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데스페라도 드림, 오리주 주의.
※ 월간드림 6월호 참여작.
어느 여름날의 고백
written by Esoruen
“그러고 보니 자네랑 로시스가 같이 살게 된 게 올해로 몇 년째지?”
베릭트의 질문은 다소 뜬금없었다. 나이가 드니 이제 저런 것 까지 헷갈리는 건가. 데스페라도는 반쯤 빈 제 술잔을 집어 들다 말고 팔의 움직임을 멈췄다. 베릭트의 성격을 생각하면 뭔가 잔소리를 하려고 말을 꺼낸 건 아니겠지만, 갑자기 화제를 바꾸다니 수상하지 않은가. 잠깐 고민하던 그는 술잔을 입으로 가져가며 툭 대답을 내뱉었다.
“6년 정도.”
“오래도 같이 지냈군.”
“그렇지, 뭐.”
사실 그렇게 오랜 시간이 흘렀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벌써 6년이나 되냐, 라고 말하고 싶었지. 시간을 빠르고, 세월은 더 빠르게 변해간다. 다만 언제나 같이 있다 보면 그 변화에 무뎌질 뿐이지. 두 사람의 관계는 이미 익숙함에 물들어, 자잘한 변화는 자각할 틈도 없었다.
“사실은 말이지, 나는 자네들이 그렇게 오래 갈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어.”
“그래?”
굉장히 미안하다는 듯 말을 꺼내는 베릭트와 달리, 데스페라도의 표정은 전혀 기분나빠 보이지 않았다. 그럴 만도 한 것이, 저런 말은 이미 익숙했으니까. ‘너희 아직 같이 살아?’ ‘와, 진짜 사랑하나 보네.’ ‘오래도 같이 산다.’ 이런 말을 귀에 딱지가 앉게 들은 그에게 베릭트의 말은 특별할 것도 없었다. 물론, 저런 말을 하는 이유도 알고 있었고 말이다.
자신은 어딘가에 머무를 성격이 아니었다. 그리고 의외일지 몰라도, 루엔도 평화와 안정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독립적이고, 자유롭고. 그건 무법지대에 태어나 무법자로 자란 사람의 공통점과도 같았다. 그런데 그 공통점을 가진, 어디든 떠돌아다니며 카르텔을 닥치는 대로 처리하던 두 사람이 같이 살게 되었으니 누구라도 ‘얼마 못 가겠지!’라 생각하는 게 당연하지 않겠는가. 기분 나빠 할 것도 없는, 그야말로 지극히 정상적인 판단이었다.
“그래도 다행이야. 자네가 로시스 양에게 정착해서.”
“정착해?”
“음. 노인의 잔소리라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말이지, 인간은 한 사람에게 정착해야 어떤 삶이라도 견딜 수 있게 되거든.”
그답지 않은 소리다. 아니, 정확하게는 무법자답지 않은 말이라고 해야 하나. 데스페라도는 이해 할 수 없다는 얼굴로 베릭트를 보았다. 자신보다 배로 오래 살았으니 뭔가 생각하는 게 다르기는 하겠지만, 그래도 그 역시 분명 무법자. 그것도 무법지대에선 전설로 불린 ‘모래바람’인데 저런 말을 하다니. 역시 세월이란 무서운 법이었다.
“그러는 당신은?”
“나도 옛날에는 있었지, 지금은 없어졌을 뿐.”
“그런가. 뭐, 보통 당신 나이까지 살아있는 무법자가 몇 없긴 하지.”
“하하하.”
이런 이야기는 스스로 털어놓기 전까진 묻고 싶지 않았다. 물론 궁금하지 않을 리 없지만, 들어봐야 좋을 건 없겠지. 그러니 제가 할 수 있는 대답은 저게 다였다. 살아있니 죽었으니 하는 건, 조금 오버일지 몰라도 말이다.
데스페라도의 미적지근한 반응에 베릭트는 그저 웃었다. 달그락. 유리잔 속의 얼음이 녹으며 맞부딪치는 소리는 청량했다.
“무법지대의 여름은 여전히 덥군. 이건 하나도 안 바뀌었어.”
“아직 초여름이지만 확실히 더워졌지.”
“자네는 여름에 약하지 않았나? 조금 지나면 죽을상으로 다니겠군.”
“별걸 다 기억하네, 당신도.”
저런 건 기억해 주지 않아도 되는데. 얼음만 남은 술잔을 슬쩍 바깥쪽으로 민 그는 작년 여름을 떠올렸다. 작년은 황도에서 지내는 날이 많아 어떻게든 버텼지만, 카르텔이 대충 정리된 올해는 무법지대 밖을 벗어날 일이 없을 테니 충분히 각오를 해 둬야한다. 이 황무지에서 리볼버로 못 죽일 것이 없는 그도 각오할 게 있다니, 인생이란 얼마나 재미있는가.
“올해도 황도에서 지내는 건 어떤가. 그러면 좀 덜 더울 텐데?”
“됐어. 거긴 얼굴 마주치기 싫은 놈들이 많아서. 그리고 여기도 그리 나쁘지 않아. 루엔은 더위를 안 타고 여름을 좋아하는 편이니까.”
