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2D/Dungeon & Fighter

드림커플 2세 합작 / 15년


※ 데스페라도 드림, 오리주 주의

※ 합작 홈 주소 → http://moonmist.wix.com/dreamjunior

 

 


15

written by Esoruen

 


 

“…그래서, 이게 그 결과물이다. 이거지?”

“그래, 왜? 생각보다 초라해서 실망했어?”

“뭐 그런 건 아니지만, 생각보다 거창하진 않아서”

 

‘그놈의 말투 하고는’ 마이스터는 제 발명품을 평가하는 데스페라도를 못마땅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몇 년을 지나도 저놈의 말투는 부드러워 질 줄을 모른다. 무법지대에서 살아가는 이들에게 뭘 바라겠느냐 만은, 그래도 몇 년을 걸쳐 결과를 낸 사람에게 저런 평가는 너무하지 않은가.

 

“원래 기계는 크기의 거창함보다 내구성이라고. 데스페라도”

“그래서, 이게 차원을 오가게 해준다고?”

“사실 차원, 이라고 하기 보다는 타임머신에 가깝지. 공간과 시간을 넘어 과거와 미래를 오가는 기계니까. 뭐, 지금은 과거밖에 안 되지만”

“미완성이다 이건가? 남에게 미완성 작을 보여주다니. 너도 많이 변했군”

“네가 할 말은 아니지, 그거”

 

날카로운 반론에 데스페라도는 웃을 수밖에 없었다. 확실히, 변하지 않은 점도 많았지만 변한 것은 마이스터보다 자신 쪽이 많았다. 그건 도저히 부정할 수도 없었고, 부정하고 싶지도 않았다.

한때 무법지대의 사신이자 카르텔 사냥꾼이라 불리던 그는, 인생의 유일한 파트너와 부부가 되었고 그 사이에서 자식도 둘이나 낳았다. ‘그렇게 붙어 다니더니 결국 살림을 차렸구나!’ 주변 사람들의 평가는 드디어 그렇게 되었냐는 말투였지만, 적어도 두 사람에게는 이것이 큰 변화가 되었다. 떠돌아다니던 생활을 그만두고, 어딘가에 정착해 자식까지 낳는다니. 자신들이 정말 이런 ‘평범한’ 생활을 하게 될 줄 누가 알았을까.

 

“마이스터 삼촌!”

 

덜컥. 열린 연구실 문으로 달려 들어온 것은 아직은 어린 여자아이였다. ‘이런’ 기다렸다는 듯 튀어나온 감탄사. 기계 설명을 마저 하려고 했던 마이스터는 제가 이야기 하고 있는 남자와 쏙 빼닮은 소녀를 보고 부드럽게 웃어보였다.

 

“안녕, 아이린. 동생이랑 엄마는?”

“지금 오고 있어요! 라이가 다리 아프다고 업고 오는 중이거든요!”

 

아이린. 그렇게 불린 소녀는 덥석 마이스터의 품에 안긴 후 데스페라도를 보았다.

 

“아빠! 먼저 가면 어떡해!”

“미안. 거기 삼촌이 재촉했으니 원망은 저쪽으로 해”

“뭐야, 왜 나보고 뭐라고 하는 거야?”

 

뜬금없는 책임전가에 마이스터는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그 품에 안긴 아이린은 아빠의 농담에 까르르 웃을 뿐이었다. 부녀에게 한꺼번에 놀림거리가 되다니. 그는 곤란하다는 듯 한숨을 쉬면서도 속으로는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 데스페라도에게 이런 잔망스러운 딸이 생기다니. 결혼은 물론 연애도 제대로 할 것 같지 않았던 그에게 가정이 생긴 건, 모두 그녀 덕분이었다.

 

“아이린, 먼저 가 버리면 어떡하니!”

 

어쩜 모녀가 저렇게 똑같은 말을 하며 들어올까. 마이스터는 작은 남자아이를 업고 들어오는 루엔을 보고 실소를 짓고 말았다. 원래 자식과 부모는 닮는다고 했지만, 저렇게 까지 닮을 필요는 없을 텐데.

 

“으응, 하지만 빨리 보고 싶었는걸! 마이스터 삼촌을!”

“그래도 길 잃으면 어쩌려고… 아, 다 왔으니 내리렴. 라이엇”

“네에”

 

등에 업혀있던 아이는 얌전히 그녀의 등에서 내려와 데스페라도의 곁으로 갔다. 이제 겨우 10살쯤 되었을까. 루엔과 데스페라도를 적당히 반씩 닮은 소년은 아버지의 다리에 찰싹 달라붙어 기계를 훑어보았다.

 

“아무리 힘들어도 직접 걸어야지”

“네, 아빠”

“그리고 이 기계는 병기가 아니니까 무서워 할 필요 없어”

 

읏챠. 작은 기합과 함께 라이엇을 안아든 그는 마이스터에게 설명을 계속 해보라는 듯 눈짓했다. 마이스터는 아이린을 조심스럽게 내려놓고, 제가 만든 기계에 붙어 여러 기능을 마저 설명해 나갔다.

 

“…그러니까 정확하게 요점만 말하자면, 이 기계로 갈 수 있는 과거는 약 50년 전까지. 도착한 세계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은 현실에서 배제 될 거야. 이른바 평행세계라고 할까. 시란 씨가 예전에 열었던 차원의 문과 같은 원리지”

“흐음, 역시 마이스터는 굉장하구나!”

 

루엔은 흥미롭다는 듯 반응했지만, 아이들은 그의 설명이 너무 어려운지 멀뚱멀뚱 기계 조작판과 마이스터만을 번갈아 보았다. 이럴 때 필요한 건 역시 부모의 눈높이 교육이겠지. 데스페라도는 제 자식들을 위해 쉬운 용어로 기계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그러니까, 이걸로 과거에 갈 수 있는데, 거기서는 무슨 사고를 쳐도 지금 아무 문제도 없다는 뜻이야”

“아하!”

“그런 거구나”

 

아이들은 단번에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저런 설명은 부모만이 가능한 걸까. 자식도 처도 없는 마이스터는 보기만 해도 속이 근질근질해지는 가족애에 몸을 떨었다.

