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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D/Dungeon & Fighter

렛츠드림 합작 / 양


※ 데스페라도 드림, 오리주 주의

※ 합작 홈 주소 → http://letsdream0322.tistory.com/17




written by Esoruen

 

 

 

젊은이,

양들의 울음소리는 멈추었는가?

 

 

 

전해지는 말에 의하면 양들은 알려진 것처럼 순한 성격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고 한다.

다른 동물들에 비하면 확실히 순하다고 할 수 있는 편이고 겁도 많다. 하지만 고집이 세고 제멋대로라 가끔 사람을 치거나 같은 양들끼리 치고 박기도 한다는 걸 듣고 나면, 양이란 여러모로 비뚤어진 생물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었다.

‘꼭 그 녀석 같군’

블래스터에게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데스페라도는 무심코 그렇게 생각하고 말았다. 생긴 것은 마냥 귀엽고 순한데 실은 고집쟁이. 제 곁을 5년 넘게 지키고 있는 연인과 똑같지 않은가. 입 밖으로는 내지 않았지만 확실하게 닮았다. 그렇게 결론 내렸을 때 그가 들은 그 다음 이야기는 제 몹쓸 상상력을 원망하기 딱 좋은 내용이었다.

 

“그런데 의외로 도축 당할 때는 찍소리도 못하고 죽는다나봐”

“…도축당할 때?”

“응. 어떤 지방에선 가슴부분을 칼로 찢어서 대동맥을 손으로 움켜쥐는데, 저항하는 시늉도 못하고 죽는다고 하더라고. 아, 물론 아닌 경우도 있지만. 시끄럽게 울부짖다 죽는 녀석들 보다는 저렇게 죽는 게 대부분이다 이거지”

 

쓸데없는 소리를. 마음속으로 중얼거린 데스페라도는 미지근한 맥주를 단숨에 들이켰다. 언제나 죽음을 보고 죽음을 만들어내는 주제에 이런 이야기에 불쾌해 할 정도로 데스페라도는 섬세한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 막, 머릿속으로 제 연인과 양을 동일시하고 있는데 저런 소리를 들으면 누구라도 기분이 나빠질게 분명했다.

 

“그런데 갑자기 웬 양 이야기야?”

“응? 아니 그냥 생각나서. 나도 얼마 전에 듣고 신기해했거든. 왜 보통은 얌전한 애들보고 순한 양 같다고 그러잖아? 세상에는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게 상식이 아닌 경우도 있다 이거지”

“별게 다 신기하군, 그렇게 신기한 게 보고 싶으면 무법지대에 와. 기절할 정도로 놀랄 테니”

“기절이 아니라 죽을 것 같은데~”

 

능청스럽게 농담을 웃어넘기는 블래스터와 달리 데스페라도는 웃지 않았다. 도축. 비명도 없는 죽음. 그저 흘려들으면 되는 단어들이 머릿속에 남아 머리를 무겁게 만들었다. 다른 생각을 해야 한다. 그건 잘 알고 있었지만 아직도 그의 머릿속에는 양 같은 연인 웃고 있었다.

 

“루엔은 잘 지내?”

 

데스페라도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읽기라도 한 걸까. 블래스터는 참으로 타이밍 좋게 그녀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저 눈치 없는 녀석. 혹은 너무 눈치가 좋은 녀석. 우연이라고 하기엔 너무나도 절묘한 안부인사에 데스페라도는 머리를 헝클였다.

 

“못 지낼 이유가 없지”

“그건 그래. 하하, 너희 진짜 사이좋다니까~ 카르텔만 사라지고 나면 더 잘 지낼 텐데”

“그러면 너무 심심해졌다고 할 걸. 그녀석이라면”

 

방금 그 말은 농담이 아니었다. 데스페라도가 아는 루엔이라는 여자는, 갑자기 평화가 찾아오면 세상이 재미없어졌다며 한탄하거나 새로운 스릴을 찾아 나설게 분명한 뼛속까지 무법자인 인간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자신도 그녀도, 이미 이 죽음에 가까운 삶에 너무나도 길들여져 있었다.

