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커맨더 드림, 오리주 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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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절
written by Esoruen
연애는 더 많이 사랑하는 쪽이 지는 쪽이다. 먼저 반한 쪽도 지는 쪽이고, 기다리는 사람도 지는 쪽이다. 약간의 편견과 다수의 선입견으로 가득한 연애에 대한 말들을 들을 때 마다, 커맨더는 ‘지는 게 이기는 거니 연애란 져주는 게 좋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해왔었다. 하지만 그건 그가 아직 한 번도 연애를 해 본적이 없는 탓에 한 오만한 생각이었을 뿐. 막상 그에게 처음으로 사랑이 찾아오고 정말로 좋아하는 여인이 생기자, 커맨더는 철저하게 지는 입장인 자신이 원망스러워졌다.
그가 좋아하는 여자는 천계에서는, 특히 무법지대에서는 유명한 무법자였다.
에소루엔 로시스. 줄여서 루엔이라고 불리며, 그는 주로 ‘엔’이라고 부르는 그녀는 객관적으로 봤을 땐 연애상대로는 그다지 적합하지 않았다. 물론 상대를 따져가며 연애를 할 만큼 커맨더는 속물도 아니었고 여자에 관심이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그가 루엔을 좋아하게 된 것을 알았을 때 주변 사람들은 모두 상상하지도 못했다는 듯 굉장히 놀라곤 했었다.
수많은 카르텔을 처리해온 사냥꾼, 어지간한 무법자들과는 자웅을 가릴 필요도 없는 실력자. 그리고 무법지대에서 사신이라고 불리는 남자의 동반자.
이미 짝이 있는 거나 다름없는 여자를 좋아한다는 것은 시작부터가 힘든 연애였다.
“커맨더, 또 철야에요?”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투덜거리는 루엔은 서류로 가득 쌓인 책상위에 팔을 괴었다.
“으음, 그렇게 되었네요”
“그러다 쓰러져요. 다른 사람들 시키면 안 되는 거예요?”
“제가 마지막으로 사인 해 줘야 끝나는 서류들인걸요. 안 돼요”
“아하”
작은 감탄사를 내뱉은 그녀는 커맨더가 일하는데 방해되지 않게 얌전히 팔을 치워주었다.
새삼스러운 말일지 몰라도 커맨더는 늘 바쁜 사람이었다. 안톤 토벌을 위해 노블 스카이로 온 후엔 더 바빠졌고, 요즘에는 자는 시간도 한 손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로 적어졌다. 지금 이 시국에 안 바쁜 사람이 어디 있겠냐고 하면 할 말이 없었지만, 그 ‘안 바쁜 사람’에 속하는 사람도 분명히 존재했다. 지금 커맨더의 바로 옆에 있는 그녀도 바로 그 경우였다.
레이븐과 루엔은 언제나 황도군을 도와주는 존재였다. 계약서가 없는 용병이나, 적의 적 정도로 보면 적당할까. ‘카르텔을 처리한다’는 목적이 같다는 이유만으로 커맨더가 제너럴이던 시절부터 자주 황도군을 오가며 싸워준 두 사람은 지금도 사도처리를 위해 노블스카이까지 따라와 주었다. 황도군은 아니지만 아군. 그래서 황도군의 일을 할 필요는 전혀 없는 여유로운 사람들. 다른 병사들은 그런 루엔과 레이븐을 부러워하곤 했다.
“오늘도 늦게 자나요?”
“잠이 안 오는걸요. 레이븐은 이글아이 사령관이랑 바빠 보이고. 그래서 커맨더랑 놀러 왔는데 커맨더도 바쁘고”
“미안해요. 빨리 하면 새벽엔 끝날 것 같은데…”
자신은 어째서 그녀에게 사과를 하고 있는가. 아마도 제가 루엔을 좋아하기 때문이겠지.
커맨더는 그녀에게 언제나 필요 이상으로 미안해하곤 했다. 조금 더 잘해주고 싶은데 뜻대로 되지 않으니 괴로운 건 어쩔 수 없는 법. 루엔은 언제나 그의 사과에 ‘미안해하지 말라’며 말리긴 했지만, 한번 입에 붙은 미안하다는 말은 세월이 지나도 도무지 떨어지지가 않았다.
