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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D/Dungeon & Fighter

노멀드림 계절합작 / 어느 겨울


※ 데스페라도 드림, 오리주 주의

※ 합작 홈 주소 → http://prism.raonnet.com/dream-season/


 

 

 

어느 겨울

written by Esoruen

 

 

 

겨울은 헛된 희망을 품게 하는 계절이었다. 다른 사람들에겐 어떨지 몰라도, 적어도 그녀에겐 그랬다. 이 겨울만 지나면 봄이 올 거야, 눈이 녹고 꽃이 피면 갑갑한 목도리 따윈 벗어도 돼. 그렇게 계속 미래만을 바라게 만드는 계절. 루엔에게 겨울은 얼른 지나가길 바라는 끔찍한 시기였다.

추위에 약한 그녀는 겨울이 다가오면 언제나 두꺼운 옷들을 준비했다. 감기에 걸리면 고생하니까, 안 그래도 목숨이 위험한 짓을 하며 사는데 컨디션까지 망치면 정말 죽을 수도 있었으니까. 그녀는 언제나 자신을 위해 몸을 사렸다. 그저 이 지독한 계절이 빨리 지나가기를 바라며, 따뜻해지는 날만을 기다리며.

 

‘눈이라도 많이 오면 겨울이 좋아질지도 모르는데’

 

어린애 같은 생각일지 몰랐어도, 그녀는 눈이 좋았다. 이 건조한 사막도 아름답게 보이는 착각을 만들어 주는 새하얀 눈들. 많이 쌓이지 않아 더 소중해 보이는 무법지대의 눈은 언제나 진눈깨비와 비슷한 모양을 하고 있었다.

만약 무법지대의 겨울에도 함박눈이 쏟아진다면, 자신은 겨울을 좋아할 수 있게 될까.

과자집 같은 허무한 상상이었지만 그녀는 그 망상에 긍정적 대답을 할 수 있었다. 아름답기만 하면 그깟 추위 따위 얼마든지 참아 줄 수 있지, 감기에 걸려도 괜찮을 거야. 그렇게 생각했지만 매년 무법지대에는 약간의 진눈깨비만 내릴 뿐이었다.

 

그러니까, 겨울은 헛된 희망의 계절이다. 정말로 그러했다. 루엔은 나이를 먹어 갈수록 겨울이 더 지독하게 싫어졌다.

 

그렇게나 싫어하던 겨울은 그녀가 동행이 생긴 후에도 약속한 듯 찾아왔다. 계절의 흐름만큼은 어쩔 수 없지. 아직 성인은 아니었지만 클 만큼 큰 그녀는 동상에 걸린 듯 저린 마음으로 이번 겨울을 맞이하였다.

누군가와 겨울을 맞이하는 게 몇 년 만이던가. 비록 데스페라도는 카르텔 사냥을 목적으로 함께하는 동료라고 해도 그녀는 곁에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이 그토록 반가울 수 없었다.

그리고 이것은 그녀만의 비밀이었지만, 루엔은 그를 단순히 동료로 보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언젠가 부터일까. 그가 남자로 보이기 시작한 루엔은 제가 호감을 가진 상대와 힘든 계절을 보낼 수 있다는 것을 유일한 위안으로 삼았다.

 

“올 겨울은 작년보다 더 추울 것 같다고 하더군”

“그래? 망했네…”

“망하긴 누가 망해. 얼어 죽는 일이라도 있을까봐?”

 

그는 농담이라도 던지듯 말했지만, 실제 무법지대에서 겨울에 얼어 죽는 사람의 수는 적지 않았다. 돈이 없고 힘도 없는 사람은 착취당하고 약탈당하다 얼어 죽는다. 법이 없는 세계란 그랬다. ‘자신, 그리고 그녀는 강하니까 죽지 않는다’ 데스페라도의 말에는 그런 의미가 담겨 있었겠지만, 루엔은 그 말에 진지하게 대답했다.

 

“진짜 얼어 죽으면 어쩌지”

“무법지대의 악몽이 이런 나약한 소리도 하다니, 다시 봐야겠는데”

“놀리지 마. 난 추운 건 질색이니까!”

 

정색을 하고 외치는 그녀의 표정에 데스페라도는 입을 다물었다. ‘어지간히도 싫은가 보군’ 들으라고 중얼거리는 건지 작지 않은 소리로 혼잣말을 한 그가 담배를 꺼내 물었다.

