제 마음을 짓누르려는 감정을 무시하기 위해 애써 다른 이야기를 꺼내었다.

 

“과제는 다 했어? 오늘까지 제출이잖아”

“으응, 뭐… 다 했어. 평소에 쓰던 거랑 전혀 다른 글이라 애먹었지만! 제너럴은?”

“나도 다 했어. 둘 다 완성해서 다행이네”

 

사실은 다행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면서. 너무나도 능숙하게 제 감정을 숨긴 제너럴은 밖으로 꺼내지도 못한 제 연심을 마음 속 가장 깊은 곳으로 밀어 넣었다.

 

 

중간고사 시즌은 그렇게 정신없이 지나가고 말았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대학에 와서 치른 첫 시험 치고는 나쁘지 않았지. 글도 어떻게든 제출했고, 시험들도 완전히 망하지는 않았으니까. 다만 그녀에겐 다가올 기말고사와 성적표보다 더 커다란 이벤트가 있었으니. 그건 바로,

 

“야, 루엔”

 

헉. 버스를 타러 가기 위해 바쁘게 정문으로 달려가던 루엔은 자신을 부르는 익숙한 목소리에 급정거했다. 마지 자신이 오기를 기다렸다는 듯 계단에 앉아있던 데스페라도는 얼어있는 자신에게 다가와, 언제나처럼 매력적인 미소로 말을 걸었다.

 

“과제는 다 했고?”

“아, 네에. 뭐”

“거 다행이네. 1학년부터 성적을 조져놓진 않을까 걱정했는데”

“이, 이렇게 보여도 성실하거든요?”

“아니, 너 성실하게 생겼어. 이럴 땐 ‘보는 바 같이’라고 해야지”

 

또 놀리는 건가. 아니면 진심인가.

도저히 본심을 알 수 없는 그의 행동이 이제는 짜증난다고 하기 보단 두근거려서 화가 났다. 아냐, 이건 글 때문에 그런 거지, 자신이 저런 능구렁이를, 저렇게 속을 모를 남자를 좋아할 리 없다. 그렇게 믿고 있던 그녀였는데.

 

“있잖아”

 

갑자기 팔을 잡아 자신 쪽으로 끌어당기는 그의 행동에 루엔은 완전히 굳어버리고 말았다. 마치 몸에서 정상적으로 활동하는 기관은 심장과 눈동자뿐인 것 같다. 그런 착각이 느껴질 정도로 자신은 긴장하고 있었다. 쿵쾅거리는 심장과 떨리는 동공으로 그를 응시하던 루엔은 겨우 잠든 성대를 깨워 대답을 쥐어짜냈다.

 

“네, 네?”

“남자친구 있냐?”

“네?!”

“아니, 없지? 있을 리가 없지. 있으면 진작 와서 내 면상을 갈겼을 테니까?”

“아, 아니, 저기. 선배?”

“데스페라도라고 불러, 애인끼리 이름 좀 부른다고 별일 안 생기거든”

 

지금 자신이 무슨 소릴 들은 거지. 아니, 설마 저게 고백인 건가. 당황해서 뭐라고 대답해야할지 고민하던 사이, 코앞으로 다가온 말끔한 얼굴이 제 이마에 키스를 남긴 것은 분명 꿈이 아니었다.

 

“자, 거절 할 거라면 지금 뿐이야. 나랑 연애 할래? 아니면 그렇게 글로만 남겨둘래?”

 

아아, 교수님. 아무래도 제 대학 생활은 하이틴 로맨스 소설 뺨치는 무언가가 될 것 같습니다.

절대로 거절 할 수 없는, 그리고 거절하고 싶지도 않은 인생의 첫 연애 앞. 그녀의 비명을 들은 것은 역시나 루엔의 머릿속에 웃고 있는 그녀의 전공교수님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