“무리하지 마요. 그리고 왜 사과하는 거예요~ 제가 뭐 도와줄 건 없나요?”
“으음, 그냥 옆에서 계속 말 걸어주는 정도면 돼요. 혹시라도 졸면 깨워주거나…”
“그 정도라면 얼마든지요!”
조용한 밤과는 어울리지 않는 밝은 대답. 활짝 웃으며 대답하는 루엔과 눈을 마주친 커맨더는 깜짝 놀라 시선을 종이뭉치로 돌려버렸다. 저 미소. 안 그래도 흰 얼굴이 확 빛나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웃는 루엔의 저런 미소를 볼 때 마다 그는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분명 처음 그녀에게 반한 것도, 저 미소 때문이었지.
루엔은 특별히 눈에 띄는 화려한 미인은 아니었지만, 누구든지 눈길을 보낼 정도로 예쁜 편이기는 했다. 길게 기른 흑발은 허리까지 내려오고, 제비꽃 색 눈동자는 생기가 넘친다. 하지만 커맨더가 그녀를 좋아하게 된 계기는 그 외모 때문이 아니었다. 물론 처음 만났을 때도 예쁘다고 생각은 했지만, 그것이 이 미련한 사랑의 시작점은 아니었으니까.
그는 루엔의 솔직한 미소가 좋았다. 조금은 장난스럽고 때로는 얄미운, 하지만 제 감정에 충실한 얼굴을 보여주는 그녀는 언제나 제 감정을 숨기고 사는 커맨더에겐 작은 위안이자 설렘이 되었다. 누군가를 그런 이유로 좋아하게 될 수도 있구나. 이 사랑이 첫사랑인 그는 제 감정이 그저 신기하기만 했다. 콩깍지가 씐다는 게 이런 것이란 것도 그는 처음 알았으니까.
다만 문제가 하나 있다면, 루엔의 표정과 말은 언제까지고 그렇게 솔직한 것이 아니란 정도였다.
“그런데 엔이 여기 있으면 저야 좋지만, 엔은 괜찮나요?”
“괜찮아요, 하나도 안 심심해요. 커맨더랑 같이 있는 건 재밌으니까요”
“그래요?”
그런 의미에서 한 질문이 아닌데. 커맨더는 애매한 제 질문을 탓하고 싶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대놓고 ‘레이븐이 싫어할 것 같은데 돌아가지 않아도 괜찮은가’라고 물어보는 것은 제 심장에 너무 가혹한 일이었으니까.
애초에 루엔과 레이븐은 정말 사귀는 사이인 걸까. 커맨더는 가끔 그런 생각을 했다.
남녀 두 사람이 5년 정도 함께 하다보면 좋든 싫든 정이 생기기 마련일 것이다. 실제로 두 사람은 꼭 부부 같은 대화를 하거나 편하게 서로를 터치하는 듯 굉장히 사이가 좋아보였으니까. 모두가 두 사람을 연인으로 보는 건 당연했다. 하지만 커맨더는 아직 한 번도 루엔의 입에서 레이븐과 사귄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은 없었다. 물론 그 반대로 그와 사귀지 않는 다는 이야기도 들은 적이 없으니, 아마 진실은 그녀와 레이븐만이 알고 있을 것이었다.
“뭐, 괜찮다면 다행이고요”
“커맨더는 너무 걱정이 많다니까요. 전장에선 멋있는데 평소엔 너무 다정하고~”
“다정하면서 멋지다는 선택지는 없는 건가요, 그거”
“아, 그런 의미는 아니었는데. 물론 커맨더는 언제나 멋있어요. 전장에선 평소와 달리 꽤 터프하단 뜻이니까 그런 말 마세요”
멋있다. 별거 아닌 칭찬인데도 커맨더는 또 가슴 한쪽이 저려왔다. 그녀는 언제나 당연하다는 얼굴로, 저렇게 상냥한 칭찬을 한다. 그것이 듣는 사람에게는 얼마나 무거운 의미가 되는지 그녀는 알까. 점점 표정관리를 하기 힘들어진 커맨더는 헛기침을 하며 군모를 푹 눌러썼다.