 

“난 더위 쪽에 더 약해서 뭐라 해 줄 말이 없군. 감기 같은 거도 걸리고 그러냐?”

“감기는 원래 계절이 없거든…?”

“어쨌든, 움직이는데 지장이 있을 정도로 아픈 건 아니겠지?”

 

그건 아니었다. 루엔은 언제나 겨울이면 목도리에 두꺼운 외투까지 챙겨 입을 정도로 추위에 약하긴 했지만, 한 번도 사냥을 멈춘 적은 없었다. 물론 그녀도 사람이니 감기에 걸리거나 아픈 날은 있었지만, 그건 그날 하루만 푹 쉬어주면 금방 나았다.

 

“그런 건 아냐. 싫어할 뿐이지 못 이겨낸다는 건 아니니까”

“그러면 됐어. 엄살은”

“엄살이라니, 너 여름에 두고 봐!”

“그래, 그래”

 

아아, 저 어린아이를 대하는 것 같은 태도! 루엔은 분하지만 입을 삐죽 내미는 것 외에 별다른 불만을 내보이지 않았다. 실제로 그는 자신보다 5살은 많았으니까, 제가 어린애로 보이겠지. 그리고 무엇보다도,

 

“어쨌든, 집은 옮기는 편이 좋을 것 같군. 벽난로가 있는 집이 좋겠어”

“흐음, 나 때문에 옮기는 거야?”

“감기 걸려서 총 맞아 죽게 둘 순 없잖아?”

 

표현은 거칠어도 그는 확실히 자신을 배려해 줬다. 그건 어른스럽다고 말해도 좋을 만큼 능숙했고, 또 묘하게 신사적이었다. 무법자와 신사다움이라니.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아마 그의 행동이 신사적이라 느끼는 것은 제가 그를 좋아하기 때문이겠지. 아직은 어린 루엔이었지만, 그래도 제 마음이 씌운 콩깍지 정도는 파악할 수 있었다.

 

“덕분에 올해는 안 아프고 지나가겠네, 고맙게도 말이야”

“역시 아픈 거였냐”

“그런 게 아니라, 아무리 나라도 겨울 중 한 두 번은 감기에 걸린다고!”

 

사실 한 두 번 보다는 많았지만. 그런 것 까지 일일이 설명해 줄 필욘 없겠지. 난방이 잘 되는 집만 있다면 그녀는 정말 한 번도 안 아프고 겨울을 지낼 자신이 있었다. 솔직히 매일 몸을 움직이는 탓에 체력도 약하지 않았고, 겨울옷도 한가득 있었으니까.

 

“그래, 뭐 그렇다고 칠까”

“너, 그 말투 짜증나”

“알아. 네가 짜증나 하는걸 아니 쓰는 거야”

 

얄미운 표정으로 대꾸한 데스페라도가 페도라를 고쳐 썼다. ‘저 원수!’ 당장이라도 눈앞에 살랑거리는 그의 꽁지머리를 잡아당기려던 그녀는 손을 뻗기 무섭게 뒤돌아보는 얼굴에 놀라 동작을 멈추었다.

 

“가자고, 목도리 메고”

 

아직 손이 닿지도 않았었는데 범행을 들킨 것 같은 죄책감이 드는 건 왜일까. 재빨리 손을 거둔 그녀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는 낡아버린 목도리를 두르고, 코트의 단추를 전부 여민다. 겨울에 대처하는 아주 간단한 방법. 하지만 가장 허술한 방법. ‘이제 겨우 11월 말인걸. 이 정도면 될 거야’ 그리 확신하고 나간 루엔이었지만, 그녀는 초겨울의 추위를 너무 얕보고 말았다.

꼬박 반나절을 걸어 새로운 거처로 이동한 두 사람은 따뜻하게 난방을 하고 잠에 들었다.

하지만 다음 날 아침 일어난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지독한 열과 부은 목이었다.

 

“…그래, 이게 그 ‘한두 번’ 중 하나인 건가? 루엔”

“시끄러워! 누구 약 올리는 거야?!”

 

콜록. 소리를 지른 반동으로 나온 기침은 목 안쪽을 세게 긁어내렸다. 하필 그렇게 큰 소리를 치고 난 다음날 바로 감기가 걸리다니. 만약 운명의 신이 그녀의 눈앞에 있다면 그대로 머리에 총을 쏴 버렸을지도 몰랐다.