 

“아, 그리고 과거에서 이쪽으로 올 때는 자동으로 소환되는 식으로 만들었어. 귀환 시간을 설정하면 되는데, 아직 최대는 24시간 밖에 안 돼”

“24시간이면 하루잖아? 그것도 충분히 대단한데”

“이정도야 기본이지, 내 목표는 적어도 3일이거든”

 

루엔의 칭찬을 당연하다는 듯 받아들인 그는 어깨를 으쓱이고 기계에서 떨어졌다. 마음 같아서는 이 기계의 탄생 비화나 실패담, 조정 과정에서 겪은 어려움 등에 관해서 실컷 떠들고 싶지만, 무법자들이 기계에 뭘 알겠는가. 애초에 메카닉이 아니면 누구라도 알아듣기 힘들 이야기였으니, 그는 화제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

 

“그것보다 전에 이야기 한 그 사건, 결국 잘 해결됐어. 방에서 차라도 한 잔 하며 이야기 하자. 애들은 주스 정도면 될까?”

“아냐. 그건 애들 앞에서 할 이야긴 못 되지. 아이린, 라이엇. 얌전히 놀고 있어라. 아빠랑 엄마는 잠시 이야기만 하고 올 테니까”

 

‘네에’ 데스페라도의 말에 합창하듯 외친 아이들은 방금 전까지 설명해줬던 기계로 달려가 여기저기를 살펴봤다. 저건 장난감이 아닌데, 설마 망가뜨리진 않겠지. 불안감에 찬 눈으로 아이들을 바라보던 마이스터는 루엔과 데스페라도를 방으로 들여보낸 후, 마르바스의 하인을 불러 명령했다.

 

“애들이랑 좀 놀아줘, 사고 못 치게 하고”

 

삐빅. 명령을 받아들인 마르바스의 눈이 빛났다.

사실 메카닉들의 기계조립을 돕기 위해 만들어진 그것이 ‘아이들과 놀아준다’라는 것은 힘든 일처럼 보였다. 하지만 자신이 직접 나서 놀아주는 것이 아니라면 이야기가 달라지는 법. 마르바스의 하인은 기계에 찰싹 달라붙어있는 아이들에게 날아갔다.

 

“아! 말밥이다!”

“…그런 이름 아니지 않았어? 누나”

“이거나 그거나! 와! 안녕!”

 

앙증맞은 크기에 날아다니기까지 한다. 단지 그것만으로도 두 아이의 흥미를 끌기엔 충분했다. 마르바스는 자신을 껴안는 아이린과 쓰다듬는 라이엇에게 최대한 얌전히 ‘장난감’처럼 굴어주었다.

아니, 정확하게는 그렇게 굴기만 할 생각이었는데.

 

“그런데 누나, 아까부터 자꾸 뭘 보고 있는 거야?”

“그거야 당연하잖아, 아까 분명 들었지? 이거, 과거로 갈 수 있다고!”

 

아이린은 마르바스의 하인을 안은 채 기계 속으로 들어갔다. 작은 옷장처럼 생긴 그 타임머신은 명백히 ‘어린아이가 건들만한 물건’은 아니었지만, 아이린은 스스로를 어린애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13살이면 다 컸지!’ 언제나 그렇게 말하고 다니는 그녀는 제 아버지가 한 말은 이미 다 까먹은 건지 조작판을 여기저기 만졌다.

 

“누, 누나. 그만 두는 게 좋지 않을까?”

“라이는 겁쟁이라니까~ 죽기야 하겠어? 라이는 안 궁금해? 엄마 아빠 전성기 시절!”

“그, 그거야 궁금하지만”

 

라이엇은 제 마음대로 돌아갈 시간과 장소를 입력하고 있는 아이린을 말릴 수 없었다. 도대체 누굴 닮은 건지, 부모를 쏙 닮아 자기주장이 넘치는 누나와 다르게 소심한 라이엇은 부모님과 마이스터가 있을 방만을 힐끔힐끔 쳐다보며 어쩔 줄 몰라 했다.

제 누나가 왜 이런 짓을 벌이는 가에 대해서는 자신도 공감하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이 모두 입을 모아 말하는 제 부모님의 공적. ‘무법지대 악몽’과 ‘사신’의 전성기에 대한 이야기. 거대조직 카르텔을 아래에서부터 무너뜨려 나갔고, 이윽고 황도군과 함께 수장 란제루스의 목까지 땄다는 무용담은 너무 들어 질릴 정도였다.

‘물론 아빠와 엄마는 대단하지만, 그래도 저건 오버 아냐?’

아이린은 무슨 옛날 전설에나 나올 법한 부모님의 업적을 늘 수상하게 여겼고, 그건 라이엇도 마찬가지였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건 ‘의심’ 이라기 보단 ‘호기심’ 이었다. 아무리 입과 입을 넘어 부풀려 진 업적이 저것이라 하더라도. 원래 실력이 대단해야 소문도 부풀려지는 것이 아니던가.

 

“자! 15년 전, 돌아오는 시간 24시간 후. 좋았어! 말밥아, 이제 뭘 누르면 돼?”

 

삐빅. 명령에 너무나도 충실한 그 기계는 애보기가 아닌 제 본래 본분을 다하기 위해 아이린의 질문에 친절하게 답했다. 왼쪽 끝의 버튼과 스위치를 차례대로 가리킨 마르바스의 하인은 기계 밖으로 나가, 전원 스위치를 넣었다.

 

“좋았어! 가자 라이!”

“자, 잠깐 누나! 장소 설정은?”

“괜찮아, 괜찮아! 우리 집 위치로 설정해 뒀으니까!”

 

‘우리 집?’ 라이엇은 그 말을 듣더니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분명 제 부모님들은, 자신들을 낳기 전 까지는 떠돌아다니는 생활을 했다고 들었는데.

 

“누나, 잠깐!”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기계가 작동된 후였다.

잠시 기절하기라도 한 걸까. 정신을 잃고 있던 라이엇은 지끈거리는 두통과 함께 눈을 떴다. ‘분명, 누나가 기계를…’ 방금 전까지의 일을 차근차근 떠올리던 소년은 차분하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제 옆에는 누나가 잠들어있고, 주변에는 익숙한 듯 낮선 건물들이 늘어서 있다.