비극인가? 데스페라도는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죽음과 멀다고 해서 행복하고 가깝다고 불행하다 하기에는, 그는 제 인생에 충분히 만족하고 있었으니까.

 

“하긴, 너흰 그렇게 적당히 위험하게 사는 게 어울리긴 해. 솔직히 너희가 살해당할 것 같지도 않고”

“그거 칭찬이냐, 욕이냐?”

“당연히 칭찬이지. 너희를 죽일 수 있는 녀석이 무법지대에 있긴 하겠어?”

 

평소라면 당연하게 동의했을 말일 텐데, 아까 전 이야기 때문일까. 데스페라도는 저 말에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 확실히, 그는 자신도 루엔도 절대 누군가의 손에 죽지 않을 거라고 확신했다. 그건 오만이나 소망도 아니었고, 막연한 기도도 아니었다. 자신들은 반드시 살아남을 것이라는 각오, 그리고 죽는다면 늙어서 죽거나 병사(病死) 정도겠지. 절대 자신도, 루엔도, 누군가에게 사냥 당할 리 없었다.

분명, 그럴 터인데.

 

‘양은 도축 당할 때 찍 소리도 못하고 죽는데’

 

만약에 루엔이 죽는다면, 그녀도 그렇게 소리도 내지 못하고 죽을까.

데스페라도는 이제까지 눈앞에서 수많은 죽음을 보았다. 죽음이라는 인생의 마침표는 모두에게 결국 찾아오는 것이었지만, 그 형태는 모두가 달랐다. 자신이 죽인 수많은 카르텔 요원들만 해도 그랬다. 누군가는 자신을 죽인 데스페라도에게 저주를 퍼부으며 쓰러졌고, 누군가는 외마디 비명만 남기고 숨을 거두었다. 다양한 유언들, 그 중에서는 분명 침묵도 있었다.

루엔은 죽는다면, 무슨 말을 남길까.

 

“어, 데스페라도. 좀 있으면 자정인데 안 가도 되냐?”

“…어?”

 

끔찍한 상상을 끊어준 것은 블래스터의 말이었다. 시계를 확인한 데스페라도는 정신이 확 들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정 전까지는 돌아가야 잔소리를 듣지 않는데. 이대로라면 아무리 급하게 가도 시간에 맞추지 못한다. 루엔이 무서운 것은 아니었지만, 연인에게 신뢰를 주지 못하는 것은 아무리 자신이라도 싫었다. 그리고 루엔은 한번 삐지면 오래 가니까, 애초에 토라질 일을 만들지 않는 쪽이 현명했다.

 

“미안하군, 먼저 가지”

“아냐~ 이쪽이야 말로 술 상대 해줘서 고마운 걸~?”

“적당히 마시고 들어가라”

 

의례적인 인사, 가볍게 손을 흔들고 페도라를 챙겨 쓴 그는 빠른 걸음으로 집으로 향했다. 많이 늦을 것 같지는 않으니 그다지 화 내지 않으려나. 먼저 자고 있다면 좋을 텐데. 평소와 같은 걱정을 하며 떠올리는 루엔의 모습은 희고 검었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생머리는 검은색. 흉터와 상처가 가득한 피부는 흰색. 전체적으로 모노톤인 그녀를 볼 때 가장 눈에 띄게 되는 것은 역시 그 자색의 눈동자일까.

매일 보는 탓일지 몰라도, 언제나 그의 머릿속에 그려지는 루엔은 실제 현실의 그녀처럼 리얼하고 생기가 넘쳤다. 금방이라도 말을 걸면 대답을 할 것처럼. 이름을 부르면, 돌아보며 웃어 줄 것처럼.

 

‘양은 그다지 순한 동물이 아니야’

 

아. 머릿속의 그녀가 또박또박 말하는 문장은 아까 전 블래스터가 한 말과 동일했다. 정말이지, 겨우 잊어버리고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왜 자신은 늘 쓸데없는 것을 오래 기억해 두는 걸까. 바쁘게 걸어가면서도 앞을 보기보다는 머릿속 그녀를 상대하느라 바쁜 데스페라도는 담배를 꺼내 물었다.