 

“소리 지르지 마, 기침 할 거면서…”

“소리 안 지르게 하면 되잖아?!”

“뭐든 내 탓만 하지 말고. 그러니까 네가 애라는 거야”

 

툭. 가볍게 이마를 두드린 데스페라도가 웃었다.

 

“뭐, 오늘 나가는 건 무리겠네. 그냥 누워서 쉬어”

“갈 수 있어. 괜히 죽을병 걸린 환자 취급 하지 마”

“고집 부리지 말고”

 

정말 괜찮은데. 내뱉고 싶은 말과 달리 토해낸 것은 기침뿐이었다. 초겨울 감기치고는 참으로 독하게도 걸렸다. 이렇게 아픈 건 한겨울 정도뿐인데. 어쩐지 시작이 나쁘다.

 

“진짜 괜찮다니까…”

 

들리지도 않을 소리로 대답한 루엔이 이불을 끌어 올렸다. 한 것도 없는데 몸이 무겁고 머리가 어지럽다, 데스페라도의 말대로 오늘은 얌전히 있는 게 좋을 것 같지만, 그래도 역시 몸을 움직이지 않는 건 찜찜했다. 혼자 있었던 시절은 못 움직일 정도가 아닌 이상엔 언제나 사냥에 나갔는데. 갑자기 이렇게 쉬어도 되는 걸까.

그녀는 살짝 이불을 내려 바깥을 보았다. 데스페라도는 여전히 침대에 걸터앉아 자신을 보고 있었다. 아직 안 가고 있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저렇게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니. 괜히 부끄러워진 그녀는 이불을 다시 올리려다가, 그의 손에 저지당했다.

 

“약은?”

“어, 어?”

“약 말이야. 필요하냐?”

 

물론 약은 있으면 좋다. 하지만 없다고 큰일 나는 것도 아니었다. 감기는 어차피 약을 먹으나 안 먹으나 오래 가니까. 다른 것은 아픔이 조금 진정된다는 정도일까.

아무리 거친 인생을 산다고 해도, 아픈 건 역시 싫었다. 루엔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럼 사올 테니 푹 자”

“미안해”

“미안하면 빨리 나아. 괜히 나 없는 동안 돌아다니다 심해지지 말고”

 

걱정만큼이라도 고운 말로 해주면 어디가 덧나는 걸까. 자리에서 일어나 코트를 챙기는 그를 뚱한 얼굴로 보고 있던 루엔이 가방을 뒤적거렸다.

 

“데스페라도”

“응?”

“이거, 하고 가”

 

자신을 위해 나가는 사람이니 이 정도는 해 주지 않으면 안 되겠지. 그녀는 순순히 제 낡은 목도리를 그에게 주었다. 이런 호의는 예상하지 못한 걸까. 조금은 놀란 눈으로 그녀를 지그시 내려다보던 데스페라도가 웃었다.

 

“괜찮겠냐? 네가 하고 있는 편이 좋을 것 같다만”

“됐어. 난 집에 있을 건데 뭐”

“…따뜻하게 해서 있어라, 빨리 갔다 올게”

 

꺼림칙해 하면서도 목도리를 받아든 데스페라도는 대충 목도리를 감고 나가버렸다. 저렇게 매고 나가면 안 맨 거나 다름없는데. 루엔은 당장이라도 침대 밖으로 나가 목도리를 고쳐 매 주고 싶었지만, 도저히 일어난 힘이 나지 않았다. 좌로 기웃, 우로 기웃, 몸만 뒤척이던 루엔은 결국 상체를 일으켰다.

 

“데스페라도!”

 

아직 멀리 나가지 않아야 할 텐데. 힘겹게 침대 밖으로 나선 루엔은 현관문을 열었지만, 데스페라도는 이미 보이지 않았다. ‘쓸데없이 다리만 길어선’ 엉뚱한 화풀이를 하며 문을 닫으려던 그녀는 정면으로 불어오는 차가운 바람에 눈살을 찌푸렸다. 감기에 걸려서일까, 아니면 지금 그가 없기 때문일까. 견디기 힘든 온도에 루엔은 질색하며 문을 닫았다.

더 따뜻하게 입혀서 보낼걸 그랬어.

