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2D/Dungeon & Fighter

월간 드림 10월호 / 코트를 꺼냈다


※ 월간 드림 10월호 참여작

※ 데스페라도 드림, 오리주 주의





코트를 꺼냈다

written by Esoruen




데스페라도, 슬슬 집을 옮겨야 할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해.”

 

내가 저 소리 할 줄 알았지.’ 데스페라도는 마치 그렇게 말하는 것 같은 얼굴로 한숨 쉬었다.

올해 겨울은 작년보다 더 빨리 다가오고 있었다. 분명 얼마 전 까지는 막 가을이 된 것 같은 적당히 서늘한 날씨였는데, 정신 차려보니 두꺼운 이불 없이는 잠을 설칠 정도로 추워졌다. 물론 자신은 얼어 죽을 정도로 춥지 않은 이상 생활에는 지장이 없었지만, 제 동거인이자 연인인 그녀는 달랐지. 더위엔 강하지만 추위엔 쥐약인 루엔은, 조금만 날이 쌀쌀해져도 벽난로를 켜고 싶어서 안달이 나곤 했다.

 

네가 옮기고 싶다면 난 상관없어. 슬슬 이동해야 할 시기라고 생각했고.”

그렇지? 우리 여기 늦봄부터 있었으니까 말이야. ?”

그렇게 옮기고 싶었냐. . 아니라고 했으면 큰일 날 뻔 했네.”

 

번쩍번쩍 빛나는 그녀의 두 눈을 본 데스페라도는 자신도 모르게 헛웃음을 흘려버렸다. 이럴 거였다면 그냥 묻지 말고 옮기자고 직접 말하는 편이 좋았을 텐데. 그래도 나름대로 의견을 받겠다고 의문문으로 말한 걸까.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아냐, 아니라고 했으면 한 2주는 더 버틸 수 있었어.”

아 그래?”

물론 네가 상관없다고 했으니 내일 당장이라도 짐 챙길 거지만.”

별로 챙길 것도 없지 않나? 오늘 밤에 가도 될 것 같은데.”

요즘 밤엔 춥잖아?!”

…….”

 

저렇게 답하면서 2주는 버틸 수 있다고 하다니. 거짓말도 정도가 있지.

다른 사람이었다면 웃기고 있다고 한마디 해줄 그지만, 루엔이라면 예외다. 그녀가 얼마나 추위를 타는가에 대해선 제가 제일 잘 알고, 감기라도 걸리면 심하게 앓아 곤란하니 예민해질 수밖에 없는 거지. 여름마다 더위에 못 이기는 자신을 루엔이 이해하듯, 겨울에는 제가 루엔을 이해하면 되는 거였다. 자신들은 그런 방식으로 몇 년이나 함께 살아왔고, 그건 제법 자랑할 만한 사랑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새로 옮길 곳은 알아보고 말 꺼낸 거냐.”

당연하지. 벽난로 있는 빈집 찾기가 좀 힘들었지만. 여기서 그렇게 먼 곳도 아냐.  3시간 걸으면 될까?”

 

3시간 정도 떨어진 곳이면 그리 먼 곳도 아니다. 원래 자신들이 따로 거처를 지정해 두지 않고 몇 달 단위로 이동하는 건 카르텔 때문이었으니 더 먼 곳으로 가는 게 좋을 것 같지만, 단순히 덜 추운 집을 찾기 위해 이동할 거리로는 이 정도가 딱 알맞았다.

 

그거 잘 됐네. 내일 아침에 당장 갈까.”

나야 좋지! 정말 괜찮지?”

안 괜찮은데 내가 괜찮다고 할 사람으로 보이냐.”

나한테는 가끔 그러니까?”

알긴 아네. 하지만 이번엔 진짜 괜찮으니 신경 쓰지 마.”

 

가끔 자신을 위해 거짓말을 한 다는 걸 눈치 챌 정도라면, 지금 그가 정말로 괜찮으니 저렇게 말한다는 것 정도는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루엔은 안심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빈 머그를 들고 부엌으로 향했다. 벽난로도 없는 지금 이 집에서 몸을 데울 수단으로 뜨거운 차나 커피만한 게 없지. 지금 이 커피가 벌써 3잔째이긴 했지만, 그녀는 아직 좀 더 따뜻한 걸 마시고 싶었다.

 

그래도 이 집이 나쁘진 않았지.”

? 뭐가?”

최근엔 밤마다 네가 춥다고 엉겨 붙어서 좋았거든. 난 별로 안 추워서 네가 핑계 대는 줄 알았는데.”

 

덜그럭. 머그와 티스푼이 부딪히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인스턴트 커피가루를 물에 녹이던 손이 일시정지 버튼을 눌린 것 마냥 부자연스럽게 멈췄다. 엉겨 붙었다니. 확실히 추워서 품속에 파고들곤 했으니까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꼭 저런 식으로 표현해야 했을까.

 

우리가 핑계 대면서 안겨야 할 사이였어?”

아니지. 하지만 난 아직 안 추워서 안 믿겼거든.”

그래, 좋겠네. 이제 추워도 그냥 코트라도 입고 잘래.”

코트 다 숨긴다.”

 

어쩌라는 거야, 진짜.’ 커피를 젓던 스푼을 꾹 쥐고 데스페라도를 한번 흘겨본 루엔은 다시 제가 앉았던 그 자리로 돌아왔다. 그와 마주볼 수 있는, 가장 가까운 자리로.

 

그렇게 많이 마시면 배부를 것 같은데.”

그다지. , 배고프다는 생각은 확실히 안 들긴 한데 물배는 금방 꺼지잖아?”