 

'정말, 과거로 온 걸까?'

 

라이엇은 제가 있는 곳이 어디인지 잘 알고 있었다. 비록 생김새가 조금 다른 건물도 있고, 원래 건물이 있어야 할 곳이 공터인 곳도 있었지만 여긴 분명 제 가족이 사는 마을이 확실했다.

 

“누나, 누나 일어나 봐. 누나”

“응…? 으으… 라이, 5분만 더 잘게…”

“그게 아니라, 누나!”

 

탕. 익숙한 총성에 라이엇은 고개를 들었다. 저 멀리서 들려오는 수많은 발자국 소리, 그리고 그 발자국 수만큼이나 들리는 총성. 자신들이 정말 과거에 와 있다면, 저 소음의 근원은 분명 카르텔일 텐데. 조무래기수준의 잔당이라면 자신도 누나도 얼마든지 처리 할 수 있었지만, 수가 저렇게 많으면 아이인 자신들은 저항 할 수 없으리라.

 

“누나! 빨리 일어나!”

 

쾅. 두 사람이 기대고 있는 나무 벽이 부서지는 소리에 아이린은 겨우 깨어났다. ‘뭐지?’ 태평한 반응을 보이며 눈을 비비고 일어난 그녀는 제 옆으로 쏟아져있는 나무파편들과 시체에 숨을 삼켰다.

 

“여기 꼼짝 말고 있어, 라이엇!”

 

아무리 13살 어린애라도 무법지대 사람이라면 리볼버는 필수인 법. 자연스럽게 리볼버를 뽑아든 아이린은 제 동생부터 지키기 위해 시체가 넘어온 방향으로 뛰쳐나갔다.

 

“잠깐, 위험해…!”

 

라이엇은 적이 어디 있을지도 모르는데도 거침없이 뛰어가는 누나를 잡을 수 없었다. 이미 부서진 나무 벽 너머로 사라진 아이린을 쫒아가지도, 부르지도 못하던 그는 결국 스스로 살아남기 위해 총을 뽑았다.

그런데,

 

“얘 꼬마야. 여기서 뭐하니?”

 

차가운 금속의 감촉이, 제 뒤통수에 닿았다.

‘죽었다’ 라이엇은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생각하고 말았다. 자신은 분명 아무 기척도 느끼지 못했는데, 제 뒤로 누군가 다가와 있었다니. 만약 상대가 이대로 방아쇠를 당긴다면, 분명 자신은 죽을 것이었다. 이제까지 살아오며 한 번도 겪지 못한 ‘죽음의 위기’ 소년은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저, 저는…”

 

덜덜 떨면서도 총을 내려놓지 않는 그는 겨우 눈동자를 움직여 제 뒤의 상대를 바라보았다.

아. 짧은 감탄사를 내뱉은 라이엇은 너무 놀라 필사적으로 잡고 있던 총을 놓치고 말았다. 자신을 내려다보며 총을 겨누고 있는 사람은, 제가 아는 것 보다 젊었지만 분명 자신을 낳은 여자와 똑같이 생긴 사람이었다.

 

“…뭐야, 우는 거니?”

 

루엔은 도저히 적으로 보이지 않는 아이의 표정에 리볼버를 거두었다. 자신이 총구를 겨눈 상대가 누군지도 모르는 그녀는 라이엇이 놓친 총을 자그마한 손에 도로 쥐어주며 웃었다.

 

“울지 마. 미안, 이런 어린 애가 카르텔일리도 없는데, 누나가 너무했지?”

“아, 그… 저…”

 

이건 무슨 우연일까. 아니, 어쩌면 운명일지도 몰랐다. 그 넓은 무법지대를 떠돌아다녔던 과거의 부모님이, 15년 전으로 무작정 돌아온 자신들과 마주치다니. 이건 과학이라기 보단 마법 같은 것에 가까운 기적이었다.

 

“그나저나 너… 눈이 예쁘구나!”

 

울고 있는 라이엇의 얼굴을 닦아주던 루엔은 진심으로 감탄했다. ‘정말 엄마다’ 라이엇은 그 한마디에 완전히 긴장이 풀려 그대로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으, 으아앙!”

“음?! 아니. 자, 잠깐. 큰 소리로 울면 안 돼! 아직 근처에…”

“엄마…!”

 

다짜고짜 그녀의 품에 안긴 라이엇은 루엔의 허리를 안고 요란하게 울었다. ‘우리 라이엇은 눈이 참 예뻐’ 부모의 눈 색을 한 쪽씩 물려받은 자신을 보며, 언제나 제 어머니가 해주던 말. 라이엇은 지금 쯤 자신들이 없어져 걱정할 부모와 뛰쳐나간 누나가 걱정되어 울음을 멈출 수 없었다.

 

“아… 그… 흠흠, 일단 진정해야지?”

 

라이엇의 입장에선 더없이 반가운 일일지 몰라도, 루엔의 입장에서는 지금 상황은 상당히 황당할 수밖에 없었다. 다짜고짜 전장에서 만난 아이가 자신을 엄마라고 부르다니. 보통 같으면 ‘내가 아줌마로 보이나’ 라며 화가 날 법도 한데…

 

‘뭐지, 이거’

 

이상하게도 화가 나지 않는 제 마음에 루엔은 얌전히 아이를 안아 올렸다. ‘뚝 그쳐야지?’ 부드러운 말로 품안의 소년을 달래던 그녀는 문득 이 아이의 얼굴에서 익숙한 남자의 그림자를 느꼈다.

지금 보니 이 아이, 데스페라도를 닮았다.

이목구비나 턱선, 그리고 눈매가 제 연인과 꼭 닮아있는 아이. ‘설마’ 루엔은 고개를 저었지만 묘한 기분을 떨칠 수 없었다. 데스페라도에게 이만큼 큰 애가 있을 리 없다. 그는 아직 젊었으니까. 그리고 그 이상으로 제 자식일리도 없다. 설마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제 아이가 태어났을 리가 없으니까. 하지만, 만약 이 아이가 데스페라도의 아이라면, 자신을 엄마라고 부른 건…

 

“…아가, 이름은?”

