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2D/재배소년

월간드림 12월 호 / 손가락이 얼어붙을 즈음


※ 월간드림 12월호 참여작

※ 총통조 디스티 드림. 오리주 주의.




가락이 얼어붙을 즈음

written by Esoruen

 

 


하아. 병사의 한숨은 새하얀 입김이 되어 흩어졌다. 무한동력이라는 말도 안 되는 발명의 결과물인 이 열차는 군사적인 의미로서는 더없이 훌륭한 탈것이지만, 생활공간을 염두하고 본다면 열악하기 짝이 없는 곳이었다. 외풍과 비바람을 막아주긴 하지만, 온 세상이 차갑게 얼어붙는 겨울의 냉혹한 한기까진 막아주지 못한다. 어느 정도 난방 시설은 되어있어도, 그것도 어디까지나 개인실에 한정된 이야기. 모두가 오가는 복도에는, 난로도 이불도 존재하지 않았다.

 

얼른 방에 돌아가서 난로 켜고 누워야지.”

전투가 빨리 끝나 다행이야. 제국군도 이제 포기한 건가? 병력, 엄청 적지 않았어?”

수도 쪽에 뭔가 일이 터진 걸지도 모르지. , 빨리 망해야 우리도 편하게 살 텐데.”

반란군 짓도 고되단 말이야~. 그래도 미친 황제 밑에서 사는 것 보단 여기가 훨씬 좋지만.”

 

병사들의 떠드는 목소리만큼, 복도에는 입김들이 잔뜩 피어오른다. 셀렌은 아직 뜨거운 총구 끝에 살짝 손가락을 가져가대었다. 아까 전 까진 화상을 입을 것처럼 뜨거운 쇳덩이였는데, 지금은 미지근하게 느껴질 정도로 식어서 손가락이 닿아도 아무렇지 않다. 정말 겨울이구나. 사소한 것에는 일일이 반응하지 않는 그녀지만, 새삼 느껴진 계절의 존재감은 작은 중얼거림 정도를 내뱉게 하기엔 충분했다.

 

셀렌, 나는 바로 총통에게 갈게. 너도 가서 쉬어.”

, . 수고했어, 코일.”

 

하나 둘씩 흩어지는 사람들. 누군가는 방으로 향하고, 누군가는 식당으로 향한다. 셀렌에게 말을 건 남자, 코일 대위는 제 목적지를 상대에게 통보하고 마지막으로 자리를 떴다. 아무도 남지 않은 복도. 자신도 돌아가서 쉬거나 총을 정비해야겠지만, 무슨 이유 때문인지 그녀는 움직이지도 않고 우두커니 제자리에 서있었다.

 

벌써 겨울이라니.’

 

겨울은 곧 한 해의 끝과 다음 해의 시작을 뜻한다. 나이를 한 살 더 먹는 것은 아무렇지 않지만, 전쟁을 한 기간이 1년 더 늘어나는 건 아무리 봐도 좋지 않다는 말밖에 나오지 않았다. 물론 전쟁은 이제 질색이라거나 더 이상 사람을 죽이고 싶지 않다는 말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 어릴 때부터 철저하게 군인으로 자라온 그녀에게 전투는 해야 할 일 중 하나일 뿐이었고, 죽이지 않으면 죽는 이 세상에서 총을 내려놓고 다시 제국에 발을 들이고 싶지도 않았으니까.

 

후우.”

 

자신의 입김은 타인의 입김보다 희미하다. 모든 건 제 몸이 차가워서 그런 거겠지. 열심히 움직이며 전투해야하는 다른 병사들은 땀이라도 흘렸겠지만, 저격수인 자신은 가만히 앉아 손가락만 까딱거려야 하니 몸이 식어버리는 게 당연했다. 당연한 이치를 떠올리며 제가 이상한 건 아니라는 걸 확인한 셀렌은 자신이 있어야 할 곳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군인들의 방과는 조금 떨어진 곳, 그 누구도 들리고 싶어 하지 않는, 이 열차에서 유일한 군의관의 방으로.

 

어서 오게, 중위. 혼자 온 걸 보면 부상자는 없나보군. 통탄스러운 일이야.”

 

히히히. 정말로 즐거워 보이는 목소리로 웃는 디스티는 의자에서 일어나지도 않고 고개만 돌려 셀렌의 귀가를 확인했다.