“실내에서 그 모자 좀 벗으면 안돼요?”
“이건 제복이니까 좀…”
“어차피 우리 둘 뿐인데 누가 뭐라고 한다고 그래요~?”
장난스럽게 말하며 손을 뻗은 루엔은 잽싸게 그의 군모를 낚아챘다. ‘아’ 짧은 감탄사가 튀어나오고 만 그는 놀람을 감추고 모자를 빼앗으려다가, 잔뜩 헝클어져있을 제 머리카락을 생각하고 급히 머리에 손을 가져갔다. 손으로 빗는다고 정돈 될 리도 없는데. 그걸 알면서도 커맨더는 제 흐트러진 모습을 보여줄 수 없다는 생각에 거울도 없이 필사적으로 머리를 정리했다.
“돌려주세요, 엔”
“이거 쓰고 있으면 안 더워요? 일은 편하게 해야 효율이 좋잖아요?”
“괜찮으니까…”
“칫”
재미없어. 그렇게 말하는 것 같은 루엔의 눈동자가 제너럴의 시선을 피해 도망쳤다. 제가 잘못했다는 걸 알기 때문에 그러는 것일까. 아니면 생각보다 재미없는 반응을 보인 그에게 실망한 걸까. 손가락 하나로 모자를 빙빙 돌리던 그녀는 잠시 생각하다가 씨익 웃었다.
“알았어요, 돌려줄게요. 손부터 치워 봐요”
저 웃음이 수상하다. 하지만 일단 돌려준다고 한 이상 쓸데없는 의심은 하지 않는 게 좋겠지. 머리를 정리하던 손을 치운 괜히 부끄러워 고개를 숙였다. 매일 이렇게 허둥지둥 하는 모습만 보여주니 도저히 체면이 살질 않는다. 그런데도 그녀는 그런 커맨더를 늘 ‘멋있다’고 해준다. 그게 진심인지 립 서비스인지, 커맨더로선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얍”
푹. 머리가 비자마자 힘차게 그의 머리에 군모를 씌운 그녀는 고개를 숙여 얼굴을 가까이했다. 모자를 써서 눌린 머리를 정리해 주고, 보기 좋게 씌워주느라 이리저리 모자를 움직이는 그녀는 눈앞에서 얼어있는 커맨더는 보이지도 않는 것 같았다. 그 시선이 박힌 곳은 오직 모자 뿐. 그는 그걸 다행이라고 여겨야 할지 섭섭해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가까이서 보는 그녀의 입술은 붉었다. 화장품은 아무것도 바르지 않아서 눈에 띄게 붉은 입술은 아니었지만, 자연스러운 혈색에서 피어난 그 붉은색은 커맨더의 볼처럼 붉고 뜨거웠다. 흐음. 한숨에 가까운 감탄사를 흘린 루엔은 겨우 군모를 놓고 떨어지더니, 가볍게 두 손을 마주쳤다.
“됐다! 똑바로 씌우는 것도 쉽지 않네요, 이거”
자축의 박수를 치며 웃는 그녀의 웃음은 아까 전 웃음과 확실히 달랐다. 진심으로 활짝 웃는 다기 보단, 적을 경계하는 야생동물과도 같은 웃음. 솔직함과는 거리가 먼 그 미소는 언제나 이런 아슬아슬한 스킨십 뒤에 나타나곤 했다. 커맨더는 그 웃음의 의미를 어렴풋이 알고 있었지만, 내색하지는 않았다.
“감사합니다… 크흠”
“얼른 일이나 마저 하세요, 전 여기서 계속 보고 있을 테니까”
“네, 피곤하면 말씀하세요. 담요 드릴 테니까”
부끄러움을 날리기에는 업무만한 것이 없다. 그녀가 계속 자신을 보고 있는 것은 신경 쓰이지만, 그것도 일에 열중하다보면 금방 잊혀졌다. 종이를 넘기며 내용을 확인하고, 마지막에 사인들이 늘어선 곳의 끝에 제 사인을 해 마무리한다. 조용한 집무실, 지루한 반복 작업 탓일까. 일을 하던 커맨더보다 지켜보던 루엔이 먼저 잠들어 버린 건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후우. 마른 한숨을 내쉰 그는 담요를 꺼내 그녀의 위에 덮어주고 일을 계속했다. 곤히 잠든 모습을 힐끔거리며 작업을 하면 그리 지겹지도 않다. 그러니까 괜찮다. 다만 지겨운 것과 별개로, 커맨더는 아까 전 루엔이 보여준 미소들을 떠올라 마음이 무거워졌다.