이미 나가버린 데스페라도의 뒷모습을 떠올리며 침대위에 드러눕자 자연스럽게 졸음이 몰려왔다. 자고 일어나면 와 있을 거야. 금방 돌아온다고 했으니까. 위로할 일도 아닌데 스스로를 달래며 그녀는 잠에 빠져들었다.

 

 

  

공기가 식자 눈도 뜨였다.

분명 제 스스로 눈을 떴는데도 누가 강제로 깨운 것 마냥 불쾌하게 일어난 루엔은 불이 꺼진 벽난로를 발견했다. 장작을 조금만 넣어두었던 것이 화근이었나, 한숨을 내쉬는 목이 따가웠다.

데스페라도는 아직 돌아오지 않은 것 같았다.

조용한 집안, 싸늘하게 식은 방안, 어지러워서 비틀거리는 몸으로 난로에 다가간 그녀는 불을 붙이기 위해 라이터를 찾아야했다.

 

‘데스페라도에게 빌려둘 걸 그랬나’

 

설마 난로 불이 꺼질 때 까지 안 올 줄은 몰랐지. 헛웃음이 나왔다. 빨리 돌아온다고 했으면서, 자고 일어났는데도 옆에 없다니. 약을 만들어 오는 것도 아닐 텐데, 설마 카르텔이라도 만나서 신나게 날뛰고 있는 걸까.

집안이 조용한 만큼, 머릿속은 소란스러웠다. 라이터도 성냥도 찾지 못한 루엔은 한참을 난로 앞에 앉아 있다가 제가 한 끼도 못 먹은 것을 떠올렸다.

 

“배고파…”

 

평소라면 밥 정도는 거뜬히 해먹을 수 있었다. 요리 정도는 일도 아니니까. 하지만 지금은 물 하나 끓이기도 힘들었다. ‘따뜻한 거라도 마시면 괜찮겠지’ 그런 생각은 들었지만, 정말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에취!”

 

이불 속으로 돌아간 루엔은 이불을 칭칭 감고 눈을 감았다. 잠들면 추운 것도 잊을 수 있다. 세상에는 의식하고 있는 것 보다 무의식인 상황이 나을 때가 있는 법이었다. 뭐, 이렇게 추운 상황이라면 잠들면 죽는다는 게 상식이었지만, 아무리 추워도 지금은 이불도 있고 옷도 입고 있으니 얼어 죽을 리는 없었다. 그러니 루엔은 깨어있는 것 보다 잠을 택했다. 하지만 원한다고 잠이 올 리가 없는 법, 멍하게 욱신거리는 머리의 고통은 그녀에게 안식을 허락하지 않았다.

 

“데스페라도…”

 

없는 사람을 부르는 건 바보 같은 짓이다. 하지만 그녀는 흐릿한 의식 속에서 자신도 모르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 ‘나 추워’ 그렇게라도 말하고 싶었던 걸까. 어쩐지 스스로가 한심해져 베개에 얼굴을 파묻었다.

작년 까지만 해도, 혼자서 잘 지냈는데.

분명 작년에 아팠을 때도 지금과 별로 다를 게 없었다. 아니, 오히려 지금보다 더 아팠던 적도 있었고 그때도 잘 견뎌냈다. 그런데 어째서 지금, 옆에 데스페라도가 없다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아픈 걸 견디기 힘든 걸까.

 

‘차라리 혼자가 나아’

 

극단적이라 할지 몰라도, 정말로 그랬다.

헛된 희망을 품게 하는 사랑 보다는 외로움이 더 나았다. 한번 따뜻한 걸 알아버린 마음은 자꾸 온기를 원하고, 다시 얼어붙었을 때 상처를 곪게 했다.

두통마저도 무뎌졌을 때, 루엔은 겨우 잠에 들었다.

이번 잠은 얼어붙은 공기로도 깰 것 같지 않았다.

 

 

 

“루엔?”

 

데스페라도는 이불을 둘둘 말고 잠든 루엔과 꺼진 벽난로에 한숨 쉬었다. 저녁이 다 되어서야 돌아온 그는 어째서인지 목에 아무것도 감지 않은 채 짐만 한가득 들고 있었다.

바깥과 별로 차이가 나지 않는 온도, 깨끗한 부엌. 마치 사람이 없는 폐가 같은 집안 풍경에 그는 죄책감을 느꼈다. 적어도 빨리 갔다 오겠다는 약속이라도 하지 않았어야 했는데.