잘 먹어서 좋네. 아니, 잘 마셔서 라고 해야 하나.”

 

물론 너무 먹는 것도 걱정 되지만, 식욕이 없어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비실비실한 것 보다는 잘 먹는 게 훨씬 낫다. 여름만 되면 물이나 술 외엔 식욕이 없어 끼니를 거르려 했던 자신을 떠올리며 데스페라도는 진심으로 안도했다. 사람은 조금 굶는다 해서 바로 죽진 않지만, 그게 연인의 일이라면 누구든 심정이 달라지는 법이지. 물론 그건 루엔도 예외가 아니었다.

 

난 어디 가서 굶어 죽을 사람은 아니니 너야말로 밥 거르지 마. 뭐 요즘은 잘 먹지만.”

춥다고 끼니를 거르진 않으니까 말이지. 애초에 추위에 약하지도 않고.”

그래도 너무 방심하면 독감 걸려서 골로 가는 수가 있어. 나 진지해. , 생각난 김에 미리 겨울용 코트 꺼내놔야지. 내일 입고 가게.”

 

원래도 행동력이 넘치는 여자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적어도 생각을 실행에 옮기는 건 잔을 다 비운 후가 더 좋지 않을까. 데스페라도는 기껏 타온 커피를 반 정도밖에 안 비우고 일어서는 루엔을 막지는 않았지만, 내심 미지근해지는 커피가 아까운지 주인이 떠난 머그에 손을 뻗었다.

 

코트 찾는 김에 짐도 그냥 정리할까. , 그거 마실 거니까 버리지 마.”

그러는 사이에 다 식는다? 그냥 마시고 해.”

안 해놓으면 까먹는단 말이야.”

정리할 짐도 얼마 없잖아?”

 

일 년에 몇 번씩이나 거처를 옮기는 자신들은 사유재산이라고 할 만한 것이 별로 없었다. 옷과 총, 돈과 평소 늘 가지고 다니는 소지품들. 챙길 것이라곤 이게 전부인데, 벌써부터 서두를 이유가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루엔이 조급해하는 원인은 따뜻함을 향한 갈망으로밖에 안 보였다. 이 추운 곳을 떠나, 벽난로가 있는 집에서 불을 때고 편하게 잠들고 싶다는 간절함. 그게 자꾸 그녀의 행동을 부추기는 거라면, 제가 할 일은.

 

하여간.”

 

더워하는 상대방에게 맨몸으로 해 줄 수 있는 일은 그리 많지 않지만, 다행스럽게도 추워하는 상대에겐 아주 간단하게 응급처치를 해 줄 수 있다. 이럴 땐 사람이 온혈동물인 게 참으로 좋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여름에는 그다지 고맙지 않지만 말이다.

발소리를 죽여 그녀의 뒤로 다가간 데스페라도는 루엔이 놀라지 않게 천천히 미지근한 몸을 껴안았다. 한 팔은 허리를 감싸고 한 팔은 어깨를 감싼 채 이마를 기대면, 품속의 몸이 살짝 떨리는 것이 생생하게 느껴진다. ‘, 진짜.’ 한숨 같은 혼잣말을 중얼거린 루엔은 가방을 뒤적거리던 팔을 멈추고 그의 손을 잡았다.

 

놀랐잖아.”

별로 안 놀란 것 같은데.”

소리 지를 정도는 아니었을 뿐이지, 놀랐거든?”

 

그래, 그래.’ 성의 없는 대답을 한 그는 열기가 피어오르는 그녀의 목덜미에 뺨을 가져갔다. 자신보다 훨씬 높은 체온. 익숙하고 기분 좋은 체취. 분명 그녀를 위해 팔을 벌린 것이었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제 쪽이 더 편안해 하고 있다. 그 사실에 조금 미안해지려 할 때 쯤, 제 손을 만지작거리던 루엔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따뜻하다.”

그거 다행이네.”

그런데 이렇게 엉거주춤하게 계속 안고 있을 거야?”

놔줄까?”

.”

 

이 상황에서 망설일 이유가 있나. 그는 참지 않고 웃어버렸다. ‘웃지 마.’ 자신이랑 바짝 붙어있는 몸을 툭툭 치며 투덜거린 루엔은 멈췄던 손을 다시 움직였고, 가방 속 깊은 곳에 숨어있던 제 겨울 코트를 꺼냈다.

 

, 잠깐 창가에 널어놓고 입어야겠지? 가방 안에 처박혀 있었으니까.”

네 옷이니까 너 좋을 대로 해.”

흐음.”

 

툭툭. 루엔은 코트에 붙은 먼지를 손으로 털어냈다. 이 코트도 벌써 몇 년 째 입은 거더라. 데스페라도와 만나고 얼마 안 되어 산거니, 오래되긴 했다. 이렇게 멀쩡하게 입을 수 있는 게 기적일 정도지. 제가 총이라도 잘못 맞았다간, 분명 못 입게 되어 버렸을 텐데.

낡은 코트 하나에 별별 생각을 다 하던 그녀는 대단한 결심이라도 한 사람처럼 비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럼 널어야지. 그런 김에 코트에서 가방 냄새 빠질 때 까지만 안고 있게 해줄게.”

자기도 좋으면서.”

뭐 왜 뭐.”

 

부정은 하지 않은 루엔의 귀 끝이 붉게 물들었다. ‘이런 건 참 귀엽다니까.’ 속으로만 중얼거린 데스페라도는 그녀가 움직이기 편하게 팔의 힘을 살짝 풀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