지나치게 우수한 군인이자 제국에 있던 시절부터 제 감시병이었던 그녀는, 정말 어지간해선 다치지 않는다. 어차피 오늘도 사지 멀쩡한 상태로 돌아오겠지. 그리 생각하고 있던 그였기에, 말로는 통탄스럽니 뭐니 하면서도 표정은 조금도 일그러트리지 않았다. 부상병이 없는 건 확실히 실망스러워도, 뭐 언제 그가 수술이 필요한 병사들만 잡아 개조하던 사람이던가. 정말로 손이 근질근질하면 자고 있는 병사를 아무나 잡아와 팔다리를 뜯어고치는 디스티였으니, 셀렌의 입장에서는 저 환영인사가 영혼 없는 단어의 나열로밖에 느껴지지 않을 게 분명했다.

 

제국군의 병력이 평소의 반도 안 되었습니다. 다치고 뭐고 할 것도 없이, 전원 무사귀환 했습니다. 반대편 진영은 전멸. 워낙 총알이 많이 박혔을 거라 군의관이 좋아할 만한 재료도 없었을 거라 생각합니다.”

그런가. 뭐어, 그런 이야기는 총통에게 하도록 해. 나는 관심 없으니까.”

총통에게는 코일 대위가 갔습니다.”

그럼 됐어. 난 전투는 관심 없으니까. 개조인간이 날뛰는 전투라면 좀 관심이 갈지도 모르겠지만.”

 

이 세상에 당신 외에 병력으로 써먹을 만한 개조인간을 만드는 사람이 몇이나 있다고.

마음속으로 중얼거린 셀렌은 차갑게 식은 라이플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중위?”

. 군의관.”

자네, 동상이군. 역시 물자의 질이 좋지 않아 추위를 다 막지 못하는 건가?”

?”

 

동상이라니. 뜬금없는 진단이지만, 디스티가 오진할 가능성은 극히 희박하다. 일단은 개조에 미친 남자이긴 해도, 그의 의술은 일류급이었으니까. 불신 반 신뢰 반의 심정으로 제 손끝을 본 셀렌은 두껍다고 하기엔 힘든 장갑을 벗었다.

 

.”

거 봐. 동상이라고 했지? 이히히. 굳이 장갑을 벗지 않아도 알 수 있지.”

 

디스티의 말은 얄밉지만, 이 붉게 부어오른 피부는 제가 봐도 동상으로 보인다. 오늘이 유독 춥긴 했지만 동상에 걸릴 정도는 아니라 생각했는데. 그의 말대로 질 나쁜 장갑이 드디어 보온성은 상실한 걸지도 몰랐다.

 

가벼운 동상이지만 그대로두면 분명 심해질 걸? 이리 와보게.”

자를 겁니까?”

자네는 나를 뭐라고 생각 하는 건가!”

 

매드 닥터, 개조광, 악마, 광인, 그리고 최악의 묘사들만 섞어 만든 창조주의 표본.

이것저것 생각나는 대답은 있지만 지금은 을 내뱉을 타이밍은 아니다. 두 눈을 깜빡이며 대화를 회피한 그녀는 얌전히 디스티에게 다가갔다. 진료는 의사에게, 약은 약사에게. 그리고 이 열차에선 양쪽 일 모두 이 군의관이 대신하고 있으니, 아프면 결국 그에게 부탁할 수밖에 없다.

셀렌은 그 어느 때 보다도 긴장을 늦추지 않은 채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마른 침을 삼키는 그녀의 모습은 아까 전 전장에서 상대편 대장의 머리를 겨눌 때 보다 비장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렇게 긴장 할 필요 없네. 아프긴 하겠지만. 히히히.”

 

물을 데워온 디스티는 내밀어진 손을 온수에 집어넣으며 웃었다. 아무리 듣기 좋게 말한다 해도, 저래서야 역시 미친놈으로 밖에 보이질 않지. 한숨을 쉰 그녀는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얼어붙은 손끝에서, 바늘로 찌르는 듯 강렬한 통증이 밀려왔기 때문이었다.

 

조금 참게. 그러고 보니 동상에 걸린 건 이번이 처음인가? 제국의 물자는, 좋은 편이긴 했지만 자네같이 최전방에서 구르는 군인들에게까지 좋은 물자가 갔을지는 모르겠군.”