 

‘네가 양은 아니잖아?’

‘양 같다고 생각했으면서!’

 

어설픈 변명은 통하지 않는다. 그걸 잘 알면서도 데스페라도는 굳이 그렇게 생각했다가 한소리를 듣고 말았다. 머릿속의 루엔은 오늘도 장난스럽게 웃고 있었다. 밤하늘 같은 눈을 깜빡이며, 양털같이 흰 얼굴을 까딱까딱 흔들며.

잡념과 망상에 도망치듯 빠른 걸음으로 걷던 데스페라도는 예상보다 빨리 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사실 집이라고 하기 보단, 임시 거처정도의 의미가 알맞은 장소였지만 그는 이곳을 제 집이라고 불렀다. 자신과 연인이 함께 있다면 그것이 비록 하루 묵고 떠나는 곳이라도 집이었다. 그는 루엔에게 그렇게 배웠었다.

 

“나 왔다”

“아, 왔어?”

 

간당간당하게 자정 전에 들어와서일까, 아니면 시간을 신경 쓰고 있지 않았던 걸까. 루엔은 예상 외로 늦은 시간에 귀가한 데스페라도에게 화내지 않았다.

 

“아직 안자고 있었냐?”

“원래 이 시간에 안자잖아. 나는. 그리고 너 기다려야 하는데 어떻게 자?”

“내가 애도 아니고”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데스페라도는 루엔의 저런 마음이 고마웠다. 걱정할 필요가 없는데도 걱정하고, 사소한 것에도 신경을 써준다. 연인이 아니면 힘든 일, 아니 연인끼리도 힘든 일을 루엔은 당연하게 데스페라도에게 해주었다. 자신은 하고 싶어도 잘 할 수 없는 일. 누군가를 생각하고 맞춰주는 것은 배운다고 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블래스터는 잘 있어?”

“얼굴색은 더 좋아진 것 같던데”

“그거 다행이네~ 황도는 평화로운 거 같아서. 무슨 이야기 했어? 별일 없데?”

 

루엔의 질문에는 악의가 없었지만, 데스페라도는 저 말에 또 잊으려 했던 말을 떠올려야 했다. 블래스터랑 한 이야기라. 분명 두 사람은 몇 시간 정도 술을 마시며 별별 이야기를 다 했지만 지금 그의 머릿속에 남아있는 이야기는 하나뿐이었다. 양. 그녀와 꼭 닮은 고집이 센 동물.

 

“별일 없으니 만나러 온 거겠지. 뭘 쓸데없는 걸 물어?”

“그런가?”

 

평소보다 날이 선 대답에 루엔은 아무 불평도 하지 않았다. 아마 그건 데스페라도의 표정이 별로 좋지 않은 걸 두 눈으로 봤기 때문이겠지. 제 얼굴을 볼 수 없는 그로서는 말을 물고 늘어지지 않는 루엔이 신기할 뿐이었지만, 분위기를 읽은 그녀 덕분에 데스페라도는 더 이상 그 기분 나쁜 대화를 떠올릴 필요가 없었다.

 

“자자. 피곤해”

 

사실은 하나도 피곤하지 않았다.

아니, 정확하게는 몸은 멀쩡하지만 머리는 피곤하다고 해야겠지. 오늘은 카르텔 사냥도 가지 않았고 싸움도 없었다. 다만 그놈의 양 이야기가, 재수 없는 도축에 관한 이야기가 평온했던 뇌 속을 헤집어 놓은 것 뿐.

제게 있어 연인이란 도대체 무슨 의미를 가졌기에, 겨우 나쁜 상상 하나에 이렇게나 괴로워지는 걸까. 데스페라도는 제 옆에 나란히 누워 웃는 루엔의 새하얀 목덜미를 바라보았다.

화상자국과 흉터로 얼룩진 손과 달리, 흠집 하나 없는 곧은 목.

닿지 않아도 온기가 느껴지는 그 목이 오늘따라 가늘게 보이는 것은 왜였을까.