후회는 아무 소용도 없었다. 침대에 걸터앉은 그는 이불 속에서 그녀의 얼굴을 찾았다. 드러난 흰 얼굴은 뜨거웠다. 확실하게 아침보다 상태가 좋지 않다. 데스페라도는 덜컥, 겁이 났다.

다급해진 그는 재빨리 난로에 불을 켜고 부엌으로 가 물을 올렸다. 요리는 특기가 아니었지만, 루엔과 같이 살기 전엔 혼자서도 먹고 산 자신이었으니 기본적인 요리 실력 정도는 있었다. 따뜻한 스프를 끓이고 벽난로가 집안의 공기를 꽤 데웠을 때 쯤, 침대에서 앓는 소리가 들렸다.

 

“으으…”

“루엔? 일어났어?”

“데스페라도…?”

 

아직 잠이 덜 깬 걸까, 아니면 아파서 그런 걸까. 몸을 말고 대답만 겨우 쥐어짜낸 그녀가 괴로운 신음을 내뱉었다.

 

“그래, 나야”

“약은…? 몇 시야 지금…?”

“저녁 6시 조금 넘었던가. 약은 사왔어”

 

‘그렇구나’ 아마도 그렇게 대답했던 것 같다.

목소리도 제대로 나오지 않아 입술 모양만 보고 말을 유추한 데스페라도는 그녀를 안아 올렸다. 이불에 돌돌 말려져 품에 안긴 루엔은 놀랐는지 버둥거렸지만, 그는 루엔을 놔주지 않았다.

 

“뭐, 뭐야”

“뭐라도 먹고 약 먹어야 나을 거 아냐. 일어설 힘도 없어 보이구만”

“내려 줘, 콜록! 걸을 수 있어”

“허세는 안 아플 때 실컷 부려, 지금은 얼른 나을 생각만 해”

 

평소라면 집에 쩌렁쩌렁 울릴 정도로 큰 그녀의 목소리가 지금은 기침소리 보다 작다. 안쓰러워하지 않으려고 해도 그럴 수가 없는 상황에 화가 나는 건 왜일까. 데스페라도는 지금 자신이 느끼는 감정을 알 수 없었다. 죄책감에 가까운 분노는 모두 자신을 향하고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모진 말은 모두 루엔에게 쏟아졌다.

 

“하여간. 이렇게 아플 거였으면 좀 더 싸매고 다녀야 했을 거 아냐, 겨우 목도리 하나로 나갔으니 감기에 걸리지”

 

루엔을 식탁 앞에 앉힌 그는 투덜투덜 불평하면서도 따뜻한 스프와 약을 식탁에 가져왔다. 간이 세지 않은 스프는 건더기가 적어 환자가 마시기엔 그만이었지만, 멀쩡한 사람이 먹기에는 너무나도 부실해 보였다.

 

“네 밥은?”

“됐어. 스프 많이 끓였으니 나도 스프 먹으면 돼”

“배고플 텐데… 콜록!”

“네가 지금 내 걱정 할 처지냐. 수저는 들 수 있어?”

 

그는 루엔의 몸에 감듯이 걸쳐진 이불을 살짝 벗겨냈다. 두꺼운 이불이 사라지자 추위가 몰려온 걸까, 크게 몸을 움츠린 루엔이 대답 대신 재채기를 내뱉었다. ‘쯧’ 어쩔 수 없다는 듯 혀를 찬 데스페라도는 의자를 당겨 그녀의 옆에 앉았다.

 

“너 한 끼도 못 먹었지?”

“……”

“…아파도 밥은… 하긴, 그 몸으론 아무것도 못 했겠군. 미안해”

 

제 말이 앞뒤가 안 맞음을 빨리 깨달은 데스페라도는 조속히 사과를 했지만, 아픈 그녀에겐 사소한 모든 것이 짜증으로 다가 온 모양이었다.

 

“미안할 짓을 왜 한 거야?”

“어?”

“빨리 온다고 했잖아… 적어도 점심때는 올 줄 알았단 말이야… 콜록! 밤이 다 되어서야 오고… 거짓말쟁이…”

 

어린아이 마냥 떼를 쓰는 얼굴이 발갛게 물들었다. 울려는 걸까. 고개를 푹 숙이고 말을 멈춘 루엔이 새어나오는 목소리를 끅끅거리며 삼켰다.