“흐음.”
데스페라도의 대답을 들은 베릭트가 시선을 돌리더니, 갑자기 못 참겠다는 듯 ‘풋’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제가 우스울 만한 말을 한 기억은 없는데. 왜 웃는 걸까. 남이 비웃는 건 절대 가만히 보고 있지 못하는 데스페라도는 상대에게 이유를 따지려고 했지만, 그 전에 베릭트가 먼저 입을 열고 해명을 해왔다.
“아니, 미안하네. 하지만 자네 정말로 로시스를 좋아하는구나 싶어서 그만.”
“갑자기 무슨 소리야?”
“‘생각해보게. 이 세상에 자기밖에 모르던 자네 아닌가? 로시스 때문에 괜찮다는 말이 나오다니. 정말 좋아하지 않으면 무리지. 자네 같은 사람에겐 말이야.”
베릭트의 말은 대부분 맞았다. 데스페라도는 정말 한 마디도 반박하지 못하고 입을 닫아야 했다. 물론 그게 웃음을 터뜨릴만한 일인가에 대해선 공감할 수 없었지만, 사람이란 원래 쓸데없는 일에도 웃는 법이었으니까. 당장 제 연인도, 이상한 포인트에서 포복절도하기도 했고.
‘새삼스럽게 무슨.’
같이 지내온 세월이 6년, 연인으로 지내온 세월이 5년이다. 타인과 엮이는 것에 질색하는 자신이 그토록 오랜 시간 함께해온 여자인데, 정말 좋아하지 않을 리가 있는가.
이미 그에겐 이 마음은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었다. 같이 살아온 세월이 6년이라는 걸 잊을 만큼, 당연하고 당연한 것. 그래서 데스페라도는, 베릭트가 왜 이런 반응을 보이는 지 정말 알 수가 없었다.
“이런, 슬슬 가야겠군. 먼저 일어서지. 다음에 또 보세.”
“조심해서 돌아가라고, 영감님.”
어차피 베릭트를 만나러 온 거니 더 남아있을 이유도 없었지만, 데스페라도는 굳이 조금 기다렸다가 일어서는 걸 택했다.
‘도대체 뭐가 그렇게 새삼스러운 걸까.’ 깊게 생각 할 이유가 없는데도, 베릭트의 말은 계속 머릿속에서 맴돈다.
그렇게 잠깐 상대방의 말을 곱씹던 데스페라도는 결국 답도 찾지 못하고 일어났다. 너무 늦지 않게 주점에서 나온 그는 서둘러 제 연인이 기다리고 있을 집으로 향했다.
집에 돌아온 데스페라도는 문을 열자마자 느껴지는 냉기에 할 말을 잃었다. 분명 바깥은 밤이지만 후덥지근한 바람이 불었는데, 도대체 집에 무슨 짓을 해놓은 걸까. 안타깝지만 그의 머리에선 도저히 답이 나오지 않았다.
“오, 어서 와 데스페라도!”
“…너, 집에 무슨 짓을 해 놓은 거야?”
“후후, 그걸 물어보길 기다리고 있었지!”
두 눈을 빛내는 루엔이 가리킨 것은 집구석에 놓인 낮선 기계였다. 보아하니 물 건너… 그러니까, 황도나 파워 스테이션에서 구해온 물건 같았지만 정확하게 뭘 하는 기계인지는 알 방도가 없었다. 이럴 땐 괜히 추측을 늘어놓는 것 보단, 솔직하게 묻는 게 낫다. 빙빙 말을 돌리는 건 그의 스타일이 아니었으니까.
“빨리 말해봐, 뭔데?”
“마이스터가 만들어 준 냉방장치! 전에 슬라우 공업단지에서 구해준 마그노튬으로 만든 거라고 하더라고! 우리 덕분에 잔뜩 생겼으니, 보답이라면서 줬어!”
“…그 녀석이 이런 걸 만들어 줄 줄이야.”
마이스터의 실력이야 이미 익히 알고 있었지만, 설마 그 똑똑한 머리를 냉방장치를 만드는 곳에 써줄 줄은 몰랐다. 그가 만드는 것은 대부분 전투용 메카였고, 생활용품 같은 건 본인이 필요하지 않은 이상은 만들지 않았다. 냉방장치 정도라면 ‘기계의 냉각장치로 쓸 수도 있으니까’ 라며 만들어 준 걸까? 설득력 있는 가설이었다.
하지만 원래 세상은 예상보다 훨씬 단순하게 돌아가는 법. 데스페라도의 가설과 달리, 마이스터가 저 냉방장치를 만든 이유는 좀 더 단순하고 명쾌했다.
“뭐, 확실히 내가 만들어 달라고 했을 때 ‘진심이냐?’고 말하는 것 같은 얼굴을 하긴 했었지. 그래도 결국 만들면서 실컷 뿌듯해 했으니 결과적으론 이득이라고 생각하는데!”
“…잠깐, 네가 만들어 달라고 했다고?”
