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2D/Dungeon & Fighter

드림 꽃말합작 / 수국 :: 처녀의 꿈


데스페라도 드림, 오리주 주의

※ 합작 홈 주소 → http://flowerword.wix.com/flowerword

 

 


처녀

written by Esoruen

 

 

 

또, 여름이 다가오고 있었다.

 

늦봄과 초여름의 사이. 더위가 슬금슬금 올라오는 시기가 되자 데스페라도는 조금씩 아침에 일어나는 것이 힘들어지기 시작했다. 더위는 질색이다. 무법지대에서 태어나 자랐다고 해도 이 시기의 애매한 더위만큼은 참을 수 없다. 차라리 해만 내리쬐고 습기라곤 없는 바싹 마른 한 여름의 더위는 참을 수 있었다. 하지만 장마 때문에 습기 찬, 초여름을 앞둔 지금은 아직도 시들지 않은 늦봄의 꽃들과 자꾸 흐려지는 하늘 때문에 기분이 나아지질 않는다.

사람은 호르몬의 노예라더니, 딱 그 꼴이지. 감수성도 없는 자신이 이렇게 고생하는 동안 의외라고 할지 모르지만 자신의 연인은 한창 즐거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뭐, 말이 ‘즐거운 나날’이지 평소와는 그다지 다를 것도 없었지만.

 

“데스페라도, 괜찮아?”

 

화약과 피의 냄새. 언제나 무법지대에 가득한 죽음의 흔적들. 그와 그녀는 언제나 그 중심에 있었고,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코트 가득 튄 피를 털어내지도 않고 성큼, 데스페라도의 뒤에서 나타난 그녀는 오늘도 상처하나 나지 않은 몸으로 웃어보였다.

 

“언제는 다쳤다고 그런 걸 물어?”

“안 다쳤냐는 의미는 아닌데, 뭐, 괜찮아 보이니 그걸로 됐나?”

“무슨 의미야?”

“요즘 날씨가 좀 그렇잖아. 네 컨디션이 안 좋아질 때니까. 그냥 걱정해 본 거야”

 

그런 의미였나. 그렇다면 이야기는 다르지. 데스페라도는 급히 대답을 번복하고 싶어졌다. ‘안 괜찮다’ ‘찝찝해서 죽을 것 같다’ ‘얼른 집에 돌아가 아무것도 안 하고 싶다’ 뭐 대강 저런 부정적인 소리밖에 안 나올 것 같지만, 아무렇지 않다는 건 거짓말이었으니까.

사소한 것이라도 그녀에겐 거짓말을 하고 싶지 않다. 그건 그만의 특이한 고집과도 같았다.

 

“그만 돌아가자. 저녁은 뭐가 좋을까?”

“입맛 없어”

“입맛 없다고 안 먹으면 더 괴로운 거 알지?”

 

‘차라리 먹으라고 협박해라’ 데스페라도는 루엔의 환하게 웃는 얼굴에 그리 말해주고 싶었다. 저렇게 웃는 얼굴로 협박하면 반박도 못 하지 않는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그가 앞서나가자, 루엔은 그 옆에 나란히 붙어 발맞춰 걸어갔다.

돌아가는 길에 하는 이야기는 언제나 시시껄렁한 것뿐이었다. 아까 전 제가 얼마나 위험하고 아슬아슬한 상황에서 적의 머리를 날려주었는지에 대한 무용담부터, 오늘은 뭘 먹고 싶다는 투정까지. 그저 그런 이야기들 속, 최근 자주 그녀의 입에 오르게 된 것은 새로 마련한 거처 뒤쪽에 핀 들꽃에 대한 이야기였다.

 

“맞다, 뒤뜰에 수국 말이야. 좀 있으면 꽃 필거 같더라고”

“그래?”

“응. 뭐 슬슬 필 시기니까. 요 근처는 땅도 비옥하고… 아마 잔뜩 필걸?”

 

어떻게 저런 건 또 잘 알까. 그는 ‘그러냐?’하고 무관심하게 대꾸해 놓고선 속으로는 감탄하고 말았다. 하루하루 살아남기도 바쁜 무법지대에서, 무언가에 대해 깊이 알기란 굉장히 힘든 일이었다. 가장 문제인 건 역시 배우기 힘든 환경이라고 할까. 교육기관은 고사하고 안전하게 살 수 있는 거주지조차 구하기 힘든 무법지대에선 살아남는 법 이외의 것은 필요 없는 지식과도 같았으니까.