“라이엇…”

“라이엇. 음. 그래. 그럼 미안한데 라이엇, 누나를 꼭 안고 있으렴”

 

아직 카르텔 대원들이 남아있으니 여기서 모든 걸 물을 수는 없었다. 라이엇을 꼭 껴안은 채 총알을 채워 넣은 그녀는 카르텔을 찾아 다시 걸음을 옮겼다.

 

 

 

아이린이 소리의 근원지로 뛰쳐나가 가장 먼저 본 것은 잔뜩 쓰러져있는 시체와 엉망이 된 거리였다. 얼마나 대단한 총격전이 벌어진 걸까. 대여섯 명의 사람 사이마다 부서진 물건들이 널브러져 있는 골목길은 몸집이 작은 아이린이어야 겨우 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 난잡했다.

 

“우와…”

 

확실히 과거에는 지금보다 더 치안이 개판이었구나. 새삼스러운 사실을 느끼며 시체들 틈을 지나가던 아이린은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누구인진 모르지만, 이렇게 여러 명을 골로 보낼 정도면 대단한 실력자거나 제법 큰 무리일 텐데, 아직 이 근처에 있다면 자신도 위험해 질 수 있고 제 동생의 목숨도 위험했다. 가능하면 처리하고, 그럴 여유가 없다면 정찰만 한 후 돌아가 남동생을 챙긴다. 머릿속으로 완벽한 시나리오를 짠 자신을 칭찬하던 소녀는 쓰러진 시체들 틈, 터져 나온 신음 소리에 화들짝 놀랐다.

 

“으윽…”

“히익!”

 

탕. 습관적으로 총구를 돌린 아이린은 반쯤 일어선 시체의 머리를 쏘았다. 죽은 줄 알았는데 살아있었던 걸까. 커다란 몸뚱이는 그대로 쓰러졌지만, 이번에는 다른 쪽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꼬마애가 겁도 없이 뭐 하는 거야?”

 

제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는 젊은 남성의 것이었다. ‘큰일났다’ 등골이 오싹해진 아이린은 다시 한 번 방아쇠를 당기려고 했지만, 이번에는 어림도 없었다.

재빠른 속도로 아이린의 손을 쳐낸 습격자는 그대로 가느다란 손목을 낚아채었다.

 

“아얏!”

“보니까 카르텔은 아닌 것 같은데, 여기서 뭘 하고 있었지? 지갑이라도 털러 왔나?”

“나를 누구로 보는 거야?!”

 

버럭 화를 낸 그녀는 기세 좋게 상대를 올려다보았다가 할 말을 잃었다. 자신과 똑같은 머리색, 제 동생과 쏙 닮은 눈매. 태어났을 때부터 가장 많이 봐온 남자의 얼굴.

데스페라도는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아이린의 표정에 인상을 찌푸렸다.

 

“…뭘 그렇게 빤히 봐? 이렇게 잘생긴 사람 처음 보냐?”

“데스페라도?”

“뭐야, 날 알아?”

“맙소사…”

 

자신도 모르게 감탄사를 터뜨린 소녀는 그제야 목소리부터 제가 알던 아버지와 똑같음을 인지했다. 아까 전까지는 너무 놀라 익숙한 목소리인줄도 몰랐는데. 갑자기 표정이 확 풀린 그녀는 다짜고짜 젊은 아버지의 다리에 매달렸다.

 

“아빠!!”

“…허?”

“만나러 왔어! 15년 후의 미래에서!”

 

이 꼬맹이는 무슨 소리를 하는 걸까. 데스페라도는 어이가 없어서 전의마저 상실하고 말았다. 15년 후 미래? 만나러 와? 무엇 하나 지금 바로 이해하기엔 설명이 부족한 말들에 그는 난감하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는데. 네가 미래에서 왔다고?”

“응! 마이스터 삼촌 덕분에요!”

 

마이스터. 익숙한 사람의 이름에 데스페라도의 의심도 조금은 풀린 걸까. 꽉 잡았던 손목을 놔준 그는 주변을 둘러보다가, 아이린의 얼굴을 덥석 잡았다.

자세히 보니 이 꼬마, 루엔을 닮아있는 것 같기도 하다.

머리색이나 눈동자의 색은 그녀보다는 자신에 가깝지만, 눈매나 웃는 모습은 영락없는 제 연인의 판박이다. 만약 정말로 이 아이가 미래에서 왔다면, 이 아이의 어머니는…

 

“이름이?”

“저요? 맞춰봐요~”

“장난하지 말고. 이름이 뭐야?”

“재미없게~ 아이린이에요, 아이린”

 

아이린. 제 아이의 이름을 중얼거린 그는 주변을 둘러보다가 몸을 숙였다. 다른 아이라면 이게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었겠지만, 미래에서 온 소녀는 그의 생각을 읽을 수 있었다. 제 아버지는, 언제나 자신을 안아주려고 할 때 이렇게 앉았으니까.

당연하다는 듯 품에 안기는 아이린을 본 그는 기가 막혀 웃고 말았다. ‘일단은 자리를 떠야 하니 안겨라’ 그렇게 말하려고 한 자신이 바보같이 느껴졌다.

 

“…혹시나 해서 묻는다만, 네 어머니가 내 애인이길 바란다”

“글쎄요~?”

“…루엔 맞군. 장난치는 게 딱 붕어빵이야”

 

후우. 안심한 듯 낮게 한숨 쉰 그는 루엔과 만나기로 한 곳으로 돌아갔다. ‘이 애를 보면 뭐라고 할까’ 쓸데없는 오해를 하지 않도록 차근차근 설명해 줘야겠지. 혼자서 온갖 생각을 하며 임시거처로 온 그는 제 여자 품에 안겨있는 낮선 사내아이를 보고 굳고 말았다.

 

“아, 데스페라도 왔어?”

 

간식으로 사온 과자를 나눠먹고 있던 루엔과 라이엇은 반가운 얼굴로 데스페라도를 맞이했다. ‘거기 애새끼는 누구야’ 반사적으로 그런 말이 튀어나올 뻔 했지만 다행이도 그보다는 아이린이 빨랐다.