순수한 마음으로 웃는 얼굴과 달리, 오직 자신의 앞에서만 보여주는 그 가시 돋친 미소.
그건 적의라던가 비웃음 같은 것이 아니었다. 차라리 그런 의미의 미소였다면, 커맨더는 그녀를 미워할 수 있었을 테니까.
그건 그의 반응을 ‘관찰’하는 미소였다. 제가 한 일에 상대방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얼마나 부끄러워하는지, 그런 것들을 살펴볼 때 나오는 웃음. 그녀 자신이 커맨더에게 어떤 존재인지를 알기 때문에 할 수 있는 행동.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만약 단순한 재미로 이러는 거라면 어떻게 되는 걸까.
커맨더는 루엔이 그녀를 향한 제 마음을 알고 있기에 이런 장난을 쳐오는 거라고 생각했다. 매일 바라보면서 정작 다가오지는 못하는, 바보 같은 자신을 알고 있기에 쳐오는 두근거리는 장난. 하지만 어쩌면, 그녀는 단순히 자신을 부끄럼쟁이라고 생각하고, 이런저런 장난을 쳐오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바보가 되는 것은 자신뿐이다.
“…엄청 피곤했나 보네”
자신을 좋아 하는걸 뻔히 아는 남자 옆에서 저렇게까지 편하게 잘 수 있을까. 커맨더는 그녀가 제 마음을 안다고 확신하면서도, 곤히 잠든 루엔의 얼굴을 보고 제 확신이 금이 가고 말았다. 그녀는 뭘 생각하는지 뻔히 보이는 타입이라고 생각했고, 레이븐도 그렇다고 말하는데 어째서 이것만큼은 도무지 알 수 없을까. 쌓인 서류의 양은 줄어가지만, 마음의 고민은 쌓여만 간다. 침묵하고 있던 그는 결국 마른세수를 하고 펜을 놓았다.
“커맨더, 어젠 미안했어요!”
“아니에요, 피곤한데 무리해서 있어준 것 같아 제가 더 미안한 걸요”
이른 아침 깨어난 루엔은 서류를 다 마치고 자신을 깨운 커맨더에게 고개를 들질 못했다. 정말로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자신을 덮어주었던 담요를 개어 그에게 준 루엔은 쭈뼛쭈뼛 물어왔다.
“그, 서류는 다 끝냈어요?”
“물론이죠.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그것보다 지금이라도 방에 들어가서 자는 게 어때요? 아직 이른 시간이고…”
“으음. 그렇게 할게요”
커맨더가 그다지 기분 상하지 않았음을 확인한 루엔은 그제야 웃어보였다. 어차피 그녀를 상대로는 화를 내지 못하는데. 커맨더는 제 눈치를 살피는 그녀를 이해 할 수 없었다. 언제쯤이면 자신이 이렇게까지 져주고 있다는 것을 알까. 생색을 낼 생각이 없었지만, 마음이 아픈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루엔, 여기 있었냐?”
아. 커맨더는 제 집무실에 고개를 내민 남자와 눈을 마주치고 입을 닫았다. 레이븐. 그녀와 늘 함께 다니는, 제가 가장 부러워하는 사람. 무슨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커맨더는 괜히 시선을 돌리고 말았다.
“아, 미안! 찾았어?”
“조금. 어디 가면 간다고 말을 해야 할 거 아냐?”
“커맨더랑 있었는데 무슨 걱정이야?”