처음은 아닙니다. 대부분 전투 중 휴식시간에 간단히 응급처치하고 돌아와서 제대로 치료를 받았습니다.”

그럼 이렇게 바로 치료 받는 건 처음이겠군? 조금은 고마워하는 게 어떤가. 유능한 군의관이 있다는 건 병사에게 기쁜 일이지. 안 그런가?”

 

통증은 갈수록 심해져 간다. 셀렌은 대답을 하는 대신 고통을 참으며 옛 기억을 떠올렸다.

확실히 제국군에 있을 시절엔 지금보다는 더 나은 물자를 공급받곤 했지. 하지만 그것도 잠깐일 뿐. 물자는 금방 떨어지고, 최전선은 쉽게 지옥이 된다.

옆에서 동료의 머리가 터지는 와중 제 손발이 얼어붙는 걸 걱정하는 병사가 몇이나 될까. 셀렌은 몇 번의 동상을 겪긴 했지만, 그것에 아파한 기억은 거의 없었다. 죽지 않기 위해 죽이고, 동료의 인식표를 수거해 가면 지쳐 잠드는 게 일상인 매일이었으니까. 동상은 대부분 잠든 사이 의무병들이 치료해 줬었지. 그렇다 보니 이 저릿저릿한 고통도, 너무나 생소하기만 했다.

 

진통제를 가져다주지, 조금만 기다리게.”

 

참으로 친절한 진료다. 어떤 면에서 보면 애틋해 보이기까지 한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그리 생각할지 몰라도 셀렌은 알고 있었다. 디스티가 자신에게 유독 신경을 쓰고 정성을 들이는 것은 일반적인 인간이 타인에게 느낄 수 있는 감정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그가 자신에게 느끼는 정은, 평범한 애정이나 동료애 같은 아니었다.

애초에 그가, 디스티가 인간의 감정을 이해하고 따라 할 수 있는 인물이던가? 셀렌은 단호하게 그 질문에 고개를 저을 수 있었다. 분명 인간과 같은 유전자를 가지고 있고, 생긴 것도 인간 그 자체지만, 디스티는 인간이 아니다. 짐승이거나, 신이거나, 악마에 더 가까운 무언가 이겠지. 그가 자신에게 표출하는 감정은, 말하자면 내리사랑 같은 것이었다. 신이 자신의 피조물을 사랑하는 것 같은, 경전에나 나올 법한 사랑.

 

피조물이라.’

 

자신을 만들어 준 것은 양친의 유전자와 모친의 자궁이다. 그렇지만, 확실히 자신은 디스티의 피조물이었지. 셀렌은 오른쪽에서 뛰고 있는 자신의 심장 그 위에 손을 얹었다. 잃어버린 개인에 대한 개념을 찾아준 사람도, 심장을 옮겨 일반이라는 틀에서 벗어나게 한 사람도, 자신에게 선택지라는 자유를 준 사람도. 모두, 얄궂기 그지없게도, 디스티 그였으니까.

인간은 신을 원망하기도 하고 맹목적으로 따르기도 하지.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피조물인 셀렌은, 디스티를 경외하기도 하고 혐오하기도 했다.

물론, 경외하는 감정 보다는 혐오하고 경계하는 감정이 훨씬 더 크긴 했지만.

 

그나저나 벌써 겨울인가? 곧 한 해도 끝이겠군,”

날이 제법 추워졌는데 이제야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그건 그렇지만, 동상에 걸릴 정도의 추위가 왔을 줄은 몰랐거든.”

여기는 늘 서늘하니, 이해는 갑니다.”

 

한 여름에도 디스티의 연구실은 언제나 싸늘한 냉기가 가득하다. ‘꼭 시체를 보관하는 방 같아서 역겨워.’ 코일 대위가 언젠가 중얼거린 말을 떠올린 셀렌은 고개를 끄덕였다.

 

군의관은 겨울을 좋아하십니까?”

갑자기 그건 왜 묻지?”

그냥 궁금해졌을 뿐입니다.”

부패가 더뎌지는 계절이라 좋아. 얼어 죽는 시체도 많이 나오고.”

 

그렇게 대답 할 줄 알았습니다.

감흥 없는 말투로 대답한 셀렌이 녹아가는 손끝을 가볍게 움직여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