 

‘한 손에 다 들어올 것 같네’

 

그렇게 생각하고 손을 뻗자. 루엔은 작게 웃었다. 간지러워. 웃음을 참지 않는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턱부터 어깨까지. 천천히 목을 쓸어내리자 따뜻한 온기가 손에 착 감겨왔다. 손가락 끝으로만 목을 쓰다듬던 데스페라도는 무언가에 홀린 듯, 손바닥, 손 전체로 그 목을 감쌌다. 제 손이 커서일까. 아니면 그 목이 터무니없이 가늘어서일까. 루엔의 목은 데스페라도의 한 손에 쏙 들어왔다.

 

‘만약 이대로 손에 힘을 준다면’

 

평소에는 할 리가 없는 생각을 하는 것도 전부 그 쓸데없는 상식 이야기 때문이다. 그렇게 치부해 버리면 마음이 편할 텐데 그는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이것은 순전 자신의 비뚤어진 호기심과 욕심이었다. 그는 냉정했고, 제 욕망과 착란정도는 구분 할 수 있는 어른이었다.

제가 원하는 것은 도축과는 다른 행위였다. 일방적인 폭력과 상해, 하지만 감정과 본능이 더 요동치는 그것은 도축보다는 사냥에 가까운 것이다.

굶주린 이리가 무리에서 떨어진 양의 목을 물고 달아나는 것과 같은, 그런 일.

 

메에.

 

머릿속에서 울리는 양의 울음소리는 흰 털을 가진 네발짐승이 내는 것이 아니었다. 그건 길고 곧은 검은 머리를 가진, 따뜻한 목에서 웃음소리를 토해내는 생물의 심술궂은 흉내였다.

양은 도축당할 때 비명도 지르지 않고 죽는다고 했다.

그렇다면 제 연인도 그렇게 죽어버릴까.

제 목을 감싸고 있는 손이 거슬리지도 않는 걸까. 루엔은 그대로 잠들어 버렸다. 머릿속의 짓궂은 검은 양은 여전히 울고 있고, 시계바늘은 1시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녹색의 눈을 가진 이리는 이를 감추고 잠에 들었다.

양의 울음소리는 의식이 꺼져가는 와중에도 그의 머릿속에 울리고 있었다.

 

 

 

데스페라도는 평소보다 일찍 잠에서 깨어났다. 누군가가 깨우지도 않았고, 악몽을 꾼 것도 아닌데 어째서 이렇게 일찍 눈이 떠진 걸까. 그로선 기가 찰 노릇이었지만 날이 다 밝지 않은 새벽의 느낌은 불쾌하지 않았다. 이왕 일어난 것, 다시 잠들기 보다는 깨어있는 것이 좋겠지. 그렇게 생각하고 상체를 들자 제 옆에서 자고 있는 루엔이 눈에 들어왔다.

어제는 이렇게 나란히 누워 잤었지. 잠들었을 때와 똑같은 상황인데 잠들기 전과 깨어난 후의 느낌이 다른 것은 어째서일까. 습관적으로 담배를 꺼내 문 데스페라도는 이불도 덮지 않은 그녀가 너무나도 추워보였다.

요즘 날씨는 그렇게 춥지 않다. 지금 자신도 추위를 느끼지 않았고, 아마 루엔도 마찬가지일 것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제 연인이 너무나도 추워보였다. 아니, 따뜻해 보이지가 않았다. 한손으로는 술이 덜 깬 머리를 짚고, 한손으로는 어제 그렇게나 쓰다듬던 루엔의 목을 더듬자 비슷한 온도가 양 손에서 느껴졌다.

차가워. 분명 평범한 사람의 체온인데도 데스페라도는 루엔이 차갑다고 느꼈다. 싸늘하다는 느낌은 아니었지만, 몸에 열이 많은 그녀가 자신과 체온이 비슷하니 그는 갑자기 루엔이 얼어 죽은 시체마냥 차갑게 느껴졌다.

죽은 건 아니겠지? 농담하는 것 치고는 심각한 표정으로 담배를 끈 그는 도로 누워 제 연인을 끌어안았다. 작은 숨소리. 호흡하느라 오르락내리락 거리는 흉부. 제 품안의 어린양은 분명 살아있었다.