“태평하긴”
레이븐의 가시 돋친 대답은 그대로 커맨더의 비수를 찔렀다. 아마 자신이 아니라 다른 사람, 뭐, 얘를 들자면 프라임이라던가 라이오닐과 한 자리에 있었다면 저런 대답은 하지 않았겠지. 얄궂은 일일지 몰라도, 커맨더의 연심은 루엔보다는 레이븐이 더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일까, 레이븐은 유독 커맨더를 경계하곤 했지만 커맨더는 그 견제가 무섭지 않았다. 무섭다고 하기 보다는, 참으로 쓸모없다고 느꼈다고 하면 좋을까. 어차피 루엔은 알아도 아무 내색도 안 할 테고, 어쩌면 알면서 실컷 모른 척 하며 자신을 괴롭히는 중일지도 모르는데. 저런 모난 말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아주 고생이겠어, 커맨더. 서류 양을 보니 밤을 샌 것 같은데”
“뭐 어쩔 수 없죠. 제 일이고”
“그럼 더 수고해라, 이 녀석은 내가 데려갈 테니”
마치 제 물건인 마냥 데리고 간다고 통보하는 얼굴이 얄미웠다. 하지만 딱히 거기 반박할 말도 생각나지 않았고, 반박할 필요성도 느끼지 못한 커맨더는 고개만 끄덕였다. 루엔의 손을 잡고, 질질 끌고나가듯 집무실을 나가는 레이븐과 달리 여유롭게 커맨더에게 인사를 하는 루엔은 어느 때와 같이 활짝 웃고 있었다.
“아침은 먹고 주무세요, 커맨더! 저 갈게요!”
“걱정 마세요, 엔”
어차피 못 자지만 ‘못 잔다’라고 답하는 건 좋지 않다. 필요할 때는 거짓말도 능숙하게 하는 그는 당연하다는 듯 거짓말을 하고 손을 흔들었다. 저 예쁜 미소를 보면, 레이븐이 뭐라고 하던 머릿속에서 금방 사라지니까. 그러니까 괜찮다, 그렇게 자신을 위로하고 있었는데.
“…또 놀러올 테니 풀죽지 말고요”
그렇게 말하고 또, 싱긋.
진심 따위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은 루엔은 닫히는 문 너머로 사라졌다.
쾅. 조심스럽지 못하게 닫힌 문은 제법 큰 소리를 냈지만 커맨더는 그 소리마저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마치 귀머거리가 된 사람처럼, 아무 것도 들리지 않고 그저 그녀의 미소만 어른거리던 커맨더는 결국 의자에 주저앉아 버렸다.
“…정말로…”
못된 사람이라니까요.
입을 열어도 한숨만 나오느라 끝까지 나오지 못한 말은 커맨더의 목구멍에 그대로 남았다. 조금 숨이 가빠오고, 머리가 어지럽다. 그건 아마 목에 걸린 문장의 꼬리 때문이겠지. 물에서 막 건져진 물고기 마냥, 입만 뻐끔거리던 그는 군모를 푹 눌러 써 시야를 차단시켰다.
자고 일어나는 편이 좋을 것이다. 제 본능이 그렇게 말해주고 있었다.
커맨더는 아침도 먹지 않고 쪽잠에 들었다.
그는 두 시간도 자지 못했지만 저절로 눈이 떠졌다. 후천적으로 변한 체질, 익숙해진 짧은 수면. 정말로 한숨 돌릴 정도로만 잤는데도 어렵지 않게 의자에서 벌떡 일어난 커맨더는 곧바로 평소와 같이 쏟아지는 업무에 시달려야 했다. 안톤의 현재 상태와 물자 보급 상태, 그리고 황도 귀족들의 건의들에 관한 회의부터 노블 스카이에 있는 군인들의 훈련 상황과 사상자 보고까지. 나열할수록 늘어나는 것만 같은 업무들을 차근차근 처리하고 있던 그는 점심시간이 조금 지나고 나서야 쉴 수 있었다. 짧은 휴식시간, 점심이라고 하기엔 늦었지만 뭐라도 먹기 위해 집무실을 나온 그는 레이븐과 만나고 오는 프라임과 마주쳤다. ‘좋은 오후입니다’ 그런 인사를 하려고 한 커맨더였지만, 그는 인사도 하기 전에 프라임에게 잔소리를 듣고 말았다.