울면 안 된다. 루엔은 그렇게 생각했지만 마음대로 되지는 않았다.

몸이 아프면 마음도 약해진다. 그것은 이 세상 누구라도 똑같을 것이다. 그녀는 아파서 제정신이 아니었지만, 그래도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 추하게 울고 싶진 않았다.

 

“미안해”

 

돌아온 것은 의외의 사과였다.

루엔은 너무 놀라 눈물도 말라버렸다. 그녀가 이렇게 떼를 쓴 것은 처음이긴 했지만, 루엔은 만약 자신이 어리광을 부린다면 그는 더 가차 없이 말하거나, 심지어 무시할 거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예상과 다르게 유감을 표한 그는 다정하게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고개 숙인 얼굴에 다가와 속삭였다.

 

“늦을 수밖에 없던 이유가 있었어. 나중에 설명 해 줄게. 일단 먹어. 다 나아야지 나한테 화도 내고 한 대 칠 수도 있지 않겠어?”

 

데스페라도가 이렇게 다정하게 말해준 적이 있던가. 루엔은 자신이 지금 너무 아파 잘못 들은 건 아닐까 생각하기까지 했다. 이렇게 다정한 그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마치 다른 사람 같다. 자신이 아파서 안 하던 행동을 하는 것처럼, 그도 마치 아픈 사람마냥 마음이 약해진 것 같았다.

 

“…응”

 

쌓아온 서러움을 풀려던 마음은 이미 사라진지 오래였다. 혼자서 차가운 집에 남겨져있던 그 고독. 작년 까지는 몰랐던, 서러움과 외로움. 그 모든 걸 알게 한 그에게, 동상에 걸린 마음에 뜨거운 물을 부어버린 데스페라도에게 얼음조각 같이 날카롭고 차가운 말을 던지려고 했는데.

모난 마음은 목구멍에서 멈춰, 그녀의 목을 찔렀다.

 

“내가 미안해…”

“뭐가 미안하다는 거야? 밥이나 먹으라니까. 식으면 다시 데워야 해”

“…알았어”

 

입맛은 없지만 이것마저 먹지 않으면 오늘 하루 종일 먹은 게 아무것도 없게 되어버린다. 빈속의 약은 독과도 같은 것, 루엔은 깨작깨작 스프를 입에 넣었다.

 

“그렇게 깨작깨작 먹지 말고, 목 아파서 넘기기 힘들어?”

“입맛 없어…”

“그래도 다 먹어. 정 힘들면 차라도 타줄까?”

 

와, 이렇게 다정한 그를 보게 되는 날이 오다니. 그녀는 제가 아직도 꿈을 꾸는 건 아닐까 의심되었다. 반도 줄어들지 않은 스프를 휘적거리던 루엔은 장난스럽게 말했다.

 

“네가 이렇게 잘 대해주니까 어색하네”

“누가 들으면 내가 매일 못살게 군 줄 알겠군”

“그런 건 아니지만. 이렇게 다정한 적은 없었으니까. 계속 아픈 것도 나쁘지 않을 지도…”

“헛소리 하지 마”

 

탕. 가볍게 식탁을 친 데스페라도는 스스로가 한 행동에 놀란 건지 그대로 동작을 멈추었다. 놀라야 할 사람이 누군데. 원래라면 깜짝 놀라 소리라도 질렀을 루엔이었지만, 오늘은 리액션을 할 기운도 없었다. 당황해서 멈춰있는 데스페라도를 심드렁한 표정으로 본 그녀는 식어가는 스프를 우물거렸다.

 

“농담이야, 농담. 화 내지 마”

“…화 낸 적 없어”

 

뻔히 보이는 거짓말. 하지만 루엔은 그걸 물고 넘어지진 않았다. 그래도 제가 아픈 것이 싫으니 화내는 것 아닌가. 사소한 친절이거나 연민이라도 그녀는 자신이 아픈 게 데스페라도에게 싫은 일이라면 그걸로 좋다고 생각했다. 조금이라도 신경 써 주고 있는걸 알면, 마음이 따뜻해지니까.

꾸역꾸역 스프를 다 먹은 루엔은 약을 먹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휘청. 가볍게 흔들린 몸은 다행히 의자를 잡은 탓에 중심을 찾았지만 데스페라도는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부축했다.

 

“졸려? 잘래?”