“응? 응! ‘너희 덕분에 마그노튬이 잔뜩 생겼으니 뭔가 만들어 주고 싶은데. 뭐가 좋겠어?’ 라고 해서 이걸로 부탁했지!”
과연, 그런 거였군. 한 번에 상황을 납득한 데스페라도가 어깨를 으쓱였다. 루엔은 옛날부터 황소고집이었다. 원하는 게 있다면, 얻을 수 있는 가능성이 제로가 아닌 이상 끝까지 밀어붙일 사람이지. 그리고 마이스터는 루엔의 고집을 꺾을 만큼 인간관계에 요령이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니, 결과는 뻔하지.
“근데 그 냉방장치, 언제부터 켜놓은 거? 우리 집만 봄 같은 온도다만.”
“네가 나가고 나서 쭉?”
“…….”
“하지만 데스페라도는 더운 건 질색이잖아? 어때? 시원해?”
“시원… 하기는 하네.”
이건 좀 지나치지 않을까 싶지만, 굳이 루엔의 기대를 박살 낼 필요는 없겠지. 외투와 모자를 벗어둔 그는 자화자찬을 하는 그녀를 두고 먼저 침대에 누웠다. 미지근한 대답을 하긴 했지만, 확실히 집이 시원하니 기분도 한결 좋아진다. 집에 돌아올 때는 이런 날씨에 잠이라도 잘 수 있을까 했지만, 이 정도의 온도라면 불면증은 오지 않을 것 같다.
“베릭트 씨는 잘 있었어?”
“그 영감님이 못 있을 이유가 없지.”
루엔은 제 옆에 나란히 누우며 물었다. 그녀의 말에 건성으로 답한 데스페라도는 느리게 눈을 깜빡이다가, 슬쩍 그녀의 뺨에 손을 얹어보았다. 무법지대의 뙤약볕에도 타지 않은 흰 얼굴은 방안의 온도보다 차가웠다. 아마도 냉방을 오래 쐰 탓에, 몸이 식은 모양이었다.
“너 지금 춥지?”
“…티 많이 나?”
“야, 이….”
“아냐, 나 괜찮거든? 솔직히 못 버티겠으면 껐겠지. 괜찮아!!”
그가 잔소리를 하기 전 재빨리 변명을 늘어놓는 루엔이었지만, 데스페라도는 이미 인상이 구겨질 대로 구겨진 후였다. 분명 시원해서 기분 좋던 방도, 갑자기 견딜 수 없을 정도로 거슬리게 느껴졌다. 제가 쾌적해도 루엔이 불편하다면 그건 싫었다. 그럴 바에는, 그 반대가….
“…….”
“…데스페라도?”
‘화났어? 화난 거 아니지?’ 갑작스러운 침묵에 루엔은 불안 한 듯 조잘거렸지만, 그는 제 연인 때문에 말을 멈춘 게 아니었다.
방금 자신이 무슨 생각을 했지. ‘차라리 내가 불편하고, 루엔이 편한 게 좋겠다.’라고 했었던가. 평소라면 아무렇지도 않았을 제 생각이, 오늘따라 유난히도 대단하게 느껴진다. ‘정말 좋아하지 않으면 무리지.’ 베릭트의 목소리가 다시 한 번 선명하게 귓가에 울렸다.
제게는 당연하다 생각했던 모든 ‘괜찮다’는, 이렇게나 큰 의미였던가. 그래. 적어도 6년 전 자신이라면 절대 이해하지 못했을 마음이지.
이 마음을 당연하다고 느끼게 만든 건 눈앞의 이 여자였다.
그리고 아마 이 괜찮음은, 평생 그녀에게만 한정 된 것이겠지.
“루엔.”
“응?”
“사랑해.”
“…갑자기 왜 그래??”
차갑던 얼굴이 붉게 물들어 따뜻해진다. 귀엽다고 말하면, 분명 놀리는 거라고 생각하겠지. 소리죽여 웃은 그는 손을 거두고 눈을 감았다.
“그냥 말하고 싶어서.”
“새삼스럽게 무슨…, 나도 사랑해.”
“알아.”
굳이 서로 알고 있는 감정을 입 밖으로 내뱉는 것은, 그 당연함에 감사하기 위해서겠지.
여름인 것도 잊게 하는 방의 온도, 제 바로 옆에 누운 연인의 환한 얼굴.
그 모든 것이 그토록 새삼스럽게 사랑스러워서, 그는 제 마음을 끄집어 낼 수밖에 없었다.
뜬금없고, 쑥스럽고, 그 당연함이 너무나도 사랑스러운.
어느 여름날의 고백을.
'2D > Dungeon & Fighter' 카테고리의 다른 글
월간 드림 7월호 / 빛바랜 사진 속 (0) | 2017.08.03 |
---|---|
드림 초기설정 합작 / 더 비기닝 (0) | 2017.07.29 |
드림 인외합작2 / 숲 속의 밀회 (0) | 2017.07.01 |
월간 드림 5월호 / 꿈을 꾸었다 (0) | 2017.06.06 |
10년 전 10년 후 드림 합작 / 시간을 넘어서 (0) | 2017.05.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