 

“라이!”

“누나!!”

 

아하. 데스페라도와 루엔은 서로를 알아보는 아이들을 보고 더 이상 자세한 것을 묻지 않았다. 제가 겪은 황당한 일을 제 연인도 겪었구나, 그렇게 단번에 이해한 두 사람은 나란히 식탁에 앉아 아이들에겐 들리지 않을 소리로 속닥거렸다.

 

“정말 저 애들, 우리 애들일까?”

“몰라. 미래에서 왔다는데 어떻게 믿어? 확실히, 둘 다 널 닮긴 했다만”

“어, 데스페라도 쪽을 더 닮지 않았어?”

“…아들 쪽은 몰라도 딸은 영락없이 네 복사판인데”

“아니지, 머리도 은발이고. 딸도 너 닮았어”

 

두 사람이 옥신각신 하는 사이 아이들은 자신들 나름대로 지금 상황을 정리해 보려고 노력하는 것 같았다. 지금 자신들이 와있는 집은 미래에도 자신들의 집은 아닌 폐가였다. 아마, 15년 후에는 완전히 새로 지어지는 건물이거나 없어져서 모르는 건물이겠지. 그렇다는 건 아직 두 사람이 정착하기 전이라는 소리인데. 이렇게 운 좋게 만나다니. 라이엇은 안도하면서도 누나의 성급함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누나, 어쩌려고 그런 거야? 게다가 오자마자 혼자 뛰쳐나가고…”

“그거야 당연히 널 지켜주려고 한 거지! 그리고 이렇게 만났으니 됐잖아?”

“으음, 그건 그렇지만…”

“그리고 어차피 하룻밤 자고 나면 돌아갈 건데 뭐. 지금 엄마아빠랑 놀다 가자!”

 

아아, 이 긍정적인 성격. 라이엇은 찍소리도 못하고 누나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이제 위험하다고 할 상황도 지나갔고, 이렇게 부모님도 만났으니 자신들은 괜찮겠지.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얘, 라이엇”

 

과거의 어머니가 자신을 불렀다.

 

“네?”

“잠시 이리 와 볼래? 너도”

“아이린이에요, 아이린!”

“그래? 아이린. 아이린도 이리 와 봐”

 

루엔은 자신들의 맞은편에 아이들은 나란히 앉혀놓고 헛기침을 했다. ‘가족이라고 하기엔 심하게 어색한 풍경이군’ 루엔의 옆에 앉아있던 데스페라도는 맞은편의 아이들을 보고 씁쓸한 감상을 내뱉었다. 막연하게, 언젠가 자신들도 결혼하고 아이를 낳지 않을까 생각한 적은 있지만 이렇게 미래에서 제 아이들이 찾아오게 되다니.

 

“그래, 일단 미리 말하자면 우리가 너희를 의심하는 건 아니지만 확인 과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물어볼 게 있어. 여기로 오게 된 과정이랑, 너희들에 대해서 조금 더 자세히 말해줄 수 있을까?”

“…엄마”

“응?”

 

제법 진지한 표정으로 아이들에게 설명하던 루엔은 대답 대신 자신을 부르는 딸에게 시선을 돌렸다. 아이린은 약간은 얼이 빠진 것 같은 표정으로 루엔을 보다가, 작게 중얼거렸다.

 

“옛날부터 추궁하는 방식이 이랬구나…”

“…어?”

“엄마는 늘 우리가 과자를 집어먹거나 밖에서 장난을 치고 오면 이렇게 앉혀놓고 엄청 길게 말을 늘어놓았거든요!”

“풉!!”

 

아이린의 말에 웃음이 터진 데스페라도는 방금 전까지 심각한 얼굴로 있었다는 것도 잊어버리고 입을 막은 채 웃어버렸다. 아무래도 정말로 이 애들은 자기 자식이 맞는 모양이다. 아주 사소한 것에서 강한 확신을 가진 그는 루엔에게 속삭였다.

 

“아무래도 맞는 것 같은데”

“뭘 웃어!”

“안 웃게 생겼냐. 너도 진짜 한결같은가 보구나. 안 그래?”

“시끄러워!”

 

얼굴이 새빨개져서 부끄러워하던 루엔은 겨우 진정하고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사실 이 애들이 자신들을 해치러 왔다는 생각은 들지 않으니, 진짜 자식인가 아니냐는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아니, 사실 궁금하기도 했지만. 우선은 안전이 중요했으니까. 20대 초반의 그녀는, 그런 여자였다.

 

“…어쨌든, 그럼 언제 미래로 돌아가는 거야?”

“하루 뒤요!”

“하루인가”

 

길다고 하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이다. 무엇보다, 그 정도 시간이라면 이 두 아이를 돌보는 게 부담은 되지 않으리라. 데스페라도와 루엔은 길게 논의할 것도 없이 미래의 제 자식들을 데리고 있기로 결정했다.

 

“…일단은 저녁 먹을 거니까, 장 좀 보고 와 데스페라도. 난 애들 볼게”

“그러지”

 

갑자기 평소의 대화도 부부 같게 느껴지는 건 아이들 때문일까. 어차피 5년 넘게 같이 살았으니 이미 사실혼 관계라고 봐도 좋긴 했지만, 그래도 연인과 부부는 무게가 다른 법이었다.

“이봐, 그… 라이엇”

“네?”

 

돈을 챙기고 나가려던 그는 대뜸 제 아들을 불렀다. ‘따라 와’ 그렇게 말하듯 손을 까딱인 데스페라도는 루엔에게 물었다.

 

“괜찮지?”

“뭐야, 제대로 지켜줘야 해. 알지?”

“거 잔소리는. 가자”

“네…”

 

분명 어제까지만 해도 늘 보던 아버지인데, 젊다는 이유로 이렇게 어색할 수 있을까. 라이엇은 조심스럽게 데스페라도를 따라 밖으로 나갔다.

 

“미래는 살만하냐?”

 

데스페라도는 대뜸 그렇게 묻고 손을 내밀었다. 라이엇은 대답을 하려다가 우선 손을 잡고 고개를 끄덕였다.