 

메에.

 

의식이 또렷해지자 또 머릿속에는 양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지겹지도 않은가. 그는 진부하고 식상한 방법으로 자신을 괴롭히는 무의식에 쏘아붙였지만 그건 소용없는 저항이었다. 머릿속은 비어있다. 오늘은 고집쟁이 양도 없었다. 이 좁은 방에 있는 루엔은 제 품에 안긴 여자 뿐. 그런데도, 데스페라도는 자꾸 귓가에 들리는 양의 울음소리에 진절머리가 났다.

어쩌면 제가 일찍 깨어난 것도, 이 빌어먹을 울음소리 때문이 아닐까.

꿈은 잘 꾸지 않고 꿔도 기억하지 못하는 그로선 그 정도 추측밖에 할 수 없었다. 다음에 만난다면 블래스터를 걷어차고 말테다. 엉뚱한 사람에게 짜증을 부리는 그는 결국 제일 나쁜 것은 처음 그 짐승과 제 연인을 동일선상에 둔 자신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 그렇게 알고 있으니까 더더욱 그는 짜증이 치밀었다.

천천히 움직이는 그 가슴팍에 손을 얹자 호흡의 흐름이 느껴졌다. 숨을 들이마실 땐 부풀고, 내뱉을 때는 꺼진다. 분명 자신도 하고 있을 터인 호흡운동 하나하나가 무슨 마법이라도 보고 있는 것처럼 신기하게 느껴지는 새벽. 데스페라도는 루엔의 쇄골을 더듬었다.

 

‘가슴을 가르고, 대동맥을 움켜쥐면’

 

그런 방식을 써서 죽지 않을 생명체 같은 것은 이 세상엔 없겠지. 그걸 알면서도 그는 나쁜 상상을 그만둘 수 없었다.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쇄골을 가볍게 훑는 손가락은 나이프와 같았다. 상처 따위 나지 않았는데도 벌써 피비린내가 나는 것 같은 건 순전 제 상상 때문인데. 데스페라도는 손가락을 거두지도 못하고 죽을죄라도 지은 얼굴로 가만히 있었다.

 

“…일어났어?”

 

천천히 눈을 뜬 루엔은 그렇게 말했다. 언제 일어난 걸까. 느리게 눈을 깜빡인 데스페라도는 고개를 끄덕였다.

 

“일찍 일어났네?”

“원래 너보다는 일찍 일어나지만”

“그렇지”

 

해가 다 뜨지도 않은 방 안인데도 그 미소는 선명하게 그의 눈에 들어왔다. 선홍색. 어느 여자들과 똑같은 적당히 붉은 입술. 희미하게 밝아오는 창가가 눈부셔 데스페라도는 눈을 감았다.

시각이 차단되자 촉각은 더 민감하게 깨어났다. 제 품안에 얌전히 안겨있는 연인은 오늘따라 차갑다. 분명 저 몸에는 어젯밤과 똑같은 피가 흐르고 있을 텐데 어째서일까. 데스페라도는 눈을 감고 한참 뒤에야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곳에 있는 것은 바쳐진 양이었다.

몸에 상처가 나, 붉은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양. 비명 하나 지르지 못하고 가늘게 떨리는 신체는 다정하게 옆으로 뉘여 있었다. 깜빡깜빡. 제가 아직 숨이 붙어있다는 걸 증명하려고 하는 새까만 눈동자는 데스페라도를 바라보고 있었다.

메에.

양의 울음소리에는 피비린내가 났다. 자신을 향해 누워있는 몸뚱이. 차가운, 새하얀 몸뚱이.

양은 꼭 제 품의 연인처럼 누워있었다.

아니 어쩌면 반대일지도 몰랐다.

놀라서 뜬 눈 위로 쏟아지는 햇빛이 눈부셨다. 루엔은 졸렸는지 다시 제 품안에서 잠들어 있었고, 목덜미에선 평소와 같은 온기가 올라오고 있었다. 자신도 잠시 졸아버린 걸까. 그게 아니면 아까 그 양은, 제 상식 선 안에서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착란인가. 꿈인가. 어느 쪽이던 관계없었다.