“너도 참 피곤하게 산다. 뭐 하러 그러고 사냐?”
“…갑자기 무슨 소리입니까, 프라임”
“루엔 말이야. 어제 네 집무실에서 잤다며?”
어떻게 해야 이야기가 프라임에 귀에 까지 들어갈 수 있단 말인가. 레이븐이 하소연이라도 한 것일까. 한숨을 쉰 커맨더는 고개를 끄덕였다. 부정할 만큼 못된 짓을 한 적도 없고, 속이 상한 것은 자신뿐이었으니 그는 찔릴 게 없었다. 잔소리를 듣는 이유도 아마 루엔을 제 방에서 재웠다는 이유가 아니겠지. 그렇게 생각한 커맨더의 예상은 정확히 들어맞았다.
“또 휘둘렸지?”
“그렇다고 봐야겠죠?”
“얼굴에 다 쓰여 있어. 너. 그렇게 휘둘리면서 까지 누군가를 좋아할 수 있다니. 신기하다니까?”
프라임은 언제나 커맨더에게 저런 식으로 말해왔다. ‘루엔은 다 알면서도 너를 휘두르는 거다’ ‘너는 목줄 잡힌 애완견이다’ ‘장식장의 가장 앞에 놓인 인형이다’ 이과계인 그 답지 않게 온갖 비유를 들며 커맨더에게 경고하는 프라임의 마음은 누구보다 커맨더 본인이 잘 알고 있었다.
“좋아하는 게 어디 제 마음대로 되는 일인가요”
“그렇게 말하면 할 말이 없긴 하지만 말이지”
“그리고 휘두를 생각도 들지 않는 남자보다는, 휘두르고 싶은 남자 쪽이 나으니까요”
우와. 맙소사. 소리 내어 질색한 프라임은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커맨더를 바라보았다. 그래, 이해한다, 커맨더 자신도 제 입으로 저런 말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신기했으니까. 제가 좋아하는 사람이 루엔이 아니었다면 이런 감정은 생기지 않았을까. 첫사랑인 커맨더로서는 알 수 있었지만, 그렇게라도 생각하지 않으면 제 비정상적인 일편단심을 포장할 변명이 없었다.
“뭐, 루엔 정도면 충분히 괜찮은 여자지만 말이야. 슬슬 확실히 해 두는 편이 좋지 않겠어? 그만 좋아하라는 소린 안 할 테니까, 가지고 노는 거라도 확실하게 거절해라고. 그럼, 난 이만”
“아, 조심히 들어가시길”
평소라면 저런 충고도 그냥 흘려들었을 텐데. 어째서 오늘은 귀에 맴돌며 떠나지 않는 걸까. 거절이라. 자신이 그녀에게 싫다는 말을 하는 것을 상상한 커맨더는 고개를 저었다.
자신은 그런 용기 있는 짓을 할 정도의 남자가 못 되었다. 차라리 전선 한가운데 뛰어 들어가, 수류탄을 날리고 사격을 하는 것은 쉬웠지. 루엔에게 ‘싫다’는 말을 하는 것은 커맨더로선 너무나 가슴 떨리는 일이었다.
“어라, 커맨더?”
“네?”
프라임의 말을 너무 신경 쓰느라 그는 한 가지 잊고 있었던 것이 있었다. 레이븐을 만나고 오는 프라임과 마주쳤다는 것은, 여기가 레이븐과 루엔의 숙소 근처라는 뜻이었는데.
“에, 엔”
“한숨 자고 일어난 거 맞아요? 왜 이렇게 피곤해 보여요?”
정말로 자신이 원인인 줄 모르는 걸까. 루엔이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렇게 물어오니 커맨더는 뭐라고 대답해야 좋을지 몰랐다.
“자고 일어났어요, 아무래도 피로가 쌓여 그런 거 같아요”
“점심은 먹었고요?”
아. 이대로라면 또 말려든다. 아직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았지만 그는 알 수 있었다. 저 장난스러운 미소. 진심이 불투명하게 비치는, 앞으로 시작될 일에 대한 예고 같은 웃음.