 

“카르텔은 없어요. 아니, 거의 없다고 해야 하나… 대부분 괴멸했어요. 엄마랑 아빠 덕에”

“그거 다행이네”

 

엄마, 아빠. 너무나도 어색한 단어에 그는 웃어버렸다.

 

“너희 엄마는, 그…”

 

뭐라고 말을 꺼내려던 데스페라도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담배를 꺼냈다. ‘아 참’ 입에 이미 담배를 물고 나서야 제 옆에 어린애, 심지어 제 자식이 있다는 걸 자각한 그는 아깝지만 담배를 버리려다가 라이엇의 말에 동작을 멈췄다.

 

“괜찮아요, 익숙하니까”

“…그러냐…”

“저보고 ‘피울래?’ 라고 묻는걸요, 뭐…”

 

‘미래의 나는 어떻게 되어 먹은 애비인거냐’ 순간 미래의 자신에게 알 수 없는 살의를 느낀 그가 결국 담배를 뱉었다.

 

“…어쨌든, 그, 미래의 루엔도 잘 있고?”

“네”

“그래, 다행이야”

 

그 ‘다행이야’는 아까 전 내뱉었던 말과는 완전히 다른 무게를 지녔다. 진심으로 안심하는 것 같은 말투. 무법자들은 언제 죽을지 모르니까, 당연한 걸지도 몰랐다. 기특한 라이엇은 제 젊은 아버지의 걱정을 덜어주기 위해 조금 더 제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매일 ‘너희 아버지 같은 사람이랑 결혼해서 행복하다’라고 해요”

“…정말?”

“네. 두 분이서 매일 사이좋게 지내시고… 우리들 앞에서 자꾸 뽀뽀해서 누나가 징그럽다며 뭐라고 하는 걸요”

“그러냐”

 

아아. 저 흐뭇한 미소. 라이엇은 지금의 제 아버지와 똑같은 미소를 짓는 남자를 보고 말로 다 할 수 없는 편안함을 느꼈다. 비록 모습은 조금 다르더라도, 역시 제 아버지는 이런 남자였다. 남에겐 한없이 차갑다가도, 제 여자와 아이에 대해서는 끝도 없이 다정해지는.

 

“과자 좋아하냐? 사갈까?”

“네”

 

자신보다 큰 손을 꽉 잡으며, 라이엇은 과거에 와서 처음으로 편하게 웃어보였다.

 

 

 

“늦네, 살게 그렇게 많았나?”

 

루엔은 잠깐의 공복을 가시게 하기 위해 끓인 차를 홀짝이며 한숨 쉬었다. 그러게 애는 데려가지 말 것이지. 평소보다 그가 늦는 이유를 아마도 제 아들 때문이라고 생각한 그녀는 자신과 데스페라도를 쏙 빼닮은 딸을 바라보았다. 침대에 누워 신문과 책들을 뒤적거리는 아이린은 그 모든 것이 신기한지 아까 전부터 감탄사를 멈추지 못했다.

 

“저, 아이린?”

“응? 왜 엄마?”

“…그, 미래는 좀 어때? 지금이랑 많이 달라?”

 

아이린이 과거를 궁금해 한 것만큼, 자신도 미래가 궁금했다. 따뜻한 코코아와 함께 아이린에게 다가간 루엔은 슬쩍 낮선 제 딸에게 말을 붙여보았다.

 

“으음, 아무래도 많이 달라요! 카르텔도 없고, 신문지 색도 좀 다르고!”

“그래? 카르텔이 없다는 건 다행이네”

“그거야 엄마랑 아빠가 열심히 죽이고 다녔으니까요. 황도군이랑 같이”

 

아하. 루엔은 새삼 자신들이 매일 하는 사냥에 대해 떠올렸다. 그래, 확실히 데스페라도와 자신은 카르텔 사냥꾼이었지. 잘 알고 있으면서도 이렇게 ‘카르텔이 사라졌다’는 말이 어색한 것은, 아무리 죽여도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카르텔이 거대한 조직이기 때문이었다.

 

“그, 미래의 데스페라도는 어때? 좋은 아버지야? 나는?”

“그거야 당연하죠, 그러니까 이렇게 만나러 온 거 아니겠어요?”

 

아이린은 싱글벙글 웃으며 코코아를 들이켰다. ‘아무래도 거짓말은 아닌 것 같다’ 그 미소에서 의심할 구석을 찾지 못한 루엔은 조금 안심하고 말았다. 제가 미래에 좋은 부모가 되어있다면, 그 얼마나 기쁜 일인가.

 

“있잖아, 미래의 데스페라도는 어때? 그, 뭐지. 좀 아저씨 같겠지 역시?”

“솔직히 지금 보다는 아저씨죠. 그런데 아빠 젊을 때 진짜 잘생겼네요, 엄마는 좋겠다!”

“푸흡! …그렇지?”

 

미래의 딸에게 연인에 대한 칭찬을 듣다니. 실로 미묘한 기분이지만 루엔은 그저 좋았다. 저런 말 또한, 딸과 아버지 사이가 좋으니 나올 수 있는 말일 테니까.

 

“근데 지금도 잘생겼어요~ 솔직히 난 아빠 때문에 눈 높아져서 시집 못 갈 거야~”

“아직 어린애면서 무슨 시집이야, 벌써? 그리고 어쩐지 데스페라도라면 네가 남자친구만 데려와도 그대로 쏠 거 같은데”

“어떻게 알았어요?”

 

‘진짜냐’ 루엔은 농담으로 던진 말에 진지하게 대답하는 딸을 보고 할 말을 잃었다. ‘정말?’ 그렇게 묻는 눈빛으로 보자 아이린은 한숨을 푹 쉬며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아빠는 진짜~ 평생 엄마랑 날 끼고 살 거 같다고요? 전에 엄마가 아줌마들이랑 놀다 늦게 오니 왜 이렇게 늦었냐고 삐지질 않나, 내가 그냥 친구랑 잠시 집에 신발 좀 갈아 신으러 온 걸 보고 ‘같이 온 놈은 어디 사는 누구냐’ 라면서 리볼버를 만지작거리질 않나!”