뭐 자신도 잡다한 지식은 있다지만 꽃의 이름이나 피는 시기 같은 것은 알 방법도 없었고, 알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데스페라도는 제가 관심 없는 주제라도 그녀의 이야기는 뭐든 재밌게 들어줄 자신이 있었기에 적당히 루엔의 말에 대꾸했다.

 

“원래 그 꽃은 이런 우중충한 시기에 피냐?”

“음. 초여름 꽃이거든”

“비는 많이 맞아서 꽃은 잘 피겠네”

“그렇지. 게다가 무리지어서 피니까. 원래 관상용으로 많이 심고…”

 

신이 나서 떠들던 그녀는 갑자기 또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입을 다물고 시선을 깔았다. ‘흐음’ 머리를 굴리며 나오는 작은 신음 끝, 루엔이 작게 중얼거렸다.

 

“그러고 보니 왜 뒤뜰에 심은 걸까”

“왜? 그렇게 이상한 일인가?”

“관상용이라면 앞뜰에 심는 게 더 좋을 거라고 생각해서. 뭐, 애초에 지금은 알 방도가 없으니 어찌 되든 좋다고 생각하지만”

 

어깨를 으쓱인 그녀는 먼저 현관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밥 할 테니까 쉬고 있어’ 그녀가 봐도 별로 상태가 안 좋아 보이는 걸까. 도와달라는 말도 하지 않고 딱 잘라 쉬라고 하다니. 자신이야 좋지만, 애석하게도 멍하니 쉬고 있을 기분도 아니었다. 부엌을 기웃거리던 그는 ‘쉬어라’는 눈빛을 마구 보내는 루엔덕분에 쫓겨나듯 거실로 나왔다가, 집의 뒤편으로 향했다.

 

“아하”

 

그래, 이게 그 수국이란 건가. 데스페라도는 꽃도 피지 않은 풀들을 빤히 보다가 담배를 꺼내 물었다. 확실히 이름만 모를 뿐, 몇 번 본 적이 있는 식물이다. 분명, 특이한 모양의 자주색 꽃이 피었던가. 아니, 푸른색인가? 아직 피지도 않은 꽃봉오리를 보며 고민에 빠진 그의 눈가가 가늘게 떨렸다.

비의 냄새가 난다. 아마 오늘 밤 중, 비가 올 것 같았다.

머릿속을 스치는 불길한 예감. 반도 태우지 않은 담배를 끈 그는 목이 말라 보이는 수국들을 슥 노려보았다. 비는 좋아하지 않지만, 이왕 온다면 실컷 와서 꽃이나 폈으면 좋겠군. 자신보다는 그녀를 위한 바램을 중얼거린 데스페라도는 하늘이 먹구름으로 깔리기 전 집안으로 들어갔다.

 

 

* * *

 

 

숨 막힐 정도로 차오르는 습기, 약한 더위와 새벽 특유의 희미한 빛이 깔린 어둠. 자연스럽게 눈이 떠졌다고 하기 보단, 더 이상 잘 수 없어 일어난 데스페라도는 귓가에 흘러넘치는 빗소리에 인상을 찌푸렸다. 어떻게 이런 예감은 틀리는 날이 없을까. 비가 올 것 같다곤 생각했지만, 진짜 비가 오다니.

 

“하아…”

 

옆에서 자는 루엔이 깨지 않게 조심스럽게 침대를 빠져나온 그는 무심코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직 이른 새벽이라 바깥은 어둠밖에 보이지 않는데, 시선을 뗄 수 없는 것은 어째서일까. 빗물로 흐려진 유리창에 딱 붙어 바깥을 살피던 그는 희미하게 보이는 자주색 그림자에 피식 웃어버리고 말았다.

안 좋은 예감만 맞은 것은 아니었군.

자신에겐 사실 어찌되든 상관없는 일이었지만, 루엔이 기뻐할 만한 일이라면 그건 제게도 기쁜 일이었다. 애처가라고 할 것 까진 없지만, 그는 확실히 제 연인에 관련 된 일이라면 뭐든 자신의 일처럼 여겼고, 그것은 루엔도 마찬가지였다. 이 얄궂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서로 의지하는 사이니 이상할 것도 없지 않은가.

 

‘가져올까?’