“…어, 응”

 

역시 익숙하지 않다. 아무리 아파도 이렇게 극진하게 대하다니. 오늘 아침까진 별로 친절하지도 않았으면서. 증상이 심해지자 그의 태도도 같이 심각해지다니. 물론, 그녀는 제가 상태가 나빠진 것에 데스페라도도 분명 책임이 있다고 생각했지만, 데스페라도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거라고 짐작했었다. 그는 생각보다 이기적이고, 생각이상으로 냉정하고, 놀라울 정도로 이성적이니까. 설령 자신 때문이라도 생각해도, 이렇게 대할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저기, 데스페라도”

“응?”

“콜록! 그… 목도리는?”

“아, 그거. 그래, 잘 말했어. 잠깐만”

 

뭐가 ‘잘 말했다’는 걸까. 루엔은 자신을 침대에 뉘여 놓고 짐을 뒤지는 데스페라도를 기다렸다. ‘어디 있지’ ‘젠장’ 혼잣말을 하며 종이가방을 뒤적거리는 그는 어쩐지 조금 귀여워 보이기도 했다. 아프니까 별게 다 귀여워 보이구나. 콩깍지가 단단히 씐 자신을 다시 한 번 성찰하고 있을 때.

 

“자”

 

데스페라도가 내민 것은 아무리 봐도 새것인 목도리였다.

보라색 털실로 짜인 목도리는 딱 봐도 예전에 자신이 하고 다닌 목도리 보다 두툼해 보였다. 아니, 옛날 목도리와는 비교하는 것이 실례일 정도로 따뜻해 보인다고 해야 할까.

 

“…뭐야 이게?”

“그거, 낡아서 못 쓰겠던데 어떻게 하고 다녔냐. 새 거 써. 혹시 소중한 거였냐?”

“아니, 그냥 아무거나 산 건데…”

“그러냐? 다행이네. 이미 버렸거든”

 

깜짝 선물에 어안이 벙벙한 그녀와 달리, 데스페라도는 나름 제 행동이 자랑스러운지 누가 뭐라고 하지 않았는데도 그녀의 목에 목도리를 감아줬다. ‘실내에서 무슨 목도리야?’ 그렇게 말하기엔 자신의 몸 상태가 너무 안 좋았다. 이런 상황이라면, 목도리가 아니라 한겨울 용 코트도 입고 잘 수 있을 정도였으니까.

 

“그거 사느라 늦었어. 미안하군. 솔직히 뭘 좋아할지 몰라서 좀 돌아다녔어”

“…정말?”

“어?”

“정말, 이걸 사느라 늦은 거야?”

 

어째서일까. 데스페라도는 그 말이 지나치게 선명하게 들렸다.

목이 아픈 사람의 목소리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방금까지 기침을 토해내고 가래 끓는 소리를 내던 사람의 목소리라곤 할 수 없을 정도로. 방금 루엔의 물음은 또박또박했다.

 

“…그래”

 

별거 아닌 대답인데도 왜 이렇게 가슴이 답답할까. 그는 마른침을 삼키고 대답을 쥐어짜냈다. 짧은 침묵. 고개 숙이고 있던 루엔이 울음을 터뜨렸다.

 

“으윽…”

“…루엔?”

“…바보야! 이게 뭐라고 늦어! 콜록! 난, 네가 안 와서… 걱정도 되고… 화도 나고… 그랬는데… 겨우, 쿨럭! 겨우 목도리 하나 때문에…”

 

힘이 들어가지도 않는 손으로 데스페라도의 옷깃을 잡은 루엔의 말이 끊겼다. 쏟아지는 기침. 원래 하고 싶었던 모든 말은 그 기침 속에 묻혀 허공에 흩어졌다.

이 상황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 자신은 그녀를 울리려고 한 게 아니었는데. 정말로 옷깃을 잡고 있는 게 다인 그녀의 손을 떼어낼까 말까 고민하던 그는 상처투성이의 손을 낚아채 잡아당겼다.

 

“미안해”

 

두 번째 사과다. 오늘만 두 번이나 사과했다. 하루에 이렇게 사과를 많이 한 적이 있던가. 하지만 데스페라도는 이상하게도 억울한 마음이 들지 않았다.

 

“다음부터는, 일찍 올게. 화 풀어”

“그게, 콜록! 아니잖아… 콜록!”