데스페라도는 따뜻한 그녀의 몸을 꽉 껴안았다.

 

 

 

“양은 그렇게 순한 동물이 아니라고 하더군”

 

데스페라도가 식탁에서 그 이야기를 꺼낸 것은 일종의 구조신호였다. 상대방은 눈치 채지 못하지만 자신은 충분히 구원받는. 고해성사라고 하기에는 아름다움이 없는, 처절한.

잼을 바른 식빵을 우물거리던 루엔은 갑자기 뜬금없이 양의 이야기를 꺼내는 데스페라도를 신기한 듯 바라보았지만, 그의 말을 흘려듣지는 않았다.

 

“그래? 그럼?”

“고집도 세서 양치기를 고생시키고, 열 받는 게 있다면 같은 양이고 사람이고 들이박고 본다고 하더라고”

“양이? 어쩐지 양이라면 들이박는걸 봐도 귀여울 거 같은데~”

“그런데 그런 양이, 도축 당할 때는 찍 소리도 않고 죽어버린다고 하면 믿겠어?”

 

도축. 그 말을 입에 담기는 생각보다 힘들지 않았다. 제 머릿속과 다르게 말은 술술 나왔고, 그걸 들은 루엔의 표정도 끔찍하지는 않았다. 왜 갑자기 그런 말을. 그녀의 표정은 딱 그 정도 의문을 가진 표정일 뿐.

 

“아무 비명도 없이 죽는다고?”

“그래. 어떤 지방에선 가슴을 찢어 대동맥을 움켜쥐는 방식으로 도축하는데, 저항도 못하고 죽는다고 들었지. 물론 날 뛰는 양이 없는 건 아니라지만, 대부분은 전자라고 했지”

“누구에게 들은 이야기야?”

“블래스터”

 

아하. 그제야 알겠다는 듯 루엔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제 무슨 이야기를 나눴나 먼저 물은 것은 분명 자신 쪽이었다. 제 연인은 단지 어제 들은 이야기를 하는 것뿐이다. 아마 그녀는 그렇게 알겠지. 데스페라도는 그걸로 좋았다. 그냥, 제 눈앞의 어린양이 이 이야기를 듣고 무슨 말을 하는지, 뭐라고 반응할지를 보고 제 머릿속 양을 쫒아내고 싶었을 뿐이었다.

 

“블래스터도 참 별걸 다 알고 있네?”

“그 녀석이 다 그렇지”

“그래도 신기하네. 양이란 생각보다 대단하구나”

 

대단하다. 그것이 그녀의 감상이었다. 데스페라도는 루엔의 반응이 제가 생각한 것을 아득히 넘었는지 대꾸할 말을 꺼내지도 못했다. 무엇이 대단하다고 느껴진 걸까. 자신은 이 이야기를 듣고, 전혀 그런 생각을 하지도 못했고 지금도 할 수 없는데.

 

“뭐가?”

“보통은 죽을 때 아파서라도 발악하잖아? 그런데 가만히 있는 게?”

“단순히 공포에 질린 걸 수도 있잖아?”

“공포의 무력함은 죽음 앞에선 아무 소용이 없어. 정확하게 말하자면, 아프면 누구라도 발버둥 친다고 하는 게 맞으려나?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잖아. 가만히 있는 건, 자의야”

 

루엔은 마치 제가 도축이라도 당해본 것 마냥 말하고 있었다. 사실은 그 반대의 입장이면서, 언제나 카르텔이라는 짐승을 잡아 죽이는 사냥꾼이면서, 눈앞의 그녀는 어째서 머릿속 그녀와 똑같은 말을 하는 걸까.

그는 다른 대답을 듣고 싶어, 이 말을 꺼낸 것인데.

메에. 울음소리는 어디서 들린 걸까. 머릿속과 현실의 소리가 뒤섞였다.

 

“이건 내 생각이지만, 아마 양은 자기를 죽이는 사람의 표정을 보고 참는 게 아닐까?”

“양이 사람의 표정을 보고?”