 

그러니 그런 생각이 든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선물이라고 하기엔 약소하지만, 잠에서 깨어났을 때 평소보다 기분 좋게 해 줄만한 작은 배려. 두 사람은 서로에게 그런 걸 베풀어 주는 것에 익숙해져 있었다.

어두운 거실에서 우산을 찾던 그는 불을 켜려다가 그냥 코트와 모자만 챙겨 밖으로 나섰다. 자신만큼은 아니지만 잘 때는 누구보다 민감한 루엔이니, 불을 켜면 분명 잠에서 깨고 말 것이다. 제가 비를 맞는 것과 연인이 단잠에서 깨어나는 것. 둘 중에서 어떤 걸 골라야 좋을지 데스페라도는 고민도 하지 않았다.

툭. 툭. 비가 땅을 때리는 소리가 가득한 새벽.

생각보다 심하지 않은 빗줄기를 뚫고 집의 뒤편으로 간 그는 어제와는 달리 꽃을 주렁주렁 단 수국 앞에 멈춰 섰다. 그래, 이렇게 생긴 꽃이었지. 어제의 희미한 기억과는 다른 선명한 현실. 비를 맞으며 피어난 꽃들 중 가장 색이 선명한 것을 고른 데스페라도는 단숨에 줄기를 꺾어 안으로 들어왔다.

 

“어디 갔다 왔어?”

“아”

 

그렇게 깨우지 않으려고 우산도 없이 나갔다 온 건데, 돌아와 보니 깨있다니. 데스페라도가 억울해 한다 해도 이상할 건 없겠지. 모자를 벗고 젖은 코트를 걸어놓은 그는 제게 다가온 루엔에게 수국을 내밀었다.

 

“자”

“…응? 아, 이거 뒤뜰의?”

“그래”

 

비에 젖은 꽃은 여전히 뿌리와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 싱싱했다. 막 꺾어온 것이라 그런 걸까. 아니면 오늘 막 피어난 꽃이라 그런 걸까. 그것도 아니면, 제 연인이 비까지 맞아가며 제 손에 쥐어준 것이기 때문에 이렇게 아름다운 걸까.

 

“고마워”

“…언제 깼어?”

“방금. 추워서 깼어”

 

자신은 덥다고 생각하는데, 도대체 어디서 추위를 느낀 걸까. 몇 년이나 같이 산 두 사람이었지만 역시 이런 건 공감하기 힘들었다. 추위에 약한 여자와 더위에 약한 남자가 같이 살다니, 기묘하기도 하지.

별로 도움이 되지도 않겠지만 혹시나 싶어 문을 더 꽉 닫은 데스페라도는 젖은 머리를 말리기 위해 수건을 찾았다.

 

“별일이네, 비 싫어하면서”

“뭐, 변덕이려니 해”

“나야 좋지만. 그런 변덕”

 

흐흐. 소리 죽여 웃는 루엔의 발걸음이 가볍다. 마음에 들어 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역시 머리가 젖는 것 같은 사소한 일은 어찌되든 좋아진다.

바보가 따로 없지. 루엔 때문에 자신은 대단한 멍청이가 되었다. 그녀를 만나기 전 자신이 지금의 꼴을 본다면, 무슨 말을 할까.

 

‘뭐, 욕해도 별 수 없지’

 

남의 시선 같은 건 신경 쓰지 않았다. 그 ‘남’이 설령, 과거의 자신이라도 해도 말이다.

아직 시간이 이른데, 더 잘 생각은 없는 걸까. 루엔은 잠이 덜 깬 몸으로 집안 이곳저곳을 뒤지고 있었다. ‘어디 있지?’ ‘으음’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그녀는 곧 작은 병을 하나 찾아왔고, 그곳에 물을 가득 채웠다. 과연, 꽃병인가.

 

“좋아, 색이 바뀔 때 까지 싱싱하면 좋겠네”

“색이 바뀌어?”

“아, 몰랐어? 수국은 색이 바뀌는 꽃인 거?”