사랑스러운 나의 장난감. 나랑 놀아주세요.
그렇게 말하는 것과 같은 달콤한 목소리에 커맨더는 정신을 바짝 차렸다. 프라임의 말대로, 자신은 거절의 말을 배울 필요성이 있었다. 힘든 사랑을 택한 것은 자신이었지만, 그것이 곧 엉망진창으로 망가질 때 까지 본인을 휘둘러도 좋다는 이야기는 아니었으니까.
“안 먹었으면 같이 먹어요. 전 아직 안 먹었거든요!”
“레이븐은요?”
“레이븐은 생각 없다고 하네요~ 저렇게 안 먹는데 싸울 힘이 어디서 나나 몰라”
절호의 찬스. 그녀와 단 둘이 밥을 먹을 수 있는 기회가 눈앞에 떠밀어 졌는데도 그는 망설여야했다. 마치 선물 받은 사탕이 무슨 맛인지 몰라 주저하는 어린애처럼, 커맨더는 그녀의 상냥한 제안 뒤 어떤 아픔이 있을지 재어보아야 했다.
‘레이븐은요?’ 자신이 그렇게 물었을 때 그녀의 표정은 정말로 기분좋아보였다. 자신만의 착각은 아닐까, 그런 생각은 하지 않았다. 루엔은 분명 그때 웃었다. ‘지금 질투했지요?’ 그렇게 묻는 것 같은 미소로 말이다.
“먹었어요”
“네?”
“먹었어요. 미안해요”
먹었어도 안 먹었다고 했을 자신이, 먹지 않았는데도 먹었다고 말했다. 참으로 놀라운 결심, 대단한 변화였다. 둘 다 똑같은 거짓말일 뿐인데 어째서 이렇게 느껴지는 양심의 가책이 다를까. 밖으로 튀어날 기세로 뛰는 심장을 무시하며, 커맨더는 차분히 말을 이었다.
“일이 바빠서 먼저 갈게요, 점심 꼭 챙겨 드세요”
아주 작은 거절이지만. 이것만으로도 그는 뿌듯했다. 이번에 애가 타는 것은 자신이 아니라 그녀다. 그거면 됐다. 약간은 뿌듯한 마음으로 돌아선 커맨더는 어색하게 앞으로 걸어갔다. 한 걸음. 두 걸음.
평소라면 성큼성큼 걸어 나갔을 걸음이 이렇게나 무거웠던 적이 있었던가.
세 걸음. 네 걸음.
제 걸음 수를 인식 할 정도로 가는 길이 무거웠던 적이 있었던가.
다섯 걸음. 여섯 걸음.
일곱 걸음.
“엔!”
결국 몇 걸음 못가서 뒤돌아 선 커맨더는 결국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다행일까 불행일까. 그녀는 멀리 가지 않고 아까 대화한 그 자리에 서있었다. ‘다행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자신을 미워하는 것은 자기혐오일까, 당연한 비난일까.
“네?”
“그, 같이 먹어줄 수는 없지만 옆자리는 지켜줄 수 있어요”
거짓말을 무마하기 위한 구차한 변명. 그녀는 커맨더의 말에 미소 지었다. ‘그럼 그렇지’ 누군가가 자신의 귀에 속삭이는 것 같은 착각. 그 목소리가 제 목소리던가 루엔의 목소리던가. 그런 건 이제 관심 없었다.
프라임에겐 미안한 일이지만, 자신은 역시 이럴 수밖에 없는 남자였던 모양이다.
“그럼 같이 가요”
성큼 다가와 손을 잡은 그녀는 평소보가 센 힘으로 그를 끌어당겼다. 넘어질 듯 휘청, 몸의 중심을 잃고 그녀에게 가까이 가버린 커맨더는 햇빛에 빛나는 보라색 눈을 피할 수 없었다.
역시, 자신은 휘둘려도 그녀와 있는 편이 즐겁다.
거절은 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걸 알고 나자 실소가 나왔다. 제 눈 앞의 이 여자가 무엇이라고. 하지만, 이런 자학들에도 불구하고 역시 손을 빼고 싶지도 않았다.
“네, 가요. 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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