“그래. 양은 사람의 표정을 구분할 수 있다고 하더라고. 그러니까, 자신을 죽이는 도살자의 표정을 보고 자기도 참는 거야”

 

이야기는 아까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게 되었지만, 그는 여전히 루엔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양이 사람의 표정을 읽는 다는 사실은 별로 놀랍지 않았다. 다만, 양이 자신을 죽이는 사람을 위해 인내한다는 그 가설은 놀라웠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보통 도살이라는 건… 일반적 살육과는 느낌이 다르잖아? 누군가는 그냥 일이라고 여기고 누군가는 죽이는 대상에게 연민을 느끼겠지. 도축을 하며 희열하는 사람은 많이 없을 거라고 생각해. 그건 도살자라기 보단 이리 같은 맹수에 가깝지”

“그럼, 죽이고 싶지 않아하는 사람의 슬픔을 위해 참는다는 거야? 자신의 고통을?”

 

그녀는 고개를 부드럽게 끄덕였다.

 

“그리고 일이라고 생각하고 신속하게 가축을 도축하는 사람은, 고마워서 얌전히 있는 게 아닐까. 의도가 어떻든 최대한 고통 없이 빨리 죽여주려는 상대 앞에서 발버둥 치긴 미안하잖아?”

 

루엔의 말은 깊게 공감하기에는 어려운 부분이 많았다. 자신을 죽이려는 사람을 위해 제 감정을 억누른다. 데스페라도에겐 절대 공감 할 수 없는 이야기. 하지만 그는 아까 전 보다 마음이 개운해져 천천히 숨을 내뱉었다.

 

“뭐, 어디까지나 내 상상이지만”

“그래도 시시하지는 않았어”

“흐흐, 그거 다행이네!”

 

장난스럽게 웃는 목소리가 사랑스럽다. 아까 전 까지 들은 환청은 전부 거짓말이라고 말하듯, 루엔의 목소리에는 생기가 넘쳤다. 하지만 머릿속의 양은 입만 다물고 있을 뿐, 그의 머릿속 한가운데 떡하니 자리 잡고 나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과연 고집이 센 동물이다. 데스페라도는 쓴 웃음을 지었다.

 

‘이제 그만 돌아가지 그래’

 

새까만 양에게 물어도 양은 대답하지 않았다. 뭐, 지금 상황에선 그 노이로제가 올 것 같은 울음소리를 내주지 않은 것만 해도 감사해야 할까. 우두커니 서있는 양을 바라보던 데스페라도는 리볼버를 꺼내, 양의 머리를 쐈다.

사냥, 보복, 도축.

제 발포는 무엇에 가장 가까운 행위일까.

양은 옆으로 쓰러졌다. 쓰러져 꿈틀거리는 양은 아침에 본 그 꿈의 모습과 비슷했지만, 조금 달랐다. 데스페라도를 위해서 울지 않는, 비명을 지르는 것도 도망치는 것도 하지 않는 양의 행동에서 그는 무언가를 깨달았다.

상대방을 위해 비명을 지르지 않는 다는 것은 사랑하는 마음과 닮아있었다.

 

아아, 그래서 그렇게 잘 안다는 듯이 말했구나.

 

역시 제 연인은, 루엔은 양을 닮았다. 그렇게나 부정하던 사실을 인정하고 나자 환청은 금방 멈추었다. 조용해진 머릿속, 깨끗해진 정신으로 고개를 들자 보이는 것은 자신을 향해 웃고 있는 얼굴.

 

“입맛 없어? 오늘 따라 안 먹네. 아픈 건 아니지?”

“응? 아아, 잠시 다른 생각을 하느라. 내가 치울 테니 먼저 들어가”

“아냐~ 다 먹을 때 까지 기다릴게”

 

그녀의 배려와 고집은 동전의 양면 같은 것이었다. 남을, 정확하게는 제 연인을 향해서는 저렇게 헌신적인 여자가 밖에서는 사냥꾼이라니. 양의 도축법과 최후보다는 역시 이런 이야기가 더 흥미로웠다. 데스페라도는 마음대로 하라고 중얼거리고, 다 식은 빵을 베어 물었다.

 

 

 

양의 울음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