 

자신이 꽃 같은 거에 관심이 없다는 건 이미 잘 알고 있을 텐데. 아니면 이 정도는 이미 상식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걸까. 모른다는 뜻으로 고개를 젓자, 루엔은 또 신이 나서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처음 피었을 때는 연한 자주색, 거기서 시간이 조금 지나면 하늘색으로 되었다가, 나중엔 연한 홍색으로 변하지. 꽤 여러 번 색이 바뀌는 꽃이야”

“변덕스럽네”

“응. 그래서 수국의 꽃말이 변덕이야”

 

참으로 심플한 꽃말이다. 데스페라도는 그 직설적인 꽃말이 싫지 않았다. 다른 꽃들은, 뭐 많이 아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그가 아는 범위 안에서는, 왜 그런 꽃말을 가지고 있는지 모르겠는 경우가 수두룩했는데. 꽃 색이 바뀐다고 꽃말이 변덕이라니. 얼마나 알기 쉬운가.

 

“딱 보면 알 수 있어서 좋네”

“그렇지? 뭐, 다른 뜻도 있지만”

“다른 뜻? 뭔데?”

“색에 따라서 좀 다른데… ‘진심’도 있고, ‘냉정’ 같은 것도 있지”

 

역시 꽃말 같은 건 자신과는 맞지 않는다. 변덕과 진심이 공존하는 꽃이라니. 그런 게 가능하나?

데스페라도의 표정에서 그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걸까. 소리 없이 웃은 그녀가 꽃병이라고 하기엔 초라한 병에 수국을 꽂았다.

 

“수국은 말이야, 조금만 건조해도 금방 시드는데 물에 담가두면 금방 살아나거든. 좋은 땅에서 피어난다면 다른 꽃들보다 훨씬 오래 피어있기도 하고”

“그래?”

“그러니까… 으음, 그래. 진심을 담은 꽃이지만 좀 변덕쟁이라고 해야 하나. 그런 거지”

 

‘꼭 너 같네’ 반사적으로 그렇게 대답할 뻔 했던 데스페라도는 급히 담배로 제 입을 막았다. 분명 저렇게 말했다가는, 아침의 훈훈한 감동이 한방에 날아가고 잔소리만이 쏟아지겠지. 후우. 한숨과 함께 담배연기를 내뱉은 그는 헛소리가 나오지 않게 다른 질문을 꺼내보았다.

 

“그럼 넌 어떤 꽃말이 제일 좋은데?”

“나? 흐음”

 

아직 빗물이 마르지 않은 잎을 만지작거리던 루엔이 애꿎은 꽃잎 하나를 뚝 떼어냈다. 제 애인의 코트 색과 같은, 선명한 자주색. 살짝 힘을 주면 그대로 짓이겨져 버리는 꽃잎에선 향긋한 수국향이 났다.

 

“처녀의 꿈”

 

그게 제일 마음에 들어.

속삭이듯이 작은 목소리. 거세지도 않는 빗소리에 잠겨버릴 만큼, 작고 작은 덧붙임. 데스페라도는 앞서 나왔던 의미들과는 사뭇 느낌이 다른 꽃말에 인상을 찌푸렸다가, 기계적으로 연기를 내뱉었다.

 

“특이한 꽃말이네. 솔직히 말하자면 유래도 짐작이 안가는 군”

“음, 그건 나도 그래. 그래도 이게 제일 좋아”

 

싱겁기는. 그래도 무언가 이유가 있으니 좋아하는 거겠지. 그는 조금씩 사그라지는 빗소리에 눈을 감았다. 아마 조금 더 있으면, 먹구름도 사라지고 햇볕이 쏟아질 것이다. 그리고 초여름 특유의, 어설픈 더위가 몰려들겠지. 한참을 그렇게 눈을 감고 있자니, 일찍 일어난 탓에 풀리지 못한 피로가 밀려왔다.

비 때문에 사라진 더위와, 기분 좋은 세제 향이 나는 수건…

 

“…데스페라도?”

 

머리도 다 말리지 않았는데 그사이 잠이 든 걸까. 루엔은 의자에 앉은 채로 잠든 연인을 보고 어깨를 으쓱였다. 아직 아침을 먹기엔 너무 이른 시간이니, 조금 더 자게 내버려 둬야지. 담요를 그의 몸 위에 둘러준 루엔은 슬쩍 그의 옆에 앉아, 똑같이 눈을 감았다.

 

 

* * *

 

 

그녀의 말대로 수국의 색은 여름이 깊어갈수록 조금씩 변해갔다. 뒤뜰에 핀 꽃무더기도, 집 안에 들여놓은 꽃 한 송이도. 점점 자줏빛을 잃고 푸르게 변하더니 이제는 또 붉어질 예정인지 맑은 청색의 꽃잎이 조금씩 탁해져가고 있었다.