“그래?”

 

아, 안 된다. 웃으면 안 된다. 들고 있는 컵이 덜덜 떨리는 게 보일 정도로 바들바들 떨면서 웃음을 참는 그녀는 듣기만 해도 평화로운 결혼생활에 감격을 금치 못했다. 이렇게 매일 개고생 하며 죽을 고비를 넘기는 보람이 미래에 확실하게 존재한다. 그건 정말로 구원과 같은 소리였다.

 

“지금의 데스페라도로선 상상이 잘 안가지만, 미래의 나는 좋겠는걸”

“그래요?”

“응. 그리고 너랑 라이엇이 행복해 보여서 무엇보다 다행이야”

 

아직 낳지도 않았는데 벌써 너무 부모 같은 감상을 내뱉었나. 루엔은 제 말에 괜히 머쓱해져 빈 잔만 만지작거렸다. 잠깐의 침묵, 어색한 그 간격을 비집고 들어온 건 돌아온 데스페라도와 라이엇의 목소리였다.

 

“다녀왔어. 밥 할 테니까 애 좀 봐”

“다녀왔습니다”

“아, 어서 와. 라이엇도”

 

루엔은 과자를 물고 돌아온 아들을 당연하다는 듯 안아주었다.

 

 

 

그날 밤은 침대가 유독 좁았다. 평소엔 두 명만 자던 곳이 갑자기 네 명이 되었으니 무리도 아니겠지. 결국 데스페라도는 미래의 제 자식들과 루엔을 위해 소파에서 자는 것을 선택했고, 루엔은 두 아이를 양 옆에 끼고 자게 되었다.

‘잠이 안 와’ 모두가 잠든 새벽까지 깨어있는 것은 라이엇이었다. 아버지도 잠든 것인지 미동이 없고, 누나와 어머니도 조용하다. 소리죽여 뒤척이던 그는 결국 살금살금 창가로 가, 어슴푸레한 바깥을 바라보았다.

15년 전의 하늘은 지금보다 밝구나, 그런 생각이 드는 건 아마 하늘을 수놓은 별들 때문일 것이다. 파워스테이션과 달리 공업과는 크게 인연이 없는 무법지대였으니 공기오염은 심하지 않았겠지만, 그래도 역시 10년이 넘는 세월동안 공기는 많이 더러워 졌을 것이다. 평소엔 볼 수 없는 하늘을 빤히 보던 라이엇은 슬쩍 창가로 의자를 가져오려다가, 커다란 그림자와 마주쳤다.

 

“안자고 뭐 하는 거야?”

“아”

 

언제 깬 걸까. 조금은 졸린 눈으로 다가온 제 아버지는 번쩍 자신을 안아 올렸다. 확 높아진 시야. 조금 더 잘 보이는 별에 라이엇은 데스페라도가 아닌 창가로 시선을 돌렸다.

 

“너 정말 네 엄마를 닮았구나”

“네?”

“루엔도 별 보는 걸 좋아하거든”

 

그건 모르는 사실이었다. 아니, 생각해 보면 자신도 누나도 어머니가 딱히 뭘 좋아하는지, 아버지는 또 무엇을 좋아하는지 생각해 본적이 없었던 것 같다.

 

“자야지. 안 졸려도 자야 키가 커”

“아빠만큼만 크면 좋을 텐데”

“그러면 잘 자야 할 거다”

 

소리 죽여 웃는 목소리는 다정했다. 안심이 되어 잠이 오는 웃음소리. 아까까진 오지 않던 졸음이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것은 모두 이 체온과 목소리 때문일까. 제 아버지를 꼭 껴안고 눈을 감은 라이엇은 잠깐 잠에 들 뻔 했지만,

 

‘탕!’

 

갑작스러운 총성에 잠이 싹 달아나고 말았다.

발포한 사람은 데스페라도였다. 한 손으로 아이를 안고, 다른 한 손으론 보이지도 않는 곳에 있는 적을 쏜 그는 라이엇을 내려놓고 속삭였다.

 

“엄마 옆으로 가, 나오지 말고”

 

방금 전까지만 해도 자신에게 다정한 목소리를 내뱉던 입에서 나온 말이라고는 생각 할 수 없을 정도로 차갑다. 라이엇은 그것에 오싹함을 느끼진 않았지만, 제가 가까이 있었던 창문에서 들린 비명에는 제대로 공포를 느꼈다.

분명 아무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는데. 언제 사람이 저기 와있었던 걸까. 그리고 아버지는, 그걸 어떻게 안 걸까.

방으로 돌아가면서도 데스페라도에게 시선을 뗄 수 없는 라이엇은 놀라운 광경에 발을 멈출 뻔 했다. 탕. 탕. 탕. 탕. 제대로 돌아보지도 않고 힐끔 보는 것만으로 방아쇠를 당기자, 유리가 깨지며 비명소리가 들린다. 마치 숨결이나 체온만으로도 적을 찾는 뱀처럼, 숨어있는 적을 모두 쏴 죽인 그가, 다시 한 번 제 아들에게 말했다.

 

“가라고”

“네, 네…!”

 

소리도 지르지 않았는데 위압감을 느낀 건 모두 그 살기 때문이다. 자신을 향한 것이 아니라 해도, 살기를 지닌 아버지란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존재였다. 과연 사신이라 불렸던 남자. 아니, 지금은 ‘사신’인 남자.

급하게 침실로 들어온 라이엇은 또 다른 총성에 멈춰 섰다.

 

“라이!”

 

아이린은 제 동생을 찾고 있었는지 급하게 달려와 라이엇을 안았다. 여기는 또 무슨 난리인가. 잠시 그렇게 생각한 소년은 곧 깨달았다. 적이 있다면, 거실에만 있을 리가 없었다.

침대에서 상체만 일으킨 루엔은 베개 밑의 총알을 꺼내 리볼버에 넣었다. 장전이 빠른 것 보다 놀라운 것은 표적을 겨누는 속도와 배짱. 제 아버지와는 다르게 보지도 않고 창문을 향해 총 세발을 갈긴 어머니는 창문에 튄 피에 이를 갈았다.