“말 하지 마. 기침부터 멈춰”

“나는, 나는…”

 

말을 하고 싶어도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마치 기침 외엔 아무것도 내뱉지 못하는 몸이 된 것처럼 한참을 콜록거리던 그녀는 한참 뒤에야 입을 다물 수 있었다. 호흡을 가다듬고, 눈물도 멎은 그녀는 그제야 자신이 드넓은 품에 안겨있다는 사실을 자각했다.

아픈 와중에도 부끄러움은 어찌 이렇게 선명할까. 깜짝 놀란 루엔은 데스페라도의 품에서 벗어나보려 했지만, 제 허리를 감싼 팔과 마주잡은 손은 쉽게 풀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다 울었냐?”

 

기침소리도 우는 소리도 그친지 한참이 지나서야 그는 그렇게 물었다. ‘그렇다’고 대답해야 할까. 아니면 제가 아까 하다 못한 이야기를 해야 할까. 고민하던 루엔이 고개를 끄덕였다.

 

“쯧, 울긴 왜 울어. 놀랐잖아”

 

후우. 안도의 한숨과 함께 허리를 감싸고 있던 팔이 빠져나갔다. 어색한 침묵. 누가 먼저 말을 꺼내야 좋을지 타이밍을 재는 것처럼 서로의 눈치를 보던 중, 루엔이 먼저 고개를 들었다.

 

“목도리 고마워. 잘 쓸게”

“그래”

“…고마워. 이런 것도 사주고”

“됐어, 내가 신경 쓰여서 사준 거니까”

“신경 쓰였어?”

 

역시 제가 아픈 것이 마음에 걸린 거였구나. 루엔은 비겁하지만 제 병세를 무기삼아 그의 상냥함을 더 누리고 싶었다. 평소엔 이렇게 대해주지 않으니까, 조금은 더 이런 대우를 누려도 되겠지. 그렇게 생각하고 한 말인데, 돌아온 대답은 의외였다.

 

“솔직히, 돌아오기 전 까진 조금밖에 신경 안 쓰였지”

 

누가 보면 저쪽이 운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데스페라도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그런데, 돌아오고 네가 추워서 어쩔 줄 몰라 하는 걸 보니 솔직히…”

“솔직히?”

“…아무것도 아냐”

“뭐야, 말해 줘. 불쌍하다고 생각한 거야?”

 

솔직히 아까 전 자신은 불쌍한 걸 넘어 비참했으니까. 그녀는 손수 제 입으로 그렇게 물었다. 좋아하는 남자에게 불쌍해 보인다는 소릴 듣는 건 썩 좋지 않았지만, 그래도, 그녀는 데스페라도의 대답이 듣고 싶었다.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자신을 어떻게 보는지.

망설임 끝에 마른 입술사이로 흘러나온 말은 축축이 젖어있었다.

 

“무서웠어”

“…어?”

“네가 정말 죽을 것 같은 꼴을 하고 있어서, 조금 무서웠어”

 

시선을 마주치지 않는 데스페라도의 말이 안개처럼 흐렸다. 금방이라도 형체를 잃고 사라질 것 같은 작은 목소리, 하지만 그곳에 확실하게 서려있는 진심.

이 남자의 입에서, 무섭다는 말이 나오다니. 무법지대에서 두려울 것이 없는 그가. 카르텔의 공포이자 누구보다 강한 데스페라도가, 무섭다는 말을 하다니.

루엔은 생각지도 못한 감상에 말문이 막혔다.

 

“…잠이나 자. 난 소파에서 잘 테니까”

 

끝까지 눈을 맞춰주지 않은 그는 그대로 돌아서서 부엌으로 사라졌다. 아마 아까 먹은 저녁 설거지를 하러 간 거겠지. 시야에서 그 눈부신 은발이 사라질 때 까지 멍하니 앉아있던 루엔은 스위치가 꺼진 로봇마냥 침대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무슨 소리를…’

 

제가 아픈 게 무서웠다고? 제가 죽는 게 무서웠다고? 그가, 데스페라도가 타인의 고통에 ‘공포’를 느꼈다고?

욱신거리는 머리와 따끔거리는 목보다 괴로운 펌프질을 하는 심장은 헛된 소망을 속삭였다. 어쩌면 데스페라도도 나를. 아니, 이건 ‘어쩌면’이 아니라, 확실하게 그도 나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