 

“슬슬 은신처도 옮겨야겠군, 녀석들도 위치를 눈치 챈 것 같고”

“으음, 그렇지?”

 

누가 봐도 아쉬워하는 얼굴이지만, 그녀는 그 결정에 반박하지 않았다. ‘별일이네’ 의아하다 생각하고는 있었지만 데스페라도는 그녀가 아쉬워하는 이유를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아마, 저 수국 때문이겠지. 어차피 꽃들은 누가 돌봐주지 않아도 알아서 잘 자라겠지만, 루엔의 입장에서는 소소한 즐거움을 두고 떠나는 것이니 아쉬울 만 할 것이다.

그래도, 이제까지 수 십 번 거처를 옮기며 살았어도 이렇게 노골적으로 아쉬워 한 적은 없었는데. 그렇게 꽃이 마음에 든 걸까.

‘무법지대에서 수국이 필 만 한 곳은 거의 없는데’ ‘으음’ ‘나중에 붉게 물드는 것 까진 보고 싶었는데’ 입이 삐죽 튀어나와서 중얼거리는 그녀는 끝까지 ‘조금만 더 머무르자’는 얘기는 하지 않았다. 그건 아마 루엔도 이 무법지대가 얼마나 살벌한지 잘 알고, 스스로가 그걸 늘 느끼며 살기 때문이겠지. 목숨과 감성. 둘 중에서 어떤 걸 골라야 할지는 어린아이도 아닌 문제였다.

아, 물론 감성을 고르는 것이 나쁘다는 것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데스페라도에겐 로맨틱한 죽음 보다는 비참할 지라도 살아있는 것이 우선이었다.

 

“내일 아침에 움직일까?”

“…뭐, 그러던가”

“그럼 오늘은 일찍 자야겠네”

 

조금 더 시간을 끌 줄 알았는데, 오히려 본인이 당장 내일 움직이자고 나오다니. 미련 없이 가려는 노력일까? 데스페라도는 그녀의 결정에 고개를 끄덕여 줄 뿐이었다.

 

“있잖아”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그의 옆에 드러누운 루엔은 대답도 하지 않았는데 제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잘 생각해 봤거든, 저 뒤뜰의 수국들 말이야. 왜 앞뜰도 아니고 뒤뜰에 저렇게 잔뜩 핀 건지. 처음엔 이해가 안 갔는데 이제는 좀 알거 같더라고”

“그래?”

“응. 나중에 되어서야 알게 된 건데, 뒤뜰의 흙이 제일 습기 차더라고. 뒤뜰에 일부러 심은 게 아니라, 뒤뜰에 밖에 심을 수 없었던 거야”

 

졸린 걸까. 아니면 제가 멋대로 시작한 이 이야기가 별로 유쾌하지 않은 걸까. 루엔의 목소리는 점점 작아졌고, 이내 귓속말처럼 소곤거리는 정도가 되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그 편이 더 나았던 거 같기도 해”

“그 편? 뒤뜰에 밖에 필 수 없었던 게?”

“응”

 

대화는 거기서 끊어지는 것처럼 보였다. 잠들려는 것처럼 눈을 감고, 한참을 말없이 가만히 있던 루엔은 데스페라도가 잠에 들기 직전에야 느릿하게 말을 이었다.

 

“거기 있으면, 어쩐지 다른 세계에 있는 것 같았거든. 꽃으로 둘러싸인 작은 정원이라고 할까…”

 

제 생각이라지만 너무 감성적이라 웃음이 다 나온다. 킥킥. 소리죽여 웃는 루엔이 베개에 얼굴을 묻어버렸다. 딱히 우습다고 생각하진 않았는데. 혹시 부끄러워하는 걸까.

 

“그야말로 꿈이네”

“응. 백일몽이지”

“백일몽이라 해도 네가 행복하면 그걸로 좋은 거지”

 

‘진심이야?’ 그렇게 묻는 것 같은 보라색 눈동자가 베개 밖으로 빼꼼 삐져나왔다. 이렇게 로맨틱한 말을 해 주는 데스페라도가 얼마만이지? 루엔의 믿기지 않는다는 눈에 오히려 더 머쓱해진 데스페라도는 그녀의 눈을 가려버렸다.

 

“잠이나 자. 좋은 꿈 꿔라”

“…응, 잘 자”

 

꿈에서 봐. 그녀의 말이 꽃잎처럼 침대에 흩날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