 

“타이밍 한번 거지같네”

 

제 자식들이 있을 때 습격자라니, 그 어떤 부모라도 저런 소리를 했을 것이다. 물론 그녀는 지금은 두 아이의 어머니가 아니었지만, 미래에서 온 자식이라고 다른 감정이 들 리가 없었다.

깨지고 피투성이가 된 창문 너머로, 루엔은 시선을 놓치지 않고 있다가 마지막 한발을 쏘았다. 탕. 그리고 멀리서 들리는, 무거운 것이 쓰러지는 소리.

 

“괜찮아?”

 

더 이상 자신들에게 해를 가할 것이 없어지고 나서야 루엔은 아이들에게 물었다.

아이들은 모두 무사했다. 하지만 아이린도 라이엇도, 입을 열지 않았다. 자신들이 지금 무엇을 본 것인가. 순수한 감탄과 약간의 공포, 그리고 존경심. 그건 자식이 아닌, 같은 무법지대의 총잡이로서 느끼는 감정들이었다.

 

“그쪽에도 있었나?”

“응, 전부 죽였지만”

“쯧, 이래서야 더 못 자겠군. 망은 내가 볼 테니까 애들 재워”

“알았어”

 

어차피 곧 아침이 온다. 벌써 새벽이 가까운 시간이었으니, 달도 금방 질 것이었다. 하지만 정말 자지 않아도 괜찮을까. 걱정스러운 얼굴로 아버지의 등을 보는 라이엇과 달리, 아이린은 흥분해서 동생에게 속삭였다.

 

“방금 봤어? 엄마 대단해! 하나도 안 보고 다 맞췄어!”

“으응, 굉장해…”

“아빠도 저렇게 했어? 아아, 진짜 오길 잘했어!”

 

그렇게 기쁜가. 라이엇은 방방 뛸 듯 기뻐하는 누나를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지만, 지금 자신들은 분명 죽을 뻔 했다. 어머니랑 아버지가 아니었다면 비명횡사했을지도 모르는 상황서, 그저 부모님의 강함만 기억하고 있다. 정말 배짱 하나는 13살짜리의 것이라고 볼 수가 없다.

후우. 한숨을 쉰 라이엇은 그제야 몰려오는 피로에 어머니의 품으로 도망쳤다.

잠은 눈꺼풀을 닫기 무섭게 찾아왔다.

 

 

 

어김없이 아침은 찾아왔고, 부모님은 아침밥을 먹으며 심각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차피 오늘 가는데, 조금 더 머무르자’ ‘어차피 창문도 다 박살났는데, 있기엔 좀 그렇지 않아?’ 아마 거처를 옮기는 문제로 싸우는 것 같았는데, 라이엇은 그것이 너무나도 묘하게 느껴졌다.

15년 후에는 여기서 살게 되는 사람들인데, 지금은 이렇게 떠돌아 다녀야 한다니.

정체 모를 쓸쓸함에 빵을 씹던 라이엇은 문득 그렇게 물었다.

 

“안 힘들어요?”

“뭐가?”

“돌아다니는 거…”

“별로. 네 엄마랑 이라면 지옥까지도 갈 거거든”

 

웃음기 없는 진지 한 말. 라이엇은 데스페라도의 대답에 조금 얼굴이 붉어졌다. 미래에도, 그러니까 지금의 부모님도 만만치 않게 닭살부부지만 역시 15년 전도 만만치 않다. 이쯤 되면 다른 의미로 존경스럽다. 그렇게 생각한 것은 아이린도 마찬가지인지, 작게 동생의 귀에 속삭였다.

 

“어휴, 닭살이야. 그치?”

“응… 역시 엄마 아빠는 옛날에도 이랬구나?”

“너희, 무슨 이야길 하는 거야?”

“아무것도 아니에요”

 

두 아이는 능숙하게 모른 척을 했다. ‘허’ 맹랑한 제 자식들에 헛웃음을 지은 그는 식탁에서 일어났다. 아이들은 거실에서 놀게 내버려 두고 부엌에 모인 두 사람은, 바깥에 들리지 않게 작은 목소리로 대화했다.

 

“그러고 보니 슬슬 돌아가려나, 애들”

“아직 멀었지 않았나? 어제 점심 쯤 만났잖아”

“만난 게 그때지, 온건 언제인지 모르잖아? 물어보는 게 좋을 것 같다만”

“그럼 네가 묻고 와. 난 설거지 할게”

 

그거야 어려울 것 없지. 그는 조금 떨어져있는 거실 쪽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이봐, 너희들…”

 

데스페라도의 말은 어색하게 끊겼다. 아까 전까지 자신들과 식사 한, 미래의 제 아이들은 이미 존재하지 않았다. 분명 방금 전까지는 여기 있었던 것 같은데, 이게 어떻게 된 걸까. 당황해서 멍하니 서있던 그는 도로 루엔 쪽으로 돌아왔다.

 

“가버린 것 같은데”

“뭐?! 이 잠깐의 틈에?”

“그래. 어제도 그렇고, 타이밍 한번 최악이군”

 

아아. 지나치게 안타까워하는 루엔이 접시를 내려놓았다. 역시 불쑥 찾아온 아이들이라 해도 제 자식이니, 작별 인사 정도는 하고 싶었던 걸까. 자신 또한 약간의 아쉬움을 분명히 가지고 있었으니, 데스페라도는 그녀를 이해 할 수 있었다.

 

“작별 인사 정도는 하고 싶었는데 말이지”

“그러니까 말이야. 하고 싶은 말도 있었는데”

“하고 싶은 말? 뭔데?”

 

역시 ‘건강해라’ 라던가 ‘미래의 우리를 잘 부탁해’ 같은 말이었을까. 그녀는 하루 동안이지만, 제 자식들을 꽤 예뻐했으니까. 모성애라는 것이 꿈틀거리고 있겠지. 그렇다면, 역시 저런 말들인가. 멋대로 대답을 추측하고 있을 때, 그녀가 은은한 미소와 함께 해답을 공개했다.

 

“우리를 잊지 마, 그렇게 말해주고 싶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